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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2). <하나님의 헤세드> 운명을 결정한 가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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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2). <하나님의 헤세드> 운명을 결정한 가치관

창세기 25:27-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1-11

말씀내용
1. 선택은 가치의 반영이다.
어느 광고에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라는 문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한 번 선택을 잘못해서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할 수도 있을까요? 사실 선택이란 문제는 그 자체보다 그 배후에 가치 판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관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이 선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택은 가치의 반영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치관이 운명을 결정하게 된 사건을 보여줍니다.

2. 두 아들의 성장: 두 개의 가치관, 두 개의 길
A. 성장(15세까지): 조부 아브라함의 영향
쌍동이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은 어린 시절 함께 자라나면서 적어도 15세가 될 때까지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의무와 같은 것이었고 또는 매우 신성하게 여겨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갈대아에 살던 자신에게 어떻게 나타나셨고, 그가 어떻게 순종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며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그들의 아버지 이삭을 얻게 되었는지, 그 이전에 할아버지가 믿음이 없어서 이스마엘 아저씨를 낳게 되었는지 등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누리게 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고 그들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비록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아브라함의 나이를 기록함으로써(25:7) 이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건너뛰어서 성경 기자는 장자권 매입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자기의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파는 맹세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서는 왜 팔았고, 야곱은 왜 그것을 샀는가 하는 것이 살펴야 할 문제입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는 동안 에서와 야곱의 마음 속에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가 자라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집에서 자라난 쌍동이 형제는 각기 다른 두 개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또 각기 다른 두 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B. 에서의 삶을 움직인 가치(원리)들
먼저 형 에서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던 것을 살펴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적으로 배워서 형성되는 것이 가치관입니다. 가치관은 삶을 움직이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에서의 삶을 움직인 가치, 즉 원리들이 무엇일까요?

i. 육욕, 순간의 만족 > 하나님, 거룩한 열망
에서는 하나님과 거룩한 열망에 의해서 움직였던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신적 욕구와 순간의 만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한 번의 사건을 가지고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사건 하나를 통해서 에서의 삶의 원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여기에 의미있게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거룩한 열망 보다는 육욕과 순간의 만족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편했고 그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욕심이 너무 작은 것이 문제이고, 너무 쉽게 만족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ii. 현재의 즉각적인 만족 > 결과
에서에게 중요한 것은 늘 현재입니다. 그 현재의 즐거움과 만족을 즐긴 이후에 찾아오게 되는 결과에 대해서 그는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후에 찾아오는 비참함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현재가 중요하고 현재만 좋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독: 우리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을 하나님 대신 물질이나 경험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
에서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대적 증상이 바로 중독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리적 현상 가운데 하나는 중독 현상입니다. 중독을 크리스천 정신과 의사인 제럴드 메이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우리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양의 빈 공간을 하나님 대신 물질이나 경험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채워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채우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고 만족할 수 없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결코 채워질 수 없고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독은 그것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느낄만큼 거기에 의존하는 상태에 들어가게 만듭니다.

성경은 에서가 분명히 하나님 외에 다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C. 야곱의 삶을 움직인 가치(원리)
반면에, 야곱의 삶을 움직인 가치는 달랐습니다. 할아버지의 많은 말을 들을 때마다 야곱의 마음 속에서는 뭔가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i. 비록 멀고 멀게만 느껴지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말해준 하나님의 약속이 놓칠 수 없이 중요하다.
어린 야곱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은 비록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자기 삶을 훨씬 뛰어넘는 이야기이고, 자손 대대에 걸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의 약속을 결코 놓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에서는 근시안적이고 충동적이며 세속적(육욕적)이며 당장의 필요 앞에서 미래에 대하여 신중하지 못했던 반면, 야곱은 멀리 있는 유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먼 안목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사실, 야곱의 이야기에서 이 욕심을 빼버린다면 결코 야곱이라는 인물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ii. 장자가 되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그는 형 에서의 뒤를 따라 나온 둘째 아들입니다. 에서 자신은 할아버지가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할 때 그냥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야곱은 그 이야기가 특별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아버지 이삭은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유업을 받았습니다. 장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그 이야기에서 유독 희망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장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수단과 방법 보다는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iii. 미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현재를 참고 기다린다.
그래서 야곱에게 형성된 것 가운데 하나는 이 미래의 축복인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현재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인생의 태도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버지 이삭처럼 그냥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기회를 얻기 위해서 늘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D. 두 개의 직업: 사냥군과 목자(27~28)
이들 두 형제는 이런 식으로 성장하였고 성장하여서는 각기 다른 길을 갔습니다. 형 에서는 노련한 사냥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많은 시간을 들에서 수렵을 하면서 보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종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종용한’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의롭다’, 혹은 ‘흠이 없다’는 것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온전한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나님이 욥을 칭찬하실 때 쓴 단어입니다(욥 1:1,8: 2:3).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지금 야곱을 의롭고 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거칠고 들에서 사냥을 하면서 삶을 즐기는 형 에서와는 좀 다른 성향으로서 스스로 조용히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만족을 하면서 사는 성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형은 거친 사람이었던 반면, 야곱은 좀 조용하고 온화하고 혹은 가정적이라고 할만한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역 성경은 ‘종용한 사람’이라고 했고 NIV는 ‘quiet ma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야곱은 장막에 거했다고 한 말은 아마도 그가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같이 목축을 하는 사람이었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창 4:20에서 가인의 후손을 열거하면서 야발이란 인물이 ‘장막에 거하여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라고 할 때 사용한 말과 같은 것입니다.

3. 장자권 매입 사건(29~34a)
드디어 어느 날 야곱이 기다리던 때가 왔습니다. 형 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사냥을 나갔고 야곱은 이제 저녁 때가 되어서 집에서 죽을 맛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에서는 심히 곤비하여 집으로 돌아왔고 야곱은 온 집 안에 냄새를 풍기면서 죽을 만듭니다. 에서는 그의 성격답게 야곱에게 소리칩니다.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죽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붉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에서다운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표현입니다. 이 말에서 에돔이라는 에서의 별명이 생겼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에서의 지치고 배고픈 상황은 야곱에게는 기회였습니다. 본문은 마치 야곱이 하루 하루 자신이 장자의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다가 이날의 상황도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인 듯이 묘사됩니다. 야곱은 기다렸다는 듯이 흥정을 시작합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이 흥정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한숨에 이루어진 흥정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서의 성품이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에서는 쉽게 넘어가지만 오히려 야곱이 쉬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하고 철저한 거래를 요구합니다.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는 이 거래에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거래가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장자권이 아니라 바로 ‘그 붉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요구대로 ‘맹세함으로써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이 거래에 싸인을 하고나서야 야곱은 팥죽을 에서에게 주면서 후하게도(?) 떡을 더 줍니다. 거래는 끝났습니다.

야곱은 이날까지 기회를 살피다가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야곱의 문제는 그가 장자권을 열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얻는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야곱의 생각 속에서 자신이 힘세고 거친 형 에서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머리를 쓰는 것?즉 속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런 인생관을 내려놓지 않으면 한때는 되는 것 같아도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A. 장자권의 의미
도대체 장자권이 무슨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기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면 지금 이런 거래 같지 않은 거래가 무슨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장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은 온 열방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출 4:22; 렘 31:9). 태의 첫 것과 토지의 첫 소산은 특별하게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습니다(출 13:2; 신 15:19/ 신 18:4; 느 10:38~39). 이것은 삶(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장자는 언제나 대속을 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속전이라고 불리는 것이었습니다(민 18:15~16). 장자는 특권을 가지고(창 43:33; 49:3), 계승권을 가졌습니다(대하 21:3). 장자는 아버지의 유산의 두 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신 21:17). 가령 아홉 아들이 있으면 유산을 아홉 등분해서 장자가 2를 가지고 남은 여덟 아들이 7을 나누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의 율법의 자세한 규범들이 주어지기 전에 살던 에서와 야곱에게 있어서 장자권이란 것은 특별히 미래의 유업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어린 야곱의 마음 속에 말할 수 없는 열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장자권의 가치는 믿음의 측면에서만 이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야곱만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알아들은 셈입니다. 그 축복이 무엇인지를 그는 압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죽음 후에 소망을 두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 믿음은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바로 이 장자권 매입 사건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4. 가치관/세계관의 싸움: 미각 > 영적 감각
사실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단순히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고, 또 두 가치관, 두 세계관 사이의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가치관의 싸움, 세계관의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싸움은 미각과 영적 감각 사이의 싸움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성도의 가치관 사이의 싸움입니다. 에서는 육적인 일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아마 오늘날의 모습에 비유한다면 교회에 다니는 명목상의 신자(Nominal Christian)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는 불신자인 것입니다. 물론 그는 구도자도 아닙니다. 믿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쾌락추구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단 에서만이 아닙니다. 자식을 편애하여 특별히 에서를 사랑했던 아버지 이삭도 에서를 사랑한 이유가 바로 ‘사냥한 고기’ 때문이었다고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목은 참으로 낯이 뜨뜻해질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사냥한 고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듯이, 에서도 바로 먹는 것 ‘붉은 죽’ 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더 말합니다. 아담도 먹는 일에서 실패했고 노아는 마심으로써 실패했습니다. 이삭도 미각에서 실패했고 에서도 그랬습니다. 나중에 이삭은 그 좋아하는 ‘사냥한 고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 야곱에게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서를 축복하고자 하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삭은 마음의 소리보다(창 26:35) 입맛에 더욱 이끌려서 에서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즉각적인 만족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맛있는 식사 후에 찾아오게 될 비참할 지 모르는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미련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만들고 맙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는 바로 세계관/가치관의 차이였습니다. 번영을 뒤로 미루는 야곱의 관점과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에서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야곱은 비록 옳은 가치를 소유했지만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은 형을 희생시키고 형에 대한 조금의 긍휼이나 동정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반면, 에서의 근시안적인 안목에서 볼 때 장자권은 지금 당장 아무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당장의 삶만을 느낄 줄 알았지, 삶 이후와 자손들의 삶과 영원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에서는 즉각적 만족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장자권은 명분일뿐 아무런 실익도 없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 당장에 주어지지 않지만 지연된 번영을 볼 수 있었고 추구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의 충돌이고 가치관의 싸움인 것입니다.


5. 가치관이 운명을 결정했다(34; 히 12:16~17 ):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장자권을 팔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은 가치관이 운명을 결정한 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잘못된 한 번의 판단, 잘못된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성경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그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낳은 잘못된 생각, 잘못된 가치관, 잘못된 세계관입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품을 낳고, 성품은 운명을 낳는다는 말이 옳습니다.

에서는 경솔했습니다. 그의 경솔함을 보여주는 네 개의 단어가 여기 있습니다. 34절입니다.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이 표현은 에서의 스타카토식 행동 양식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의 말처럼 행동도 이처럼 단순했습니다.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서 이 사건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이것은 에서의 내면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에서를 언급합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교회 안에, 바로 우리들 안에 에서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장자권을 팔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물질을 좀 더 얻겠다고,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 현세적인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거룩한 장자권을 팔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로 진실하고 정직하며 특별히 순결하게 사는 권리입니다. 신앙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 바라보는 눈입니다.

6. 사족?이해할 수 없는 사실 하나
본문을 보면서 에서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야곱입니다. 아니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열망은 칭찬할 만 하지만, 성경은 결코 야곱이 보여주고 있는 방법에는 조금의 점수도 주지를 않습니다. 형을 희생시키더라도 내가 그 축복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 야곱의 태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야곱의 인생에서 그가 추구하는 복을 참으로 얻어 누리기 위해서 버려야만 했던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그 못된 기질을 버리기까지 그 복을 온전하게 누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옳은 것을 바란다는 것이 우리의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도 변화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과 야곱의 이야기 전체에서는 야곱의 이런 못된 기질과 행동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상급이 아니고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의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헤세드가 바로 우리의 죄를 극복하고 우리의 죄성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가 발견한 믿음의 비전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동일합니다. 우리의 그 모든 약점과 못된 기질이 여전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공사를 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완성품이 되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볼 것도 역시 하나님의 헤세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 헤세드는 우리의 인생 중에서도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도 역시 하나님의 헤세드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더 가야할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쫓아오셨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