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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안식일, 예배의 날 - (4). 진짜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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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안식일, 예배의 날 - (4). 진짜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4:1-11, 시편 95:7-11, 창세기 2: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5-28

말씀내용
여성 신학자인 마르바 던은 자신의 책 [안식]의 맨 앞에 이런 헌정시를 썼습니다.
안식이 필요한 모든 이에게 이 책을 바친다:

가장 바빠서 /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기적인 예배와 실천의 순환이 필요한 / 사회 운동가들에게,
성취만을 추구해 이제는 자신의 가장 깊은 열망을 이해하고 / 침묵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물질주의와 기계화로 인해 유회의 능력을 상실해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기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열정을 잃었기에 / 감정을 회복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외롭기에 / 정서적 자양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군중 속에 살기에 / 고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삶의 우선 순위를 찾지 못해 /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현재가 미래를 좌우한다고 생각하기에 / 현재를 바꾸기 위한 미래의 희망과 비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깊이 있는 가정 생활을 갈망하며 / 가치관을 확립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포로 수용소에서 신음하면서도 춤을 추어야 하는 / 가난한 자들과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비폭력, 청지기 정신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배워야 하는 / 부자들과 압제자들에게,
고난이 어떻게 구속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배워야 하는 /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신학에 따뜻한 마음을 덧입혀야 하는 / 전문 신학자들에게,
종교를 현대 사회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며 /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메마르고 공허하며 형식적인 예배에 식상해 /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고 / 안식일의 치유자로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은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더구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된 인간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안식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안식을 필요로 하고 또 원하지만, 실제로는 안식 얻는 그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아무 조건 없이 지친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는 좀체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안식을 원하지만, 지금 당장 와 닿는 그 무언가를 항상 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내시고 그들에게 처음부터 안식일 규정을 주셨지만, 그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쉬라고 해도 쉬지 않습니다. “돈을 더 벌 수 있는데 왜 쉬어야 해?”라고 말했고, “땅의 안식년은 무슨? 땅을 왜 놀려? 조금이라도 수입을 더 올려야지.” 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을 원하지만, 안식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모순성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 번에 걸쳐 [안식과 안식일, 예배의 날]이라는 주제로 주의 말씀을 살펴보았고, 오늘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살피려는 작은 주제는 “진짜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 광야 세대의 비극(3:7-4:13; 민 13:30; 14:7-9; 시 95:7-11)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광야 세대를 소환하는데, 핵심 개념은 안식입니다. 안식이라는 주제는 3:7부터 4:13까지 이어지지만, 우리는 4:1-11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광야 세대(1세대를 말합니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비극적 종말을 본받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광야 세대는 불신앙(3:12,19)과 불순종(3:8,13,1518)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려고 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안식이라고 표현합니다(3:11). 마르바 던의 헌정시에서 본 것처럼, 안식은 하나님 밖에서 안정을 누릴 수 없는 모든 인간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갈구하는 것이듯이, 광야 세대에게도 가나안은 그런 안식이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그들이 누릴 평안과 안전과 번영을 의미합니다.
광야 세대는 가나안이라는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4:1-2),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4:2). 이것은 가나안을 정탐한 뒤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전해준 소식, 가나안 땅이 실로 아름다우며 그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한 말을(민 13:30; 14:7-9) 믿기를 거부했던 일을 언급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거역했다는 사실을 시편 95편 7-11절을 세 차례나 인용하여 강조합니다(3:7-8,13; 4:7).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고 이 두 사람만 광야 세대 중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세대는 가나안이라는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시편 95:11).”고 맹세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3:11,18). 이것이 광야 세대의 비극입니다.


2. 세 가지 안식
광야 세대의 비극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4:3에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불신앙으로 불순종한 광야 세대와 달리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과 그 복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가 안식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 즉 하나님과의 교통과 영생을 누리는 자리에 이미 영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광야 세대와 같이 약속을 받았고 복음을 듣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여 안식의 은혜를 누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는 적어도 세 개의 안식이 나옵니다.


A. 창조 때 하나님의 안식 (창 2:2-3)
제일 먼저, 창조 때 하나님이 가지신 안식입니다(창 2:2-3).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3절 하반절과 4절에서 언급했습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3b-4).” 이 안식은 모든 안식 개념의 근원이고 원형입니다. 하나님의 이 안식은 창조 이래 준비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에 지치고 피곤하셔서 안식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해 예비하신 안식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보여주는 안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후에 맞은 첫번째 날은 바로 하나님의 안식일이었고 그 두 사람은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사귐과 안식을 맛보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안식에 온전하게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B. 여호수아의 안식 (4:8)
그런데 본문에 두번째 안식이 나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 땅이 두번째 안식입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은 안식의 모형이지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8절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8).” 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어지는 가나안 땅을 소유하고 거기서 누리는 평안과 번영과 안정은 최종적인 안식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은 다만 성도가 궁극적으로 이르게 될 안식을 가시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입니다.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바꾸면 정확하게 예수와 철자가 일치합니다. 가나안이 진짜 안식의 그림자 역할을 하듯,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절 상반절과 5-6절에서 이 안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3b,5) 그들은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복음)을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음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6). 여기서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은 계속해서 믿지 않았다는 말과 혼용됩니다(3:19). 불신앙이 불순종이라는 말입니다. 광야 세대는 가나안 땅이라는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C. 종말론적인 안식 (히 4:3,9-10)
여기에 세번째 안식이 나옵니다. 안식의 모형인 가나안 땅이 내다보았던 실체, 하나님의 안식으로 암시된 안식의 궁극적 성취로서의 안식, 종말론적인 안식입니다. 3절에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할 때, 바로 이 안식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신약의 신자들은 안식에 대한 복음의 약속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저 안식에 이미 현재적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신약의 신자들은 이 안식의 실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누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창조 때 하나님께서 쉬셨던 그 안식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9절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9).” 헬라어 성경을 보면, 9절에서 안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앞에서 사용되던 단어가 아닌 ‘사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ός )’라는 단어가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안식일을 의미하는 ‘샤바트(שַׁבָּת)’의 음역인데, ‘안식일을 축하하다, 기념하다, 즐기다,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히브리서 기자는 9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는 안식일을 축하하고 지킬 날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안식은 1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고 쉬심과 같이 자기의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안식입니다. 수고와 고통의 때가 지나고 신자들이 영원한 유업을 누리게 될 안식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창조 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그 원형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안식의 은혜를 누리기 시작한 신약 성도들에게 그 안식할 때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단어를 바꾸어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된 미래적 안식의 축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부각시킨 것인데, 이 뉘앙스를 잘 드러낸 것이 필립스역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충만하고 완전하게 안식할 수 있습니다(There still exists, therefore, a full and complete rest for the people of God).” 이 충만하고 완전하게 안식하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안식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을 위하여 종말론적 완성의 때에 주어질 것입니다. 믿는 신자들은 지금 안식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평강과 안전과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지만 아직 완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4:11)
그렇다면, 안식과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주는 결론적 권면은 무엇입니까? 1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11).” 믿는 성도들은 이미 안식에 들어왔지만(3)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우리는 두려워할지니”라고 말했고, 11절에서는 “힘쓸지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중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극심한 배교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교회를 위해 쓰여졌습니다. 교회의 적잖은 지도자들이 배교를 하고 떠나갈 때, 신자들의 믿음은 얼마나 흔들렸겠습니까? 그런 배교의 현상을 설명하는 성경의 방식은 배교자들은 처음부터 참된 믿음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의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는 누가 배교를 할 사람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를 향해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너희가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요, 복음을 들은 자로서 그 약속과 복음에 대하여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반응했던 광야 세대처럼 행하지 말고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여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고, 그 말씀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더라도 여전히 안식을 유업으로 받을 것인 양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이 권면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복음의 말씀에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단어 ‘오늘’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7을 세 번이나 인용하면서(3:7,15; 4:7),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오늘’은 여전히 기회가 열려져 있는 날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한다면, 여러분은 그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현재의 일로써 미래의 일에 대한 확신을 얻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 이를 잘 닦음으로써 미래에 이가 튼튼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이, 현재의 조건에 의해 미래의 확실성이 보장되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오늘을 맞이할 것이고, 그 매일 찾아오는 오늘에 우리는 주어진 약속과 복음에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함으로써,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이 우리의 노력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일을 그치고 멈추는 것, 믿음으로 안식을 누리는 것은, 내 능력과 힘으로 사는 태도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쓰라는 이 말은 율법주의적 공로나 선행이 될 수 없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리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매 주일—안식일 마다 말입니다.


4. 안식일에 기억하라. 진짜 안식일을! (마 11:29)
안식일은 신약 성도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합니다. 청교도들처럼 매 안식일을 유대 안식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여 반드시 필요한 일(생명에 관련된)을 제외한 모든 일을 쉬어야 한다고 보았던 청교도적 관점에 동의하든지(엄수주의) 아니면, 매 안식일을 예배의 날로 이해하고 다른 긍정적인 행위들을 금하지 않는 대륙적 관점에 동의하든지(두 경우 모두 개혁주의 안에서 허용되는 관점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질 종국에 완성되고 영원히 지속될 그 진짜 안식일의 축제를 대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안식일은 본래 모든 구약의 절기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기억의 장치입니다. 안식일에는분주함 속에서 살아가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맞을 때마다 우리가 마치 우리의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일을 그치고 쉴 때, 나의 능력으로 이룬 업적과 성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은혜로만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억하고 쉼을 누릴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구속적인 성취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한 창조주이심을 알기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며 위대한 예술가요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면서 안식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안식일을 누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채워지고 그 아름다움을 주변 세상과 나누는 최고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세를 사모하지 않을 정도로 여러분이 현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가령,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보내는 꿈같은 휴가라도,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계속 행복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땅에서의 천국은 쉬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안식을 온전하게 경험할 진짜 안식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매 안식일 마다 다가올 진짜 안식을 바라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즐겁게 이 땅에서 주어진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입니다(마 11:29). 저는 18세기 영국 목사 필립 도드리지(Phitip Doddridge)의 찬송시를 소개하면 말씀을 맺겠습니다.
땅에서 지내는 모든 안식일 우리 사랑하지만
저 하늘에 더 고귀한 안식 있으니
애타는 마음으로 그 안식 고대합니다
간절한 소망과 강한 열망으로

피로나 괴로움도 그곳엔 없고
죄도 죽음도 그곳엔 이르지 못하리
영생을 얻은이들 부르는 노래에는
한숨이나 신음 섞이지 않으리

화난 원수의 습격 없고
긴 휴식을 깨는 염려 없으며
한밤 중 그늘 구름 가린 태양도 없고
거룩하고 높고 영원한 정오만 있으리

주님의 보좌에 우리 모이게 하시고
가장 낮은 자리만 우리에게 주소서
거기서 우리 주님의 찬송 외치고
승리한 거룩한 무리의 노래 함께 부르리

오랫동안 고대하던 날이여
시작하여라 고통과 죄의 영역에 여명으로 밝아 오라
기쁨으로 우리 갈 길 다 가고
하나님과 쉬기 위해 죽음의 잠을 자리니

진짜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바라고 원하고 갈망했던 그 진짜 안식은 어느 날 주님이 오실 때, 믿는 우리에게 선물로 영원히 주어질 것입니다. 언제가 우리에게 주어질 그 다가올 진짜 안식일을 바라고 기다리며, 오늘 이 안식일을 믿음과 기쁨으로 보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