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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3).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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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3).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

창세기 26:33~28: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1-18

말씀내용
1. 화목한 가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깨어진 가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가?
가정은 인류가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고안하셔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가정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인상은 과히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인생에서 사랑에 빠져서 빨리 결혼하기를 원하는 젊은 남녀들에게 그리고 그때에나 가정은 꿈에 그리는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어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 가정과 부모를 통해서 상처를 받고 비뚤어진 가치관과 인생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뚤어진 채 가정을 이루어 비뚤어진 가정을 만들게 됩니다. 생물학적 성인이 되어도 참된 어른으로서의 남자와 여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에 대해서 가지는 관점과 태도와 느낌이 세상의 사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되고, 또 우리 자신이 가정에 대해서 당혹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야곱이라는 인물이 자라던 가정, 사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을 주의깊게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교훈이 그 안에 가득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
한 마디로 말하면, 이삭이 가장으로 있던 가정은 깨어진 가정의 전형입니다. 물론 겉으로 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심각하게 속으로 깨어진 가정이었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자라납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아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그 가정이 깨어질 수가 있는가? 그의 가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정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라고 말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깨어진 가정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사실은 그 가정은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깨어진 가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좀더 복잡한 문제일 것입니다. 비록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깨어져 있는 상태로 지내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고, 아픔이 없고, 깨어짐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여러분의 가정이 겉보기와 마찬가지로 좋을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깨어진 가정이 가진 많은 문제들의 전형을 이삭의 가정, 다시 말하면 야곱이 성장했던 그의 가정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A. 근심거리: 부모에게 근심이 되어버린 맏아들(26:33~34)
첫째는 근심거리가 그 가정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고부관계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가정의 고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에서는 40세가 되어서 결혼을 했는데 두 아내를 얻었습니다. 두 아내가 다 헷 족속이었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헷 족속은 인류 역사에 철기문화를 형성했던 히타이트(Hittite) 민족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들려준 아버지 이삭의 결혼 이야기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통해서도 들어보았음직 하지만, 에서에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결혼은 언제나 부모와 장성한 자녀가 부딪히는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서로의 기준이 다를 뿐 아니라 그 결과가 이후 가정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부모의 기준도 자식인 에서의 기준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입니다.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요즘에는 보다 근본적인 기준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성과 결혼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이 시대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노아 시대의 타락은 결혼에 있어서 셋의 후예들이 경건의 기준을 타협하고 자기들의 원하는 기준을 따라 배우자를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가 그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없다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언젠가 이 문제만을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고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가정을 고안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것보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최초의 결혼식인 아담과 하와의 결혼식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주례사는 이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놀랍지 않습니까? 최초의 신랑과 신부는 사실상 부모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결혼의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여자도 물론입니다. 자녀들을 결혼시키신 부모님들은 마음으로부터 자녀를 떼어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서 생기는 근심 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에서의 결혼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 정도로는 우리가 이삭의 가정을 깨어진 가정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B. 지도력의 부재: 아버지 이삭의 지도력, 판단력 부재(27:1~4)
이삭은 지도력이 없는 가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늙어서는 그랬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졌고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종종 이런 표현은 단순히 육신의 눈 이상을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1차적으로는 눈이 어두워서 앞에 있는 사람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이삭의 행동은 그의 육안 뿐 아니라 영안도 어두워졌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우리들도 눈이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 대한 성경의 증거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신 34: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두가 다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육안이 어두워져도 영안은 더 활짝 열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지도력도, 판단력도 약해졌습니다. 가장의 지도력과 판단력이 부재할 때 가정이 당하는 고통이 실로 적지 않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왔다고 느낀 이삭은 자기가 사랑하는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알지 못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사랑하는 아들 에서와의 사이에서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고 싶어합니다. 이제 자기가 에서를 사랑하는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에서에게 요구합니다. 사냥한 고기로 요리를 해주면 먹고나서 축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이전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사건을 기억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냥을 나갑니다.

지도력이란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행동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이고 영향력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이것은 리브가도 그리고 리브가에게서 그 말을 이미 들었던 야곱도 당연히 아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비열하게 은밀한 약속을 에서에게 합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떠날 때, 이것이 지도력을 잃게 되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서야 가장의 권위도 세워집니다. 이삭처럼 자기 주장과 자기 뜻대로 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는 이삭의 가정의 모든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에는 지도력이 없었습니다.

C. 음모: 어머니 리브가의 감시와 음모 1(27:5~17)
지도력이 없는 가장의 옆에는 대개 강한 배우자가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자기의 힘과 음모로 살아남는 배우자가 바로 리브가입니다. 족장의 아내로서 표면적으로 남자를 무시할 수는 없으면서도 결국은 자기의 원하는 것을 하는 부인이 리브가입니다. 리브가는 남편이 에서와 하는 은밀한 대화를 열쇠구멍으로 엿듣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듣게 된 일이라기 보다는 이런 가정에서 보통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가정은 편치 않습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누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무엇을 어떻게 할지 불안한 것입니다. 항상 귀를 열어놓고 살아야지요. 결국 리브가는 남편과 큰 아들의 중요한 음모를 알게 되고, 음모를 꾸밉니다.

이 강한 엄마는 유약한 아들 야곱을 불러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시를 합니다. “바깥에 염소 떼에 가서 좋은 새 끼를 하나 잡아와라. 그리고 내가 별미를 부친을 위해 만들테니 너는 그것을 가지고 들어가서 축복을 받으면 된다.” 야곱은 걱정이 앞섭니다. 만일 아버지가 자기를 속인 것을 알게 되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염려합니다. 모든 저주는 자기가 받을테니 염려말고 시키는대로 하라고 리브가는 말합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염소 새 끼로 요리를 하고 큰 아들의 옷을 입히고 염소 새 끼 가죽으로 손과 목에 붙여 야곱을 에서로 변장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은 감시와 음모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 가정이야말로 정말 깨어진 가정이다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D. 거짓말: 아버지를 속이는 아들(27:18~29)
깨어진 가정에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의 중심에 아버지를 속이는 아들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시키는대로 합니다.
i. ‘유약하고’(27:11,12)
여기에서 보게 되는 둘째 아들 야곱은 유약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은 야곱의 나이가 한 15살이나 많아야 스무살 쯤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형 에서와 마찬가지로 40이 넘은 때였다는 사실을 볼 때 그가 어머니의 음모를 따라 시키는대로 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유약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ii. 정체성을 잃은 아들(27:19,24)
이삭은 묻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한 번이 아닙니다. 이삭이 다시 묻는 것은 정말 의심을 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일찍 돌아온 에서에 대한 감탄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야곱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부담스러운 법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던 야곱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대어 거짓말을 하는 것은 큰 부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는 감각이 아직 없었습니다. 오직 두려운 존재는 눈 앞에 있는 아버지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만져보고나서 다시 묻습니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야곱이 다시 대답합니다. “그러하니이다.”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축복을 얻기 위해서 남이 되어야 했고 그는 아버지를 속여야 했습니다. 이삭의 이 질문, “네가 누구냐?”는 것은 결국 야곱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심각한 문제, 곧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야곱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발견하기 까지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신앙은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기까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을 알기까지 자기를 모릅니다.

E. 불신: 아버지 이삭의 감각적 태도(27:18~29)
놀라운 것은 이삭이 눈 앞에 있는 야곱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음성이야곱의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신이야말로 깨어진 가정의 특징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단지 말로만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삭은 아직 눈 앞에 있는 아들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이삭은 가까이 오라고 하고 만져보고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이삭은 만져보고 다시 묻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야곱이었다면 이 극적인 순간에 심장이 떨려 음식 접시를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리고는 준비한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고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품으로 다가가 아버지에게 입을 맞춥니다. 야곱은 머리를 아버지의 목에 파묻고 입맞추고 안긴 기억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아들의 옷의 향취를 맡습니다. 그리고나서야 이삭은 아들을 축복합니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 축복을 주는 자리에서 나타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철저하게 불신이 깔려있는 만남입니다. 속이는 아들 그리고 속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만남이 이 깨어진 가정의 한 가지 특징이었습니다.

F. 증오: 원수가 된 형제 관계(27:30~41)
이런 가정에서는 형제 관계가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결국 뒤늦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돌아온 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는 크게 방성 대곡을 합니다. 그는 복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사정을 하며 다시 소리를 높여 웁니다. 에서는 다시 한 번 간교한 동생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에게 아버지 이삭이 줄 수 있는 축복은 결코 축복일 수 없는 예언이었습니다.
창 27:39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이 일에 대한 에서의 반응은 야곱에 대한 증오였습니다(41). 그 증오는 동생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였고 단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 일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속고 속이는 가정, 부모의 편애는 결국 쌍동이 형제의 살인극으로 결말을 맺게 될 위기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야곱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가정에 남은 소망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G. 계속되는 음모: 어머니의 음모 2(27:42~46)
집안의 모든 일들을 세밀하게 감시하는 리브가에게 이 상황이 파악이 되자 다시 한 번 리브가의 음모가 발동을 합니다. 그녀는 야곱을 에서의 증오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자기의 고향 하란으로 보내어 오빠 라반에게 도피하게 하기 위해서 이삭에게 또 거짓말을 합니다. 이번에는 야곱의 결혼을 이유로 라반에게 보내는 것에 대한 승낙을 받아냅니다. 결국 정직해질 수 없는 삶의 연속입니다.

H. 영적 무감각: 육신과 행위에 속한 사람, 에서(28:6~9)
결국 아버지가 야곱을 축복하여 신부를 찾는 여행길을 떠나보내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자기가 결혼한 가나안 출신의 여인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에서는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딸을 아내로 취합니다. 에서를 보고 있으면 얼마나 사람이 이렇게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이 말씀하기를 이런 사람이 너희 중에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육신과 행위에 속한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무감각합니다. 그는 비록 빼앗긴 축복을 인하여 방성 대곡하였고 축복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크게 울며 부르짖었지만, 자신의 육신적 성향과 자기가 믿음이 아닌 행위에 속한 사람인 것을 인하여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배우지 못합니다. 에서의 관찰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그의 해결방법은 매우 즉흥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삭의 가정은 이렇게 깨어진 가정이었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을 다 안고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이런 가정은 결국 댓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3. 깨어진 가정이 치루는 댓가
깨어진 가정이 치루게 되는 댓가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A. 부모의 편애가 가져온 결과: 사랑할 수 없는 형제 관계
부모의 편애는 사랑할 수 없는 형제 관계를 낳았습니다. 우리도 인간으로서 자녀들을 편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편애야말로 자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게 됩니다. 편애 성향은 죄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것은 회개해야 할 문제이고 또 고침을 받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가정에서 사랑하고 우애하는 형제 관계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어진 가정이 세대를 이어서 치루게 되는 한계입니다.

B. 가치관과 인생관의 왜곡: 속임으로써 이익을 쟁취한다.
이런 깨어진 가정에서 가치관과 인생관이 왜곡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속임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갑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형을 속임으로써 자기 이익을 쟁취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자녀들의 인생관이되고, 가치관이 되고 맙니다.

C.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내가 하루에 너희 둘을 잃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45). 그러나 결국 리브가는 두 아들을 하루 만에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리브가는 ‘몇 날 동안’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몇날은 결국 20년의 세월이 되고 말았고 야곱이 돌아왔을 때 그 야곱을 그토록 사랑했던 리브가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누리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다시는 그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그리고 이 일의 모든 배후에 있던 리브가는 결국 그녀의 마음 속에서 아들 에서 마저도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D. 속아넘어가는 아버지의 비참함: 반복되는 역사?야곱이 아들들에게 속다.
이삭은 아들 야곱에게 철저하게 속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깨어진 가정이 쉽게 치유되고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속였던 아들은 후에 큰 가족을 이루게 되었을 때 자기의 아들들로부터 똑같이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4. 소망: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27:33; 28:1~5; 히 11:20)
오늘 본문 자체로는 우리는 아무 소망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이 비록 아들을 편애했고 판단력, 지도력을 상실한 가장이었으며 아내와의 신뢰가 없었고, 둘째 아들에게는 철저하게 속임을 당하는 아버지이지만, 그는 결국에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고 나간 후, 에서가 왔을 때 이삭은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27:33). 그가 떨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앎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뜻을 성취해보려고 은밀하게 일을 꾸몄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온 전율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자신은 아내와 둘째 아들을 속여 은밀한 일을 계획했고, 둘째 아들은 자기를 속였지만,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었습니다.

결국 이삭은 야곱을 외조부 라반에게 보내면서 믿음으로 야곱을 축복합니다(28:1~6). 이것은 무서우리만치 철저하게 성취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삭의 항복이었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곱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야곱과 야곱의 자손에게 주시도록 구합니다. 놀랍게도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영웅들을 기록할 때 이삭의 바로 이 점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것이 이삭의 믿음의 행위에 대한 유일한 칭찬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놀랍기만 합니다. 이제 이삭은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자기의 선호하는 아들에 대한 것과 기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먼길을 떠나는 야곱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순간에 주시는 은혜입니다. 비록 수없이 많은 좌절과 아픔을 겪고 난 후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 날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우리 역시 이삭과 같이 믿음으로 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5. 교훈:
오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A. 안 깨어지는 것이 은혜의 기적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
먼저, 우리의 가정들이 화목하고 문제가 없으며 이런 정도의 깨어짐이 없는 가정이라면 그것은 은혜의 기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가정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인 은혜일 뿐입니다. 아니 은혜라고만 할 수 없는 은혜의 기적입니다. 오늘날 가정들이 이런 많은 깨어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범죄한 인간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안 깨어지는 것이 은혜의 기적일 뿐입니다.

B. “인간의 계획이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릴 수 없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계획하고 꿈을 꾸고 변경을 꾀하려 해도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꾀로 하나님의 정하신 주권적 뜻을 거스리거나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깨어진 가정에서 일어난 음모와 음모의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6. 기도: “뜻이 이루어지이다!”
결국 이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하게 되는 것은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가 아닐까요. 이삭도 에서도, 리브가도 야곱도 다 하나님의 축복을 놓고서 자기의 뜻과 자기의 방법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입니다.

A. 내 뜻과 내 계획과 내 음모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헤세드의 증거이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여러분의 뜻과 여러분의 계획이 다 이루어지셨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은여러분이 뜻하고 원하고 계획하는대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도무지 인생에서 여러분이 원했던 것, 여러분의 계획과 뜻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니, 여러분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러분의 계획이 성취되지 못했으며, 여러분의 좋지 않은 음모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헤세드의 증거입니다. 오늘 이삭과 에서의 밀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가 여전하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가 그쳤다면 이삭과 에서의 꿈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헤세드의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사의 조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계획, 기대, 뜻이 얼마나 이루어졌습니까? 그것이 감사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인생을 지금까지 사는 동안 이루고자 했던 것들이 인생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좌절된 꿈이 바로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제목인 것들입니다. 그랬기에 오늘날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이번 감사절에는 여러분, 이것들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B. (깨어진 가정에도 or 깨어진 가정에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따라온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한 없는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왜 우리 가정은 남들처럼 행복하지 않은가?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데도 저런 불신앙의 가정들보다도 더 문제가 많은 것 같아 보이는가?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이런 고민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문제 많던 가정이 화목해지고, 가정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같이 연약한 인생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깨어진 가정의 문제들을 경험하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깨어진 가정에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깨어진 가정에도’ 하나님의 헤세드가 따라온다가 아닙니다. ‘깨어진 가정에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따라온다입니다. 만일 ‘깨어진 가정에도’라고 한다면 ‘깨어지지 않은 가정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헤세드가 나타난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깨어지지 않는 우리의 강하고 질긴 자아를 꺾으시기 위해서 쫓아오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는 이삭의 가정 같이 깨어진 가정에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이삭의 깨어진 가정을 추적하여 쫓아왔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깨어짐을 통해서 때로는 이삭 같고, 때로은 리브가 같으며, 혹은 야곱 같은 우리들을 고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감사주일에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은 금년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깨어짐 속에서 그분의 헤세드로 여전히 우리를 추적하고 계심을 아시고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뜻과 여러분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나를 향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