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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7). 하나님의 얼굴 빛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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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7). 하나님의 얼굴 빛이 필요합니다

시편 67:1-7, 민수기 6:24-26, 창세기 12: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0-08-12

말씀내용
1. 존 스토트가 사랑했던 시편 (1; 민 6:24-26)
존 스토트의 『내가 사랑한 시편』은 40편이 못되는 시편을 선별하여 간단한 자신의 코멘트를 붙여놓은 책입니다. 그 중에 67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편의 언어는 참 아름답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비는 복의 언어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 스토트가 말하는 ‘대제사장이 비는 복의 언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민수기 6:24-26에 기록된 아론의 축복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축복은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고린도후서 13:13이 익숙한 것만큼 매우 익숙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아론의 축복을 예배의 마지막 축도문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존 스토트가 말하는 대제사장이 비는 복의 언어는 실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존 스토트는 그 아름다운 복의 언어를 이 시편 본문이 약간의 변형과 함께 기도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 것입니다. 특히 1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단지 시편 기자는 ‘네게’를 ‘우리에게’로 바꾸어 아론의 축복을 자신의 기도로 변형하였습니다. 시인의 기도의 핵심은 아론의 축복의 핵심과 같을 텐데, 그것은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일 것입니다. 이 말을 NLT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May his face smile with favor on us(그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환하게 웃으시기를).”


2. 하나님의 얼굴 (시 13:1; 44:23-24; 31:16; 잠 16:15; 레 24:6-9)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중요했습니다. 마치 어린 아기에게 엄마의 얼굴이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빛은 우리를 향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하나님의 얼굴이 중요했기에 시편 기자들은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편 13:1).”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시편 44:23–24).”
하나님의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를 거두셨기에 그 임재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의미이고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그들을 향해서 웃으시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전형적인 표현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구하는 상징적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자녀들을 기뻐하여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가 그 자녀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즐거워하는 이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왕의 희색은 생명을 뜻하나니 그의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잠언 16:15).”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소의 떡상 위에 매주 새롭게 만들어 진열되던 진설병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자어인 진설병은 그 이름이 특이합니다. ‘병(餠)’은 떡을 말합니다. 진설의 ‘진(陳)’과 ‘설(設)’은 모두 벌려놓고 베풀어 진열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윌리엄 틴데일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할 때, showbread(또는 shewbread)라고 번역한 것을 한자어로 그대로 옮긴 것이 진설병입니다. 그 의미는 ‘진열된 떡’ 혹은 ‘전시하는 떡’입니다. 그러나 본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이것은 ‘얼굴 떡’ 또는 ‘면전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는 떡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영어로 bread of the Presence 라고도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는 떡이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24:6~9에 보면 안식일 전날 제사장들은 이 떡 12개를 만들어서 안식일에 성소의 떡상 위에 이 떡을 여섯 개씩 두 줄로 쌓아 놓아야 합니다. 물린 떡은 제사장들이 거기서 먹습니다. 누룩 없는 고운 밀가루로 만들어진 이 떡은 지름 30 cm, 두께 10 cm 정도로 한 가족이 먹을 정도의 큰 떡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큰 떡 12개가 두 줄로 쌓여있는 이 떡상은‘떡을 진설하는 상’이라고 불렸습니다(대하 29:18).
여기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떡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사람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쉽게 음식이 차려져 있는 제사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제사가 신에게 드려진다면 신에게 먹으라는 것이고, 조상에게 바치는 제사라면 조상 귀신이 먹으라는 것입니다. “잘 잡수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십시오” 하는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는 신이나 조상 귀신은 먹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의미로는 전적으로 신을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먹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진설병은 이것과는 전혀 다를 뿐 아니라 도리어 정반대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신다는 개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는 진설병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보고 알고 계실 뿐 아니라 그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설병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12개의 떡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각각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몫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실제로 이 떡을 먹는 것은 아론과 그 자손이지만, 제사장이 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신하여 먹는 것이었습니다. 진설병은 언제나 이 떡상 위에 있었습니다. 그것도 신선하게 말입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이 떡이 7일이 되면 제사장들이 물려내고 새 것으로 바꾸고 물려낸 것을 먹었습니다. 이 진설병은 이스라엘 백성의 먹을 것, 입을 것, 살아가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 필요를 보고 아실 뿐 아니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에 대한 표지였습니다. “내 필요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모든 필요를 보고 아시며 채워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설병이 주는 영적 교훈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고 기도할 때, 여기에는 이런 의미도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도의 열정 (2-5,7)
시편 67편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편 기자의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그의 안목과 시야에 무엇이 들어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복을 달라는 기도야 우리가 수도 없이 많이 듣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가 범상치 않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시편 기자의 의도와 목적 때문입니다. 2절에서 그는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3절과 5절을 보면, 그는 ‘민족들이,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4절에서 그의 시야는 온 백성과 민족들, 땅 위의 나라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보입니다.
시인의 시야가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그의 안목이 얼마나 멀리를 바라보고 있는지 보이십니까? 그는 특이한 사람이거나 특별한 성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시야와 안목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창조하신 세계를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시야와 안목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발견합니다(마 6:9-13). 주님은 이 표준적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우리 개인의 의식주 문제나 각종 필요들 보다 우선되며 심지어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문제나 죄의 유혹에 빠지는 문제보다도 우선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우선순위가 오늘 이 시편의 기도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시편 기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자기가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그 의도와 목적이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구약의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19세기 초 인도에서 사역을 했던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yn, 1781-1812)은 하나님을 위한 열정을 그의 전기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 가해지는 무슬림들의 신성모독에 대하여 마틴은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시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불명예를 당하시는 것이 내게는 지옥이었다.”
헨리 마틴은 그가 흠모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 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태워드리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의 순교자 짐 엘리엇(Jim Elliot, 1927-1956)도 그가 존경했던 두 선배 처럼, 대학시절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주여, 나의 길을 번영케 하옵소서. 내가 나의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삶이 하나님을 아는 것의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물이 되도록."
이 시편 기자와 거의 동일한 기도가 아닙니까? 사실, 이런 하나님 중심성과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 전체가 우리를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처음 듣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과연 이 시편기자처럼, 혹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는가? 그것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만 미루어 두고 한 가지 주제를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4. 선교의 자리 (4, 6; 롬 14:17; 창 12:3)
시편 67편은 특별히 선교적 시편, 혹은 선교사의 시편(a missionary psalm)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기도하는 시인은 이 기도문 전체에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선교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을 낳는 일입니다. 그렇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송하는 예배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 선교의 동력은 넉넉한 재정이 아닙니다. 선교의 동력은 조금 전에 우리가 살펴본 주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백성의 열정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다른 방식으로도 설명합니다. 4절은 이 시편의 중심 구절입니다. 이 시편은 4절을 3절과 5절이 둘러싸고 있고 또 3-5절을 1-2절과 6-7절이 둘러싸고 있는 수미상관의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클루지오(inclusio, 둘러싸고 있다는 의미에서)라고 부르는데, 이 이중적 인클루지오의 중심이 4절입니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4절에는 백성의 기쁨과 즐거움의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고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고 찬송입니다. 심판한다는 말은 다스린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관리, 지혜로운 결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리와 결정은 언제나 옳고 그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그 나라의 특성입니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지상 유일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유능한 목사나 특정한 지도자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맛보고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치게 될 때, 그것은 당연히 선교적 연료가 되어 폭발적 힘으로 분출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단지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모든 민족들로부터 찬송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이미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2:3을 봅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3).”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이 거룩한 소명을 기억해야 했고 그 소명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일에서 늘 실패하는 역사를 거듭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2천년의 교회 역사에서 우리는 그 반복되는 많은 실패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작은 자들을 통해서 그 거룩하고 광대한 일들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시편 67편을 다시 상고할 때, 우리도 이 거룩한 소명을 회복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교회는 일종의 박물관과 같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역사 속의 값진(값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유물들이 가득합니다. 박물관의 가치는 그 건물의 웅장함이나 현대성, 편의성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박물관의 가치는 소장하고 있는 역사 유물들의 가치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 유물들의 가치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전세계에서 몰려듭니다. 대영제국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처럼 잘 알려진 박물관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건물이나 외적 조건들로 스스로의 가치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충만히 계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는 세상 앞에 현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든지 그들은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그 말씀을 살아내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세상은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6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이 말은 우리의 풍부한 소산을 보고 사람들이 “아 하나님께서 저들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렇게 후한 소산을 베풀어 주셨구나”라고 고백하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 구절에서 ‘내어 주었으니’라는 말은 이 시편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과거를 의미하는 완료형입니다. 적지않은 학자들은 이 완료형을 예언적 완료, 확신의 완료 또는 기원의 완료라고 보고 미래시제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설명합니다. 장래에 하나님께서 그런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지요. 그 확신이 너무나 커서 혹은 거의 예언자적 확신을 가지고 구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선교의 동력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이라면, 선교의 목적은 하나님이 온 세상에서 영화롭게 되시는 것이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
니다. 여기에 선교의 자리가 있습니다. 선교의 최우선적 동기는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5.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 빛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제가 앞에서 던진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이 시편기자처럼, 혹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는가? 그것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선교는 솔직히 남의 이야기가 아닌가?”
여러분의 솔직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물론 그 관심과 열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도에 있어서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관심과 열정이 얼마나 있어야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결론은 이 시편 기자가 구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얼굴 빛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시인은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고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절박한 기도인지 아시겠습니까? 어쩌면 시인은 우리들 중 한 사람처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관심과 열정이 너무나 작다고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성도가 마땅히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고, 어떤 관심과 열정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알고 있으며 그 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민족,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이 그 거룩한 소명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얼굴 빛을 비추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열쇠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얼굴 빛에서, 나를 향해서,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환하게 웃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 힘을 얻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삶을 불태우고 싶은 열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기도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우리 공동체에게 정말 필요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시편 기자와 함께, 우리도 이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으로 우리 인생을 드릴 수 있기를, 벧샬롬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세계 도처에 주의 교회들이 모두 그러할 수 있기를 구합시다.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고 땅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