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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5). <하나님의 헤세드> 불행의 거울 속에서 자기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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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5). <하나님의 헤세드> 불행의 거울 속에서 자기를 보다

창세기 29:1-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2-09

말씀내용
1. 자기를 알아가는 학교: 불행의 거울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자기 자녀로 기르시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기르는 방식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부모의 양육방식에 대한 반항 혹은 몰이해한 순응을 함으로써 부모와 건강한 관계 안에서 자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야곱과 같은 인물을 살펴볼 때, 유념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자녀를 기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가 상고하려고 하는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불행의 거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살펴볼 기회를 가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거울을 보고 안 보고는 우리가 합니다. 인간이 모두 행복해지기를 갈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불행이든지 자기 인생에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것을 무감각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불행하다’는 느낌이 드는 상황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때 우리는 좀 더 민감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불행의 거울이야말로 자기를 알아가는 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의 학교에 우리를 입학시키셔서 불행의 거울을 보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우리 자신으로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우리와 온전한 관계를 맺으실 수 있고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섭리와 약속(28:15)의 성취(1~14a)
성경을 창세기의 처음부터 읽던 이들은 야곱이 하란에 이르는 과정, 라헬을 만나서 라반의 집으로 인도를 받는 장면이 왠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창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서 종을 하란으로 보냈을 때의 장면과 매우 흡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종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온 리브가를 ‘순적히’ 만나게 되고 그 아비의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 기자는 이런 차이들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A. 기도하지 않는 야곱
야곱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벧엘 광야에서 놀라운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서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인격적이지 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종은 구체적으로 자기 주인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 기도가 응답 받는 것을 경험하지만, 야곱은 여기 어디에도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B. 순적한 만남?신실하신 하나님
야곱은 기도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했던 아브라함의 종에게 순적하게 리브가를 만나게 하신 것과 똑같이 순적하게 인도하셔서 그로 하여금 라헬을 만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그분의 섭리 가운데서 인도해오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단지 그 때 그 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섭리의 비밀들이 어떤 것들은 깨달아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소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하신 일들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섭리는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는 것은 ‘창세전’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때, 이 섭리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때부터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인생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부터, 아니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형성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우리 인생을 향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각 사람을 길러오시는 분이십니다. 굳이 말하자면, 야곱이 자기 욕심과 지혜로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모든 일들 속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는 작용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야곱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것은 아니지만, 야곱이 잘못 행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가 실패하지 않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다는 말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대목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앞장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해주신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금 이루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약속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사랑어린 섭리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비록 야곱은 지금 당장 그것을 생각하거나 깨닫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것을 결국에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들을 때, 읽을 때, 공부할 때 조차도 다 깨닫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이것이 그것이구나 하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는 것을 결코 소홀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주고 계시는 것을 벌써 시작하신 것입니다.

C. 감사하지 않는 야곱
비록 야곱은 기도하지 않았지만 순적하게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 연애 이야기가 여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야곱에게 있는 것은 오직 남성의 박력과 열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감사를 했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라헬을 만나자 그는 어디서 그런 힘이 ㅤㅅㅗㄷ아나왔는지 우물을 덮고 있는 돌을 누가 말했듯이 ‘병마개 따듯이’ 치워버리고는 라헬이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게 합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우물을 덮어놓은 돌들은 보통 여러 남자가 들어야 옮길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할 때 놀라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한 행동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운 것입니다. 어느 학자는 성경에서 아가서와 잠언 7:13의 음녀와의 입맞춤을 제외하면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입맞춤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친족들 안에서 그것이 허용되었다고 합니다만, 아무리 친족이라고 해도 이렇게 생면부지의 친족이 그것도 처녀와 총각이 만나서 이렇게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야곱은 라헬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에게 반해서 사랑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이런 순적한 만남에 대하여 감사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개입을 깨닫지 못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단지, 그는 이 길고 외로운 여행이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울음이 터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제 시작인데 말입니다.

3. 고난의 학교에 입학하다(14a~30): 졸업이 아니라 입학
그렇습니다. 정말 이제부터 야곱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온 야곱,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고, 자기 집의 종들을 부리고,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자기에게 익숙한 모든 환경에서 살아갈 수 없는 야곱은 이제 고난의 학교에 입학을 한 셈입니다. 이제 다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야곱에게는 졸업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이것은 불과 시작이었고 입학이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세상 지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넘어 산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고난의 학교에 입학한 야곱은 여기서 무려 20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4. 속이는 자가 속다: 속이는 자들이 다 야곱의 거울이다.
야곱의 이름과 성격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였고 그 속임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는 경쟁 속에서 강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경쟁을 했던 사람입니다. 고난의 학교는 혹독합니다. 이 속이는 자가 속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소위 야곱이 임자를 만난 셈입니다.

A. 라반(23, 25): ‘장자가 우선이다’
한 달 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낸 후에 라반이 말합니다. “네가 조카라고 해서 그냥 먹고 일만 해서야 되겠느냐? 삯을 요구해라.’ 이렇게 말하는 라반의 의도까지를 처음부터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렇게 잘 시작된 이야기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고 발전을 하게 됩니다. 야곱의 연애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말합니다.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겠습니다.’ 야곱이 가진 것이 없었기에 라헬을 얻고자 한다면 그렇게 7년의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라반이 이 정도는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없습니다. 성경이 여기서 잠깐 레아와 라헬을 설명하는데,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왔다’고 합니다(17). 안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말입니다. ‘눈이 나빠서 잘 보지 못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예쁘지 않았다’는 완곡한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후자 쪽에 힘을 실어준다면, ‘동방 지방에서 아름다움으로 여긴 정열과 반짝임이 없이’ 힘이 없었다는 뜻인 듯 합니다. 라반은 그녀를 네게 주는 것이 남에게 주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는데 그녀가 정확하게 라헬을 가리킨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야곱은 정말 한 수 위의 사람을 만난 셈입니다.

7년이 수일 같이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나가는 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동일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7년을 수일같이 여길 수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참으로 힘든 고역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길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되는 만큼 우리는 능력있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능력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핍박과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믿음이 좋아서라고만 말하기 보다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정말 7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내 아내를 달라’고 합니다(21). 이스라엘의 관습 상 약혼이 된 것으로 여겨진 라헬을 야곱은 ‘내 아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을 청해서 잔치를 하고 밤이 되어 라반은 라헬이 아닌 레아를 야곱의 장막으로 집어넣습니다. 야곱은 속았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놀랄만한 장면입니다. ‘아침에 보니 레아라(25).’ 사실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옆에 누워있는 여인이 7년을 연애했던 라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밤새 모를 수가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끝까지 얼굴을 가리고 신방으로 들어가는 동방의 풍습을 말하기도 하고, 레아가 밤새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야곱에게 라반이 포도주를 많이 주어서 그가 거의 취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하여간 야곱은 속았습니다. 속은 결혼, 우리는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야곱은 당장 라반에게 찾아가 말합니다.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어떤 저자는 이 질문은 사실상 “어떻게 당신은 야곱처럼 했습니까?”였다고 썼습니다. 속이는 자는 나인데, 왜 당신이 나처럼 속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라반의 대답은 ‘형이 아우보다 먼저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머리를 칩니다. 야곱은 아우지만 형을 추월한 사람입니다. 야곱에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는 것, 이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라반의 속임수의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 것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라반은 계속 말합니다. “7일을 채우라. 라헬도 줄테니 라헬을 위해서 또 다른 7년을 봉사해라”(27). 라반은 이미 야곱을 간파하고 있는 한 수 위의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라반은 야곱이 사랑하는 자 없이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을 7년 동안 더 무상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 속이는 자가 완전히 속았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동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에게 원치 않는 아내를 안겨준 라반이라는 불행의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보아야만 했습니다.

B. 레아(25): ‘당신은 왜 아버지 이삭에게 에서라고 말했는가?’
야곱은 라반에게만 속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첫 아내가 된 레아에게도 속은 것입니다. 레아는 밤새 자신의 정체를 레아라고 밝힐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옆에 누운 레아를 보고 깜짝 놀란 야곱은 레아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젯 밤에 내가 라헬이라고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질문은 다시 메아리처럼 야곱의 마음 깊은 곳으로 돌아와야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 앞에 섰을 때 ‘네가 누구냐’라고 묻는 아버지에게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서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이삭이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고 다시 물을 때에도 그는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레아가 그러지는 않았지만, 야곱이 레아에게 ‘왜’라고 물을 때 마치 레아가 그렇게 되묻는 것 같이 느꼈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왜 당신의 아버지 이삭에게 에서라고 말했습니까?”

레아를 통해서 야곱은 자신을 보아야 했습니다. 비록 보기 싫은 모습이지만, 거기에 자기가 있는 것을 보도록 하나님은 야곱을 고난의 학교에 걸려있는 ‘속은 결혼’이라는 불행의 거울을 통해서 보게 하신 것입니다.

C. 라헬
그러면 라헬은 혐의가 없습니까? 여기서 성경 독자들이 궁금해지는 부분이 바로 라헬입니다. 라헬은 그 밤에 무엇을 했습니까? 왜 야곱에게 귀띔이라고 해주지 않았을까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라반의 말을 라헬은 거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여간,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라헬도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수동적인 입장이기는 했을지라도 라헬 역시 이 사기 결혼의 음모에 동조자인 것입니다. 야곱의 결혼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5. 고통
저는 이야기 속으로 우리가 좀 더 깊숙히 들어가 보았으면 합니다.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일주일동안 계속되는 결혼 축제 속에서 과연 야곱이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레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라헬은요? 모두의 마음 속에는 쓰디쓴 고통과 분노가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들은 쉽게 가라앉기는 커녕 날이 더해 갈수록 더 커지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이후의 야곱의 결혼생활과 가정을 통해서 그 불행의 씨가 자라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야곱의 결혼의 첫 일주일입니다.

A. 야곱: 일주일동안 밤마다 느껴지는 분노와 고통
야곱은 아직도 6일을 더 결혼 예식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부터 이미 야곱의 마음은 상하기 시작했고 밤마다 그는 속은 결혼에 대하여 분노와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일주일만 견뎌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레아를 대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속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기 때문에, 어차피 자기의 부인이 된 레아를 향한 배려를 할만큼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시계를 보면서, 달력에 표시를 해가면서 첫 일주일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 레아와 함께 보냈습니다. 야곱은 한 마디로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는 일주일 내내 그 불행의 거울을 대면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B. 레아: 매일 느끼는 거절감
비록 레아 역시 사기 결혼 음모의 적극적인 동조자였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녀도 이런 상황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매일 느껴야만 했던 그 모멸과 거절감이 어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이제 일주일만 견디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는다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한 남편과의 첫 일주일이 어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결혼의 축제 일주일이 지난 후, 이제는 자기의 자리를 차지한 동생 라헬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지내는 시간은 어땠을까요? 사실 이후에 보면 우리가 알게 되지만 이런 고통과 불행은 결국 레아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동기가 되게 됩니다.

6. 맺음
이제 이 불행한 사기 결혼의 이야기를 맺겠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숨은 의도가 드러납니다. 다만 등장인물들인 야곱도, 라반도, 레아도, 그리고 라헬도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가 숨어있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라반은 자기의 음모가 하나씩 하나씩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하고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A. 불행?속은 결혼?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
결혼처럼 친밀한 관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만큼 결혼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다루시는 중요한 도구도 없습니다. 비록 결혼이란 틀 속에서 불행이란 것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이 세상 속에서의 삶에서 불행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불행이라고 이름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경쟁하고 하는 가운데, 이기고 지고 넘어지고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야곱 자신에게는 레아가 원했던 아내가 아니었고 그 결혼은 속은 결혼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은 레아를 통해서 우리 구주의 조상이 나게 하시는 놀라운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것도 우리가 후에는 주목하게 됩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불행이라는 것을 내용도 정도도 다 틀릴지라도 겪지 않고 살아갈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저 사람은 불행이 없을거야’라고 우리가 누구를 보면서 쉽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실 그렇게 판단할 문제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 행복하지 않은 상태, 더 나아가서 너무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지점에 인생이 처해있을 때 이 불행도 전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고 그분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야곱의 이야기는 사실 그런 하나님의 헤세드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B. 불행의 거울은 자기 모습을 보게 한다.
불행의 거울은 끊임없이 자기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에게 자기를 보게 만들어줍니다. 속이는 자 야곱을 속인 삼촌 라반은 바로 야곱이 자기를 발견해야만 하는 불행의 거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함께 했지만 사랑을 충분히 줄 수 없었던 아내 레아를 통해서도 야곱은 평생 자기의 모습을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에서로, 혹은 매력적인 남성으로, 훌륭한 일군으로 살아가는 야곱은 자기가 진짜 누구인지를 발견해야 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불행이라는 이름의 거울을 제공해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불행이라는 환경 뿐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에서 지나온 모든 불행의 터널 속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불행의 거울은 자기 모습을 보게 합니다.

C. 우리가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실 수 없다.
왜 이런 거울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또 그렇게 살기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이 되기까지는 그 예비하신 복을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계속 거울을 갖다 대주십니다. ‘거울을 봐!’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치장된 모습만을 반영해주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반사시켜 주는 거울만을 원합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게 하시려고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을 쫓아오시면서 그 불행의 거울을 갖다 대십니다. ‘너 자신을 좀 봐라!’하시면서 말입니다. 자신을 보아야만,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해오셨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에는 바로 이런 문제가 개입되어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모습이, 저 사람에게는 저 모습이,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또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삶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다 그렇습니다. 야곱 안에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추적하시고 그를 이끄셔서 그에게 계속해서 거울을 가져다 대 주시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여러분, 그것을 조금씩 아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제 아내와 저의 삶의 초기를 인도네시아에서 보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먼 땅으로 갔지만, 우리의 내면은 정말 불행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만족스럽지 않았고 행복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짧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희 자신들을 많이 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제가 사랑하기 보다는 미워했던 현지 사람들을 통해서 저의 모습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불행의 거울이야말로 저희 인생에서 가장 복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D.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신 것을 신뢰하라.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계속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지금도 약속을 지키고 계시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질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금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 사기 결혼에 속고 만 야곱의 인생의 불행은 하나님이 함께 있어 주신 결과란 말입니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신 결과가 고작 이것입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자기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금 여러분의 처해계시는 상황이 ‘하나님, 고작 이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결과입니까?’라고 묻고 싶으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이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여기 있습니다.
애 3:31~33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니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야곱은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대답을 깨닫게 될 날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잘 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견디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함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