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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4). <하나님의 헤세드> 찾아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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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4). <하나님의 헤세드> 찾아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28:10-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1-25

말씀내용
사람은 다 어떤 상황을 만나기까지는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될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야곱처럼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삶이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야곱의 삶은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는 것이 얼마나 긴 과정이 될 수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고집세고 끈질기게 자기를 주장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야곱은 이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의지할데 없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동안 부자 할아버지와 부자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고 살아왔습니다. 온갖 교활한 속임수로 형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아버지가 주는 복을 가로챘습니다. 이제 그는 형에게 쫓기는 신세이고 만나보지 못한 외삼촌의 집을 향해 가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삭의 집이 있던 브엘세바에서 외삼촌이 사는 하란까지는 약 500마일이 되는 걸어서 여행을 하기에는 짧지 않은 거리입니다. 아마 여정의 이틀째 쯤 되어서 그는 집에서 약 50마일 정도 되는 루스(야곱이 벧엘이라고 새 이름을 지은)에 도착하였을 것입니다.

1. 광야: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10~11)
신앙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줍니다. 사실 야곱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야곱은 단순히 형에게서 도망하기 위하여 혹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외삼촌의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긴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500마일의 여행이 아니라 20년의 여행이 되고 맙니다. 마치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출애굽의 여정이 40년이 걸렸던 것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 여정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곳으로 가는데만도 인생 전체가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비록 야곱 자신은 지금 그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는 분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사실, 이 광야 여정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도 이것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적인 많은 일과 사건들 뒤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의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감각하건 못하건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야곱의 삶에서 이제 그것을 살펴볼 것입니다.

A. 경쟁할 대상이 없는 야곱: 수동적인 아버지, 조작하는 어머니, 경쟁하는 형이 없다.
야곱은 문득 경쟁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제일 먼저 경쟁해야 할 형이 더 이상 없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형과 떨어진 적이 없었을 것이고, 언제나 그는 형과 경쟁하면서 살았습니다. 경쟁은 마치 그의 삶의 동기처럼 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경쟁할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조종하고 명령하고 지시하는 어머니도 없습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기가 다 결정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멀었던 그래서 다가가기가 어려웠던 아버지 이삭도 없습니다. 속여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더구나 그의 미래는 이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의 손을 떠났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꾀를 의지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무거운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광야입니다.

B. 혼자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보는 필수조건이다.
혼자 있어서 외롭고 두려운 것은 야곱에게는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보는 필수조건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보기까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를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자기를 모릅니다. 자기의 모습을 보기를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주함 속에 자기를 묻어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잠시도 혼자 있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낼 줄 모르는 사람 안에 신앙이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외로운 시간이 존재합니까?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으십니까? 오늘날에는 야곱처럼 혼자 있기가 어렵습니다. 야곱과는 달리 우리는 가는 곳마다 전화를 가지고 다닙니다. 가는 곳마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회신을 합니다. 이런 현대적 경향은 신앙의 악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였습니다.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었고, 그가 혹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셨을 것입니다.

C. 야곱이 자기방어의 경계를 내려놓은 상태에서 복음이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야곱은 여기서 꿈을 꾸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처음으로 야곱에게 찾아오셨고 야곱에게 말을 걸어오신 것일까요?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늘 야곱과 함께 하셨고 야곱에게 말을 걸어오셨지만, 그동안 40년 이상의 삶을 사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 꽉 차 있었던 생각, 어떻게든 둘째로서 살아남아야 하고 축복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경쟁, 속임수….이런 것들로 인하여 그는 도무지 하나님이 부르는 음성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많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없을만큼 자기의 삶 속에 묻혀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열심히는 살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용한 곳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경쟁해야 할 필요가 없고 걷고 자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광야로 우리를 불러내십니다. 때로는 병상으로, 때로는 실업으로, 때로는 원치 않는 곳으로 보내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방어의 경계를 내려놓은 상태에서 복음은 그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2. 환상: 하늘과 땅이 만나는 길(12)
야곱이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꿉니다. 종종 성경이 쓰여지기 전 시대에 꿈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꿈에서 야곱은 사닥다리를 봅니다. 그 사닥다리는 땅 위에서 부터 하늘에까지 닿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에는 많은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성경 역사에 그 누구도 야곱처럼 생생하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환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꿈의 의미가 무엇이고,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찾아오시는 첫 만남에서 이 꿈을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A.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요 1:51): 이 꿈의 구속사적인 의미
이 꿈의 의미를 해석하는 결정적인 열쇠는 예수님께서 친히 이 본문을 설명해주신 부분입니다.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천사들이 사다리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한 것을 주님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주님 자신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주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 바로 이 사닥다리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분리된 하나님과 죄인의 사이에 유일한 다리가 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야곱이 본 사닥다리는 복음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들은 주님의 구속사역을 수종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썼듯이, 천사들은 모두가 섬기는 영들로서 구원얻을 신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아 일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히 1:14). 이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천사들과 함께 아버지의 영광 중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꿈은 사실상 우리 주님의 성육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재림에 대한 환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꿈의 구속사적인 의미입니다.

B. 야곱의 유일한 소망: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꿈을 보여주신 개인적인 이유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의미심장한 꿈을 야곱에게 보여주신 것일까요? 야곱의 삶에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외삼촌의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야곱은 형이 뒤쫓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도망하면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산넘어 산’이란 말이 있듯이, 이 문제는 결코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야곱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는 알아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는 지금까지 너 자신을 믿고 살았지만, 거기에는 결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너는 지금 하늘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고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소망, 네가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 즉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지금 혼자가 아니라 천사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됩니다. 그는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해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보도록 초청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3. 약속: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방식(13~15)
그 꿈은 그냥 환상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꿈 속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가장 분명한 방식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약속들이었습니다. 이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에게 있어서 놀라운 위로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보다 힘이 있어서 우리를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힘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야곱의 생애에 있었던 예닐곱번의 계시 중 첫번째 계시였습니다(창 31:3, 11~13; 32:1~2, 24~30; 35:1, 9~13; 46:1~4).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게 하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모호하지 않은 그리고 구체적인 세 가지 약속이었습니다.

A. 하나님의 임재(13,15): 도망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막 2:17)
“나는 여호와니…내가 너와 함께 있어…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부족함이 없던 삶에서 외로운 도적질한 도망자가 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닥다리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꿈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너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버지와 형을 속여 축복을 가로챈 사깃군이요, 도망자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야곱에게 주신 첫번째 약속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자신 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어떤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이 도망자(죄인)가 된 것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감각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절대자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B. 땅과 자손(13~14): 인간 최악의 조건이 하나님의 최적의 조건이다.
하나님은 더 말씀하십니다. 지금 야곱이 누워있는 땅을 야곱과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의 자손은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것이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들었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할아버지에게 나타나셔서 이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할아버지를 통해서만 들었던 그 약속을 이제 하나님은 자기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약속해주십니다. 적어도 야곱은 이 여정에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자손 그리고 그 자손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야곱은 지금 인생에서 처음으로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타국에서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아버지 이삭을 위해 어머니 리브가를 얻으러 가서 라반에게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부인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창 24:35~36). 야곱은 부유한 조부와 부친을 만나서 부유한 환경에서 부족함이 없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얻으러 갈 때 가지고 갔던 예물들과 비교할 때(창 24:53), 지금 아내를 얻으러 가는 그는 혼자이고 가지고 갈 예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물 대신 그는 노동을 통해서 아내의 집에 빚을 갚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그런 야곱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못하실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말이 진짜 그렇다고 느낍니다. “인간 최악의 조건이 하나님의 최적의 조건”인 것입니다.

C. 귀환(15)
야곱에게 세번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이 여정에서, 그는 확실한 것 하나를 붙잡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약속하신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실 때까지는 절대로 야곱을 떠나시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4. 각성: 하나님과의 첫번째 만남(16~19)
이런 놀라운 꿈과 환상은 야곱이 잠에서 깨면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꿈에 본 사닥다리의 환상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이삭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 그는 뵈었습니다. 잠에서 깬 각성이 아니라, 영적인 일에 대한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A. 하나님의 전, 하늘의 문(17)
그는 자기가 누워 잔 곳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을 50마일이나 떠나왔을 때, 하나님이 거기 계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기치 않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전혀 기대치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야곱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라고 말입니다. 그곳이 여러분이 범죄하는 현장이든지,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서 멀리 도망했던 곳이든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한가운데이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밖에 계실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내 일터에 계실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나의 가정과 침실에 계실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여행 중의 차 안에, 비행기 안에 계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탄성을 지릅니다. 자기가 누웠던 곳이 바로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고, 자기가 보았던 그 놀라운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잇대어 세워져있던 그 자리가 바로 하늘로 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성전 자체셨고(요 2:21),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 문이 되셨습니다(요 10:7~9).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B. 자원하는 예배(18)
이제 야곱은 일어나 베개했던 돌을 취하여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비록 그가 잡아 드릴 수 있는 희생제물은 없었지만, 마치 자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이제는 스스로 자원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제 자신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오래 전,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 땅으로 올 때, 벧엘 바로 이 곳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단을 쌓아 예배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12:8). 야곱은 본래 지명이 루스였던 이곳을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벧엘이라고 이름합니다.

5. 서원: 고상한 결심(20~22)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야곱은 그 생애에 처음으로 고상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서원을 드리는 것입니다. 서원은 본질적으로 헌신과 관계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속이고 취하던 야곱이 지금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서원은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라’고 권장하기에 위험한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우리는 서약을 지킬 능력이 없고, 종종 그 서원이 어리석은 내용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 서원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저해가 되기도 하는 연유입니다. 이 야곱의 서원의 내용은 많은 성경 학자들로 하여금 많은 해석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충분히 믿지 않았다는 것을 반영해주는 조건절로 이루어진 서원에 대하여 야곱의 불신앙을 비판하기도 하고, 혹자는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서원을 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성경학자들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작 야곱의 이 서원을 비판하거나 꾸짖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의 서원을 받으셨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성경이 증거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이것입니다. 비록 야곱의 서원이 부족한 것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이 도망자를 찾아오사 축복하셨듯이, 그의 서원을 받으시고 그를 용납하시고 그를 참으시면서 그를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야곱의 서원이 훌륭했고 그가 서원을 지켰기 때문에 그 조건 하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강조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서원 가운데 있는 야곱의 야곱적인 성격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A. 자기중심
야곱의 서원은 거의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야곱의 생각은 온통 자기의 필요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형 에서의 손길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가, 무사히 이 긴 여행길을 갈 수 있는가, 나의 미래에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잘 풀릴 것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그의 서원은 주어인 ‘나’로 가득 차 있습니다.

B. 의심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이라는 조건절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서원이 하나님을 다시 한 번 그 말씀?약속?에 묶어두려고 다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정말 그렇게 하실거죠?”라고 묻는 것입니다.

C. 흥정
또 야곱은 이 서원에서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줍니다. 고대 세계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 언제나 ‘만일’이라는 조건절을 붙이는 쪽은 강자였습니다. ‘네가 말을 잘 들으면 이렇게 해주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일’을 붙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입니다. “일이 잘 되면 크레딧을 드릴텐데, 만일 일이 잘 안되면 책임을 묻겠다”는 식인 셈이다.

D. 십분지일
야곱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기가 정말 평안히 가도록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주시고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 ‘나의 하나님의 되실 것이고’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며, 자기 소유의 십분지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는 말은 좀 어색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견지에서 이미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야곱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아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왜곡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 편이 되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또 야곱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전’이 의미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야곱은 여기서 이 돌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도록 자기에게 영감을 주는 은혜의 장소로 삼겠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창 35:7).

서원의 마지막은 야곱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지 일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십일조 헌금에 대한 명령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의 태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반영해주는지 모릅니다. 그는 십분지 일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서 십분지 일입니까? 내가 내 힘으로 벌어드린 수입이 아닙니다. 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즉, 이제 야곱의 생애에 얻게 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약속을 따라서 주시는 것인데, 거기서 십분지 일을 그는 드리겠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시간과 재능과 돈과 모든 것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의 문제를 가지고 율법인가, 아닌가를 묻습니다. 두 종류의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궁금하여 질문하는 분이 계시지만, 또한 십일조를 하기 싫어서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따지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참 성도일 수 있을까요? 최소한의 의무만을 다하겠다는 태도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역겨운 것이겠습니까? 야곱이 드리겠다고 한 것은 ‘고작’ 십분지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헌금에 대해서, 그리고 십일조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소득의 10%를 드리고 다 했다고 만족할 수 있다는 그 태도는 합당한 것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야곱이 이런 부족한 점들을 그의 서원에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들 아무도 그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부족해 보이는 야곱의 서원을 용납하고 받으셨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야곱을 완전한 자로, 준비되었기 때문에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을 아시고, 아심에도 불구하고, 아셨기 때문에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이 올바르지 않을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받아주시고, 기다리시고 참아주시며 결국은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6. 영적 여정
우리의 영적 여정을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야곱의 삶과 유사한지 모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A.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다.
영적 여정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해 가는 과정입니다. 종종 우리가 가지는 착각은 내가 하나님을 찾아왔다고 여기고, 내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아니 야곱의 이 여정 속에서 그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을 보십시오. 어떻게 야곱이 찾아왔다고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살자고 시작한 여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여정 속에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렇습니다. 꼭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가는 길이 아닌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한없는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B.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시 139).
여러분, 결국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벗어나 도망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깨닫고 139편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분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대면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두렵더라도 그분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리십시오.

C. 꿈과 약속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시겠다는 의지이며 결심이고 각오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꿈으로 보여주시고 말씀으로 약속해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사람과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은 그 약속과 언약을 통해서 ‘내가 은혜를 베풀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결심이고 각오인 것입니다. 그래야 할 이유나 의무가 조금도 없으신데도,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하는 의지를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천명하시며 그렇게 결심하고 각오를 밝히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자기 삶을 살고, 자기 길을 가는 야곱을 이렇게 찾아오셨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아니 찾아오셨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