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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6). <하나님의 헤세드> 좌절속에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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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6). <하나님의 헤세드> 좌절속에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창세기 29:31~30: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2-16

말씀내용
1. 한 가정의 좌절에 관한 이야기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9:31입니다.
창 29:31(현대인의성경)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녀에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라헬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야곱이 이룬 가정의 좌절을 처절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좌절이야말로 야곱의 가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첫번째 주제입니다. 야곱은 원치 않는 여인 레아를 첫번째 아내로 맞아서 살아야했고,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이자, 자기의 언니인 레아와 슬픈 경쟁을 벌여야 했고, 이 싸움에서 야곱은 원치 않게도(?) 두 첩을 취하게 됩니다. 아주 빠른 시간, 약 14년의 기간 동안에 야곱은 대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비록 야곱도, 레아도, 라헬도 모두 갈등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좌절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계획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을 성경 독자들은 보게 됩니다. 좌절에도 불구하고 라기 보다는 오히려 좌절 때문에 약속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참으로 독특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좌절 속에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왜 하나님은 번영과 행복 속에서가 아니라 좌절 속에서 약속을 이루어가시는가?
성경기자가 야곱의 가정의 이야기를 길게 설명해주는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그 가정에 있는 좌절이지만, 그 이면에는 좌절 속에서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다는 것을 놀랍게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삶의 전면에 드러난 그림을 뒤집어서 볼 수 있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로 이삭 하나를 낳았고, 이삭은 야곱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언제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제대로 성취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일을 야곱의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가시는데 그 이루어가시는 모습은 정말 예상밖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의 순종과 행복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일하시는가? 아니, 보통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란 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왜 하나님은 좌절 속에서 약속을 성취해가시는 것입니까? 이런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많은 오해를 가지게 됩니다. 내가 찌그러져야 하나님이 잘 되신다 하는 식의 심각한 오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성경적 대답은, 이 방법이야말로 우리가 희생되지 않게 하시려는 고도의 훈련가이신 하나님의 훈련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약속을 성취해가시면서 그 약속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깔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리는 희생자들을 만드시면서 역사를 만들어가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십니다. 번영을 통해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어가시면 좋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셔서 고난과 환난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약속을 성취해가심으로써 우리도 만들어가시고 역사도 그 뜻대로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이런 과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입니다.

3. 좌절하는 사람들
본문을 살펴보면 좌절하는 사람들 셋을 볼 수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 그리고 야곱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런 정도의 좌절이 없었더라면 다 망했을 사람들입니다.

A. 레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의 좌절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의 좌절을 보여줍니다.

i. 우리는 잘못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은 배우게 하신다.
레아가 특별히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분명히 사기결혼의 음모에 가담하여 야곱을 속인 것에 대한 댓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에 대하여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잘못에 대한 댓가를 피하게 해주시는대신 그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배우게 하시는 방법으로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십니다. 댓가는 지불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레아는 남편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를 생각하게 합니다.
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레아가 누구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남편인 야곱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낳은 처음 네 아들의 이름은 모두가 레아의 신앙을 표현해주고 있는 이름들입니다. 첫 아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는 의미인데, 레아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시고 이제 아들을 주셨으니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창 29:31). 둘째는 시므온입니다. 뜻은 ‘들으시는 분’인데,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을 들으시고 둘째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창 29:33). 즉, 첫째를 낳고 남편의 사랑을 기대했으나 그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아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드디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둘째를 주셨습니다. 세째는 레위입니다. ‘연합하다, 붙다’라는 의미인데, 이제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이 나에게 붙겠지, 연합하겠지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네째는 유다라고 했습니다.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세째 레위를 낳고 레아의 기대대로 야곱이 그녀에게 붙어서 사랑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네째를 낳은 레아는 이제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리로다 라고 찬송을 합니다. 남편의 사랑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하시지만, 거기서 이야기가 절대로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의 일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좌절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ii. 하나님은 상황을 변화시켜주시지 않고 사람을 변화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레아의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켜주시지는 않으셨지만, 오히려 레아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아에게 이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부족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동의하실 수 있으십니까?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 자체를 변화시켜주심으로써 응답해주시기도 하시지만, 많은 경우에 상황 보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주심으로써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동일하지만, 어느 새 그 상황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내가 변화될 때에야 비로소 상황 종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좀 바꾸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바꾸어주십시오.”라고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 딸아, 내 촛점이 너 자신인 것을 모르겠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비련의 여인 레아는 결국 이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B. 라헬: 남편 사랑을 받지만 자식이 없는 여인의 좌절
라헬은 남편의 사랑은 받고 있지만 자식이 없는 여인의 좌절을 보여줍니다.

i. 불신의 댓가: 남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긴장과 좌절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늘 긴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긴장은 자기가 자식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과 그 사랑을 자녀를 잘 낳는 언니인 레아에게 언젠가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라헬의 삶을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만 좌절하는 것이 아니고 가진 사람도 나름대로는 좌절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사랑했던 남녀인 야곱과 라헬이 성경에 남겨둔 유일한 대화 기록은 이것입니다. 라헬이 말합니다.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30:1). 야곱의 대답입니다.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30:2)…..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라헬의 불신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에 자족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사랑해도 자식을 낳게 하라고 할 수 없는 요구를 하면서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라헬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녀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안겨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신을 보아야만 했고, 그것은 불신의 댓가로 만들어진 긴장과 좌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ii. 자부심/자존심이 치루는 댓가가 영적 성장점이다.
라헬은 또한 자기의 아름다움을 인하여 교만했을 것입니다. 언니와 맺어진 결혼 축제날에 야곱이 자기를 위해서 또 다시 7년을 일하겠다고 아버지 라반에게 하는 말을 들었던 날부터 시작해서 라헬의 자만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야곱이 또 다시 자기를 얻기 위해서 7년을 일하는 그 모든 날들은 라헬은 자기가 진짜 야곱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나날이었을 것입니다. 라헬은 자기의 생각 속에서 공주였습니다. 하나님은 라헬을 다루십니다. 그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심으로 그녀를 낮추시고 그녀에게 성장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언니가 4명의 아들들을 낳는 동안 자신은 한 명의 아이도 얻지 못합니다. 라헬은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 남편의 사랑, 게다가 스스로가 취해 사는 자만심과 자부심, 자존심입니다. 딱 한 가지가 없습니다. 아들이 없습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여인의 수치였습니다. 과거 우리의 전통사회가 그랬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훨씬 이 대목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녀는 아들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존심과 자부심이 무너지는 피할 수 없는 경험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늘 네 아들의 엄마인 언니와 비교가 되었을 것이고, 야곱이 아들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아도 화가 치밀어올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부심과 자존심이 깨어지는 곳이 바로 영적인 성장점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가실 때 제일 먼저 자부심과 자존심이 무너지게 하십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가 성장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신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라헬의 자부심을 건드리시지만, 라헬은 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iii. 육적 문제해결방식이 가져오는 영적 착각: 단, 납달리.
그것은 바로 자기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대신 낳게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라헬은 이처럼 절망적인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문제를 육신적인 방법으로 푸는 모습입니다.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이 제안을 들었을 때 그는 옛날 어린 시절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합당하지 않은 생각인지도 알았어야 했습니다. 또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야곱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을 재연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육신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근저에는 라헬의 꺽이지 않는 자존심이 작용을 합니다. 여러분, 자존심 세우려고 육신적인 방법을 쓰는 것 때문에 멍든 사람이 참 많습니다.

빌하를 통해 낳은 두 아들의 이름을 라헬이 지어주는 것을 보면 그녀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자기 처지를 변호해주셨다고 믿었기에 단 곧 ‘하나님이 변호하셨다’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라헬의 착각이었습니다. 특별히 영적 착각입니다. 둘째는 납달리인데 라헬은 자기가 언니인 레아와 경쟁하여 이겼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나의 싸움 혹은 나의 갈등’을 의미하는 납달리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착각이었습니다. 육신적 문제 해결은 더 많은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육신적으로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영적 착각에 근거한 말들을 많이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iv. 경쟁은 믿음을 약화시킨다?라헬의 이야기.
결국 이 사건은 경쟁자 레아로 하여금 자기의 여종 실바도 남편의 첩으로 주어 두 아들을 더 낳게 만듭니다. 경쟁은 끝이 없습니다. 이제 막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한 레아의 마음의 고요를 깨뜨린 사건은 바로 빌하가 두 아들을 낳은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레아의 경쟁심(죄성입니다)에 불을 붙였습니다. 여러분, 경쟁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 생활에 독소로 작용하는지 아십니까?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사람의 눈에 하나님이 들어올리가 없습니다. 경쟁은 레아의 평정과 자족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사라지고 라헬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여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고 갓과 아셀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여인 사이에서 휘둘리는 인생인 야곱을 볼 수 있습니다. 갓이 행운(fortune)을 뜻하고 아셀이 행복(happiness)을 뜻하는 말인데, 이 이름들을 보면 역시 레아의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레아는 이제 자식들을 넷이나 가진 아내로서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갓과 아셀 두 이름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보이지 않습니다. 레아는 그저 동생과의 경쟁에서 숫자 놀음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경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무너지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사람이 커보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v. 인간이 진짜 좌절할 때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설 수 있다(30:14~24).
아이들이 자라던 어느 때, 밀추수를 하던 계절에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따와서 어머니 레아에게 줍니다. 당시 합환채는 여인들에게 수태력 증진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라헬은 레아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레아는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라헬은 거래를 하자고 합니다. “합환채를 주는 대신 오늘 밤 내 남편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대화를 잘 보십시오(30:15). 서로가 ‘내 남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레아가 내 남편을 네가 빼았았다고 말합니다마는, 사실 누가 정말 남편을 빼앗은 사람입니까? 라헬은 ‘바로 언니, 너야’라고 대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거래를 제안합니다. 라헬은 아직도 자신의 불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하여 자식을 낳은 것은 합환채를 먹은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레아는 다시 두 아들을 더 낳게 됩니다. 잇사갈과 스불론입니다. 잇사갈을 낳고 레아는 ‘하나님이 내게 상급을 주셨다’고 고백했고, 여섯째는 스불론이라고 하여 ‘하나님이 내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레아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배우게 되고 그것을 고백하는 자리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합환채를 먹고도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리고 그 사이에 오히려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더 낳는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라헬은 점점 자기의 노력을 내려놓게 되고 라헬의 좌절은 비로소 진짜 좌절이 되어 라헬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합환채 사건 이후 3년이 흐르는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라헬이 이렇게 자기의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자, 하나님은 그녀에게 아들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첫 아들 요셉을 낳으면서 라헬은 하나님이 내 수치를 제거하셨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아들을 더 주시기를’ 바라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자식을 주신 것은 합환채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입니다’(22).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창 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시고 그녀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녀가 드디어 기도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라헬이 드디어 잔꾀를 부리고 자기 방식대로 노력하기를 포기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오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것이 행위를 의존하는데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 곧 믿음으로 전환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라헬에게 이제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게 될 인물인 요셉을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짜 좌절하고 자기를 발견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은혜도 임하는 법입니다. 자기를 보게 하지 못하는 좌절은 진짜 좌절이 아닙니다.

C. 야곱: 아무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고단한 가장의 좌절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문제 많은 가정의 가장인 야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결혼 이후 13년 동안 정말 안팎으로 고단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고단한 삶을 통해서 그리고 자기야말로 경쟁하는 사람이었는데(야곱이란 이름이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임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그는 자기의 두 아내의 그치지 않는 경쟁을 보면서 그 경쟁의 쓴 열매를 먹고 그 잔을 남김없이 마셔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조절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에서 만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본문에 나온 야곱의 한 마디입니다. 그는 라헬에게 노를 발하며 말했습니다.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30:2) 야곱은 자신의 좌절과 분노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야곱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야곱 자신도 놀랄 일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좌절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곱이란 인물도 훈련을 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가고 계셨습니다.

4. 해결의 길: 헤세드, 헤세드, 헤세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 야곱 가정의 이야기는 모아지기 시작합니다. 레아도 라헬도 하나님의 은혜?헤세드?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결의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의 헤세드를 뼛속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가정을 통해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의 지나친 자식 경쟁?이것은 물론 죄성의 발현입니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좌절로 가득차 있지만 그렇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좌절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찌 보면 좌절로 가득찬 인생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인애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봅니다. 우리 인생의 해결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오늘 이 본문 말씀입니다. 몇 가지 얻을 교훈을 정리합니다.

A. 하나님의 사람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아니 온 생애를 걸려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안심하고 팔짱낄 일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지금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루어가고 계시고 성취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후에 어떻게 하실런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목양하면서 1년이나 2년 안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속단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만들어지는데에는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대를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좀 더 기다리십시오.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좀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공사중이니까 말입니다.

B. 좌절, 하나님의 훈련학교의 필수 과정
시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좌절이라는 하나님의 훈련 학교의 필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만들어가십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이 없다는 것 때문에 좌절했고 그 좌절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라헬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았고 남편의 사랑도 얻었지만, 자식이 없으므로 좌절하게 되었고, 그것도 온갖 인간적 방법을 다 써보고서야 비로소 진짜 좌절을 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야곱도 이 말썽많은 가정의 고단한 가장으로서의 십수년이란 세월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좌절이라는 상황 속에 계시다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참 좌절이 되게 하십시오. 자기를 발견하기 까지 말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신뢰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기억하라.
좌절 속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좌절을 주실 수 있으신 것은 우리에 대하여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이요, 자녀된 자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을 더욱 신뢰하십시오. 세상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좌절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자비하신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셔 자비로 날 감싸주시네
주님앞에 이 몸을 맡길 때 힘 주시네 위로함 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하셨네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 순간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이 노래는 그야말로 “야곱의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생애: 하나님의 헤세드의 주제에 가장 적합한 노래입니다. 함께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