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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6). 그래도 순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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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6). 그래도 순종합니다

시편 119:121-128, 창세기 18:19, 잠언 11: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12-07

말씀내용
그리스도인은 산 속에 들어가서 혹은 수도원이라는 폐쇄된 환경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철칙같이 붙들고 살아가는 원리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지배하는 원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이 일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믿음으로 하는 순종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본문인 시편 119:121-128의 각 절은 히브리 알파벳 아인(ע)으로 시작합니다. 이 본문에 흐르는 주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충성됨(신실함)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충성됨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순종의 태도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포착할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이 터프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살 수 있겠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열쇠는 122절에 ‘주의 종을 보증하사’라는 말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본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 언약 백성의 보증이 되시는 하나님 (121-122; 요일 1:7; 창 18:19; 잠 11:15)
먼저 앞의 두 절 121-122절은 박해에서 건져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시편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121절은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 자기를 넘기지 말아 달라는 간구이고, 122절은 교만한 자들이 자기를 박해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121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시편에서 자주 보듯이 시인의 자기 자랑이거나, 자신의 공로에 근거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주님, 제가 정의와 공의를 행했으므로 제가 악인들에게서 보호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인의 선한 양심의 증거이고 고백일 뿐입니다. 요한일서의 표현을 빌면, 이것은 신자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요일 1:7).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말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세기 18:1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택하여 부르신 목적을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의와 공도’가 121절에 ‘정의와 공의’로 번역된 말과 같습니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정의(공도, justice, מִשְׁפָּט)는 ‘결정, 판결’을 의미하는 사법적 정의를 가리키는데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인간 관계 속에서 공정함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회에서 재판이 바르게 행해진다면, 그 사회는 비교적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법 집행과 재판의 공정함은 그 사회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공의(의, righteousness, צֶ֫דֶק)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맥락에서 강조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공의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 관계에서 살아가는 백성이라면 공의는 그 사람의 특징이 될 것이고,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는 사법적 맥락의 정의도 자연히 많아질 것입니다. 이런 사회는 억울한 사람이 적고,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베푸는 사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너와 네 후손이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너희들이 죽어서 지옥가지 않고 천국가게 하려고 구원했다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21절의 시인의 기도는 이런 말입니다. “저는 주의 언약 백성이오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넘기지 말아 주십시오.”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아는 사람의 기도는 근거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과 선하심을 바라보며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정체성은 ‘주의 종’이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납니다. 122절입니다.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본문 여덟 절에서 ‘주의 종’이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122,124,125). 모두 시인의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 정체성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자신은 주인에게 충성해야 하는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영광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자기 운명을 주인의 약속에 의탁하는 존재입니다.
122절에는 119편의 모든 절에서 등장하는 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여덟 가지 표현 가운데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보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지금 하나님께 자기 인생의 보증을 서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쉽지 않은 부탁입니다. 보증을 잘못 서서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국에 처음 정착할 때, 차를 사야 했는데 누군가 보증을 서 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형편을 알고는 같이 교회를 섬기던 목사님 한 분이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보증을 서겠다고 해서 차를 수월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고맙습니다. 만일 제가 차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그분이 저를 대신해서 갚아주겠다는 싸인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잠언 11:15).”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절대로 보증을 서주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지혜롭고 신중해야 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 그 어려운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자기가 교만한 자들에게 박해를 당해야 한다면 주님이 대신 당해달라는 말입니다. 감히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인이 하나님께 이런 부탁을 드립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주의 종’이라는 사실이 그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보증이 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입니다. “나에게는 보증인이 계신다.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성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증이 된다는 이 사실이 모든 상황에서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열쇠가 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보증이 되시는데 내가 순종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쳇말로 예수 믿는 게 밥 먹여주냐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 그분이 나를 먹이시고 입혀 주시고 내 인생의 마지막 호흡까지 책임지신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살겠다.”


2. 언약 백성의 갈망 (123; 69:3)
이런 언약 백성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입니다. 123절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123).” 주의 구원은 주님이 자기를 박해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의로운 말씀은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성취되는 말씀,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의 의로운 말씀’의 의미입니다. 시인은 박해 속에서 주의 의로운 말씀,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갈망합니다. 눈이 피곤하다는 말은 시인의 눈이 약하고 침침해지고 눈물이 마를 날 없을 만큼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시인이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이 피곤하도록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과 말씀을 갈망하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주님의 말씀이 언제 위로가 되는지를 물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제로 경험하는 다변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 소망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면 실로 힘을 얻습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그 소망을 붙잡고 즐거워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소망의 위로를 누리는 정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의식 가운데 진토에 붙은 것 같을지라도 영광의 비전을 보며 ‘셋째 하늘에 올라간 것’ 같은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의 복락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확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이 주는 충만한 위로는 인내와 겸손으로 주님을 기다림으로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신앙과 참지 못함과 싸워, 어린 아이 같이 복종하고 의존하는 마음의 상태를 불러오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적인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이 시편 기자는 분명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약속을 소유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그는 자기의 영적 시야를 '죄의 즐거움과 세상의 부요들'이 가리는 것 같을 때에도 자기의 소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순간에는 아버지의 얼굴이 부분적으로 가려진 것 같아도, 그는 게으른 신자와 같이 그냥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수 7:10). 바로 그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 하기에 피곤하니이다." 그는 눈을 들어 "의의 태양"이 발하는 빛을 포착하려고 합니다. 그는 오늘날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바를 알고 있었습니다. 인내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 마음의 소원하는 모든 것을 받는 놀라운 때를 맞게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69:3에서 먼 훗날 이 땅에 오신 주님이 하실 고백을 예언적으로 들려줍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시편 69:3).” 주님이 친히 이 고백을 하셨다는 것은 이 고백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언약 백성의 위로와 갈망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 갈망은 성도의 기도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3. 말씀을 깨닫고 싶은 마음 (124-125)
이런 갈망을 가진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사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124-125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124-125).”
여기서 시인은 두 번 더 ‘주의 종’이라고 자신을 부름으로써, 언약 관계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대로’라는 말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를 근거로 자신에게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언제나 성도의 기도를 확신에 이르게 하는 요소이고 근거가 됩니다. 시인이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라고 할 때 그는 지적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내면에서부터 변화시키는 말씀의 은혜를 구하는 말입니다. ‘알다’라는 동사는 머리의 지식이 아닌 경험하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시인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주님, 제게 주의 율례들을 더 분명하고 풍성하게 가르쳐 주십시오. 주의 율례들이 가진 하늘에 속한 단 맛과 거룩한 자유를 분별하도록 깨닫게 하소서. 그러면 더 순전한 마음으로 주의 율례들에 헌신하며 순종하겠습니다."


4. 거룩한 재촉(126; 마 6:10; 계 22:20)
이제 우리는 126절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께 대담한 요구를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126).”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지금이라고 누가 감히 정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지금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시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가 처한 형편이 다급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끔찍하게 힘든 상황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기에, 상황에 따라 우리의 마음과 기도는 크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시인의 초점은 자신의 힘듦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입니다. 자신의 위로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페하였’기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존엄과 위엄이 모욕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분노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거룩한 질투심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들었던 다윗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매를 드실 때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육체에서 난 열심이 아니라 성령님께 속한 성도의 참된 열심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 “나라이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10). 그리고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로 맺었습니다(계 22:20). 이것은 소위 거룩한 재촉입니다. 지금 시인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거룩한 재촉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의 불경건한 현실 앞에서, 그리고 때로는 교회의 암울한 현실 앞에서 이런 거룩한 재촉을 하나님께 할 수 있고 해야만 합니다.


5. 한 영혼의 가치 (127)
어둠 속에서 빛은 더 강렬하게 비춥니다. 하나님의 법을 업신여기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사랑과 순종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127).” 박해와 압박이 심하지만 하나님과 그 말씀을 향한 시인의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시인의 영혼은 얼마나 고귀합니까? 청교도 목사 헨리 스쿠걸은 “한 영혼의 가치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평가된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부패하고 사악한 대상들을 사랑한다면, 그 영혼의 가치는 다만 부패하고 사악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대상처럼 영적으로 성장하며 성숙해 집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그 대상은 늘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금 곧 순금 보다 더 사랑하는 시인의 영혼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인 하나님 만큼 가치를 지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경고합니다(딤점 6:9). 돈을 사랑하는 영혼은 결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없으며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결국 멸망의 자리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그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평가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6. 그래도 순종합니다 (128, 호 8:12; 시 119:113)
결국 시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128).” 시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의 말씀이 바른 길, 참된 길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시인은 ‘범사에’ 그리고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겠다고 말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자기가 손해를 보고 위험에 처해지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이 옳다고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유리할 때든, 불리할 때든 유불리를 떠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이 진리이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하나라도 나와 상관 없다는 식으로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언제나 조심하십시오. 호세아 선지자의 지적을 들으십시오. “내가 그에게 내 율법의 많은 것을 써 주었지만 그들은 마치 자기들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했다(호 8:12, 우리말성경).” 한 가지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천 가지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죄를 가벼이 여겨 멸시하면 우리는 사실상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라는 말을 여러분의 마음판에 새겨 넣으십시오. 물론 우리는 이렇게 행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범사에 주의 모든 말씀을 최상의 존중의 대상으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도리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15연의 시작 구절,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113).”을 다시 만나게 합니다.
시인은 범사에 주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도전합니다. “이래도 순종하겠느냐?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래도 순종합니다.”


7. 교훈과 적용
본문은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기려는 시인의 갈망을 보여줍니다. 성도의 이런 마음은 하나님의 변함 없는 언약과 그 언약에 근거한 은혜로운 구원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도가 범사에 ‘그래도 순종할 수 있는 열쇠’는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시인은 122절에서 ‘주의 종을 보증하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의 의미를 복음의 렌즈로 확대해서 살펴봅시다. 이 기도는 십자가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수백 년 후에 시인의 기도는 십자가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갚아야 할 모든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주의 종을 보증하사”라는 시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와 우리를 고소하는 자 사이에서 우리를 보증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대적하는 사탄의 압제에 눌려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증이 없다면 신자는 무엇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지뢰밭 같이 위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불안과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의 보증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인생은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취업과 실직에 대한 불안함, 노년에 대한 두려움, 홀로 될 것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증명하신 하나님의 보증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행로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든든한 보증을 믿는 성도들은 인생의 불안함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는 보증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범사에 주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갈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상황에서 그래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세 번이나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보증이 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찰스 브리지스의 기도로 말씀을 맺고 싶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의 계명들을 차갑게 대한 잘못과, 주의 계명들이 내 행실에 미친 영향력이 적은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닌 대상들에 마음을 빼앗겼던 모든 일들이 부끄럽습니다. 오, 제 마음을 다하여 습관적으로 주의 계명들을 따라 행하는 경건의 연습을 하게 하시어 이 말씀의 진리를 더 알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