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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1). <하나님의 헤세드> 발꿈치를 잡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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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생애 (1). <하나님의 헤세드> 발꿈치를 잡은 자

창세기 25:19-2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1-04

말씀내용
인물 강해를 시작하면서
성경은 많은 역사적인 이야기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역사는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역사 처럼 흥미롭고 교훈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도 특별히 사람들의 생애를 소개함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의 전기를 읽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써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게 다루는 인물의 생애는 말할 것도 없이 유익한 도움을 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어떤 면에서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과 삼손, 그리고 다윗, 엘리야와 엘리사 등을 보십시오. 이런 믿음의 영웅들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오르지 못할 나무인 것 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을 놓친다면 우리는 이들의 생애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느 인물보다 야곱이 가장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다루는 이유
먼저 야곱의 생애를 다루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은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 보다도 ‘우리’와 유사한 인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이야기는 성경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야곱은 배울 점이 별로 없는 인물인데 왜 이렇게 성경은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 많이 기록한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아마 야곱과 비슷한 인물이 여러분의 옆에 있다면 여러분은 불안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내 발꿈치를 잡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사람을 묘사하는 방식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하나님의 눈 앞에서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의 삶에 대한 긴 전기적 서술은 그야말로 우리의 모든 보기 싫어하고 숨어있는 기질들과 성향들 그리고 우리의 삶의 고장난 많은 부분들을 보게 해줍니다.

야곱 안에 있는 우리들
야곱은 정신적으로 우리와 아주 가깝기 때문에 성경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의 인생을 보면서 나타나는 연약함, 안간힘, 자존심, 갈망, 그리고 부족의 심리와 궁핍함을 보면서 공감하게 됩니다. 그는 감정적으로는 아버지와 멀리 지내고 어머니와는 아주 친밀하게 밀착되어서 자란 사람입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경험입니다. 말이 없는 아버지와 감정적인 거리감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서 우리를 발견하게 되곤 합니다. 그 가정은 비록 족장 이삭의 가족이었건만 조각나고 엉망인 가정이었습니다. 성경은 언약의 자손이라고 해서 그를 완벽한 인격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 기독교 가정들도 얼마나 많은 약점을 가진 가정들인지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기독교인의 가정은 더 화목하고, 더 가정적 기쁨들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꼭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야곱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 모두가 천천히 생각해 가야 할 문제입니다. 야곱의 부모는 결혼하여 사랑했으나(창 24:67) 사는 동안에 감정적으로 멀어졌으며 각각 자기가 편애하는 자녀와 가깝게 지내고 위안을 얻고자 합니다.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 에서를 더 좋아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인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25:28).

야곱의 인생의 등장 인물들
감정적으로 관계가 소원한 아버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술수 많은 어머니, 거칠고 사내답고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형, 나중에는 결혼해서 어떻게 해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아내들, 술수를 꾸미고 조종하는 장인 라반(리브가는 자기의 오빠를 닮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야곱에게도 그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서로가 한 아버지 아래 형제이면서도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의 구조 속에 있는 자녀들, 이런 것들은 야곱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자주 일어나는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특별하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편안하거나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복잡하고 엉망인 가정과 주변의 삶 속에서 야곱이라는 인물의 정체성과 소명, 그리고 영혼이 형성되고 단련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출생
배경을 잠깐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 25: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후예’라는 단어는 창세기의 구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이제 새로운 이야기(단락)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성경 기자가 소개하려는 이야기는 이삭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 ‘후예’라는 말은 그 의미 외에도 ‘설명’ 혹은 ‘이야기’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상 이제 나오는 이삭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 아들인 야곱이라는 인물에 그 초점을 맞추고 진행이 됩니다. 비록 후에 야곱의 열 두 아들과 특별히 요셉의 이야기가 있지만 창세기는 거의 끝나는 지점까지 야곱과 그의 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결혼을 한 나이가 40세입니다(25:20). 어머니는 밧단아람의 아람 족속 브두엘의 딸이고 라반의 누이입니다. 여기서 라반을 소개하는 것은 이제 그가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에 대한 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결혼했지만,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25:21). 여기서 140세 이상이 된 아브라함의 조언과 격려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마침내 리브가가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에서와 야곱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아버지에게 믿음의 아들로 이삭을 주셨듯이 지금 새로운 세대인 이삭을 다시 믿음의 시험을 주심으로 견고하게 만들어가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가 싸운 믿음의 싸움이라고 해서 아들이 건너 뛰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오랫동안 이삭은 자식을 달라고 기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아들을 보았을 때의 나이가 60세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5:26). 어쩌면 꼬박 20년 동안을 기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삭이 믿음의 아들이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도 믿음의 아들을 주실 뿐 아니라, 약속의 자녀는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초자연적 은혜의 선물임을 보여주시는 듯 합니다.

잉태한 리브가는 태중에서 두 아이가 싸우는 것을 인하여 심한 고통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괴로워서 리브가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이런 (고통)이 내게 일어나는 것인가요?”라고 말입니다(25:2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놀라운 계시의 말씀을 그녀에게 대답으로 주십니다. “태중에 두 아이가 있는데, 이들은 두 민족을 형성하게 될 것이고 두 민족은 뱃속에서부터 나뉘어질 것이며 한 족속이 다른 족속보다 강할텐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25:23).

드디어 아이를 낳았는데 정말 쌍둥이였고 먼저 나온 아이는 살갗이 붉고 털이 많아서(갖옷 같아서) 에서(hairy)라고 했고, 둘째는 첫째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으로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야곱의 출생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들입니다.

발꿈치를 잡은 자
야곱의 이름이 뜻하는 ‘발꿈치를 잡다’라는 말은 ‘속여 넘어뜨리다’는 뜻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남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속이는 자’ 또는 ‘배신자’라는 의미까지도 함축하는 말입니다. 태어날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 그 이름이 야곱이 된 이 사람의 생애는 정말 그 이름 야곱같은 삶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는 속셈을 가지고 상황을 조종하고 남을 속이고 공격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난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복을 받겠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인물입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동기와 추진력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얻기 위해서 수동적으로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는 남을 속였고 자신을 숨겼으며 이런 잘못된 방식으로 그는 하나님을 좇아갔습니다.

인생을 가득 채우는 갈등 그리고 또 갈등
우리 인생은 어떤 점에서 갈등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처럼 그 인생이 온갖갈등으로 가득찬 인생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그가 형 에서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웠다는 말에서 복선으로 등장한 것입니다(25:22). 그의 인생은 싸움과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갈등(25:19~27:46); 자신과 형 에서와의 갈등(25:19~34; 27:1~46; 32:1~33:17); 자신과 삼촌 라반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29:1~31:55); 그의 두 아내이며 동시에 자매였던 레아와 라헬의 쉼없는 갈등(29:31~30:24); 자신과 자녀를 낳지 못하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의 갈등(30:1~2); 아버지 이삭과 자신이 가졌던 갈등과 마찬가지로 대를 이어 나타나는 자신과 자기 아들들 사이의 갈등(34:30~31); 자신과 하나님의 천사의 씨름(32:22~32)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야곱의 아들들인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갈등들….수없는 갈등의 연속이 바로 우리가 살펴볼 인물인 야곱의 생애를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환경: 깨어진 가정
야곱의 가정의 깨어짐은 너무나 심해서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아버지 이삭을 보십시오. 이삭은 아브라함에서 야곱에까지 이어지는 족장들 가운데 가장 수동적인 족장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거의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라가 아버지에게 순순하게 결박 당하고 제단에 눕는 순종하는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놀라운 예표가 되었습니다. 수동적입니다. 그는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가 밧단아람으로 보낸 종이 아내를 데려오기를 들에서 기다린는 인물로 묘사됩니다(창 24:63). 여기서도 그의 의사와 선택권은 없습니다. 그는 또 늙어서 아들이 나가서 사냥을 해서 음식을 만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창 27:3~4). 아마 이삭은 어렸을 때가 그 인생의 영적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늙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고집과 선호에 의해 조정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나중에 보면 알지만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완전히 반대의 성향과 기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해서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모든 것을 조종하고 만들어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는 적극적입니다.

어머니 리브가를 보십시오. 리브가는 낯선 사람을 따라서 자기 고향을 떠나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을 한 훌륭한 믿음의 여인으로 묘사됩니다(창 24:58).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질투하는 아내로 변했고 나중에는 자신이 편애하는 아들과 공모하여 가정의 리더십과 복이 야곱에게 가도록 나이 많은 남편을 조종하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창 27:46~28:5). 그녀는 남편을 조종합니다. 은혜보다는 술책이 가정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의 가정들에서도 보게 되는 모습이 아닌가요? 가정의 리더십과 권위가 가장인 남편에게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꾀와 술수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여인들이 얼마나 많으며 이런 모습은 결국 그 자녀들에게 가정에 대한 얼마나 온전한 모습을 전해줄 수 있을까요? 결국 리브가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루게 됩니다. 자기가 계획한 일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고향인 밧단아람으로 떠나보내고 결국 그 사랑하는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아마 리브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없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의 20년 만의 귀환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 같습니다. 슬프고 원통한 이야기입니다. 20년 이란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는 리브가도 야곱도 몰랐을 것입니다. 아들 야곱은 어머니로부터 그 술수와 꾀를 그대로 물려받았고 배웠습니다. 깨어진 가정이 야곱에게 준 선물입니다.

야곱의 이야기에 숨은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께서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 정말 무엇일까요? 그것은 야곱의 성실함이 물론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본받을만한 믿음도, 야곱의 지혜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야곱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봄으로써입니다. 야곱의 인생처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즉 하나님의 헤세드를 잘 보여주는 인생이 있을까요? 헤세드라는 히브리 말은 영어 성경에서 주로 mercy(긍휼), kindness(은혜), lovingkindness(인자), goodness(선하심), steadfast love 혹은 unfailing love 등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고백하는 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6)는 말에서 ‘인자하심’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감정적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적 사랑은 좋으면 사랑하고 싫으면 사랑이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적 사랑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기로 언약을 맺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말라기 1:2을 인용하여 로마서에서 이렇게 우리를 너무나도 혼동케 하는 위험한 말씀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바울 사도는 이렇게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말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야기시키는 말씀입니다. 그토록 위험요소를 안고 있음에도 바울 사도가 이 구절을 통해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겠다고 하시고 그 야곱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실패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애를 푸는 열쇠입니다. 야곱의 생애에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언약적 사랑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결혼식입니다. 그 때 부부는 언약을 세웁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당신과 나 사이에 남아있을 때까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진실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일지라도 질색을 하고야 말 것 같이 끈질기게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의 방식으로 자기 길을 가는 야곱같은 인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적하시고 그를 마침내 만나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는 것입니다.

언약적 사랑이라고 할 때 이 언약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맹세와 각오’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렇게 약속을 하셔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빚을 갚아야 하실 의무가 있으시기나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그 맹세와 각오가 있기에 사실 오늘 이 자리까지 나와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야곱의 인생처럼 하나님의 헤세드를 잘 보여주는 삶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있지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삶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잘남을, 우리의 도덕성과 교양을, 우리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야곱처럼 잘 보여주는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우리의 못됨, 우리의 끈질긴 고집, 우리의 무너지지 않는 그 알량한 자존심, 우리의 온갖 술수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인생처럼 끈질기게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자기의 이름 값을 해내며 살아간 사람도 없는 듯하지만 그런 그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언약대로 사랑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우리는 보면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헤세드를 깊이 우리 삶 속에서 발견하는 감격과 감동과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야곱, 발꿈치를 잡는 자를 추적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헤세드는 결국 우리를 이기고 맙니다. 그러나 내 고집을 안고 살아간 세월만큼, 그리고 거기서 받은 상처와 아픔 만큼의 댓가를 인생에서 지불하게 된다는 것도 야곱의 생애는 놓치지 않고 보여줍니다. 일찍 돌아오라는 메시지이겠지요.

야곱은 둘째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에도 둘째가 되기를 원치 않았고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 했고 형 에서에 비하면 결코 거칠다고 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 그는 거친 승부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인생의 많은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깨뜨리시고 많은 인생의 상처를 받고 나서 마침내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만으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자기 이름 야곱에 걸맞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발꿈치를 잡은 자가 아니라 발꿈치를 잡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 약속하신 복인 헤세드를 주시길 원하시지만, 야곱이 진실하고 투명해질 때까지 그렇게 할 수 없으셨습니다. 야곱은 두 아내와 결혼하고(사실은 두 아내의 여종들을 포함하면 넷입니다) 열 세 자녀를 낳고 세 나라(가나안, 밧단 아람, 애굽)로 옮겨다니면서 하나님의 손으로 다듬어지고 빚어지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붙잡고자 하는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이 붙잡어야 할 것은 기껏 남의 발꿈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그는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편안하게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인생을 축복하시길 원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행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저런 발꿈치를 붙잡고 속이는 한, 우리가 잡고 있는 남의 발꿈치를 놓고 하나님만을 붙잡기까지는 그 은혜와 축복을 온전하게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직도 이런 저런 인생의 아픔과 좌절, 불화와 갈등 들을 통해서 우리를 추적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의 모든 순간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우리가 발견하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참된 축복과 은혜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말입니다.

발꿈치를 잡는 인생을 바꾸셔서 결국 하나님과 겨루는 자가 되게 하시는 은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시는 은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이런 야곱의 삶을 성경이 깊이 묘사해주고 있는대로 깊이 들여다보는 사이에 우리 자신들도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