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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안식일, 예배의 날 - (1). 안식이 필요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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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안식일, 예배의 날 - (1). 안식이 필요한 당신에게

마태복음 11:28-30, 출애굽기 31:12-17, 창세기 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4-16

말씀내용
앞으로 몇 주 동안, ‘안식과 안식일, 예배의 날’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번째로 안식이라는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 주제를 몇 차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이 주제가 우리의 신앙 생활을 서고 넘어지게 할 만큼 중요함에도 실제로는 너무나 가볍게 여겨지는 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전해지는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우리가 친숙하게 아는 말씀이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부드러운 어조로 초청하지 않기에, 예수님의 이 초청은 낯선 초청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에게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이 자신을 부르신다고 느끼십니까? 주님은 엘리뜨,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는 상위층이나 특정인들을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지구상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쉼이 없습니다. 과학문명의 발달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압니다. 찰리 채플린은 이미 1937년에 《모던타임즈》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주인공은 컨베이어벨트에서 나사를 조이는 조임공입니다. 제대로 된 휴식이 없는 장기간의 노동과 과로는 신경쇠약을 가져왔고 주인공은 기계적 행동만 반복하는 삶에서 동그란 것만 보면 나사처럼 조이려고 하는 편집증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소위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현대인의 삶을 풍자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에게서 안식을 빼앗아간 주범은 기계문명이 아닙니다. 안식이 없는 삶은 에덴 동산에서의 범죄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고 했던 그 때, 인간은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기계문명은 인간에게 잃어버린 안식을 가져다 줄 수도 없습니다.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부르셨던 때와 지금은 2000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 안식이 필요한 인생들입니다.
우리는 생산성과 성취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도 그런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거기서 얻는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연봉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가 나온 대학, 그가 하는 일, 그가 가진 직업으로 영혼의 가치가 평가 받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려서부터 쉼 없이 노력하고 부지런히 달려야 합니다. 인생의 사전에 안식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 주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안식을 잃어버린 세상에 안식을 주러 오신 것,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2. 오해된 안식 (출 5:5-9; 민 11:5; 신 8:11-14)
여러분은 우리 삶에 진짜 안식이 없다는 말에 동의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월터 브루거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로 살던 체제에서의 삶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광야길로 사흘쯤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해달라는 모세의 요구에 이렇게 답합니다.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출애굽기 5:5–9).”
바로의 체제는 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끊임 없이 점점 더 많은 생산량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시스템입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생산을 추구하는 노력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기쁨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바로의 혹독하고 몰인정한 체제는 곧 죽음의 시스템이 됩니다. 바로의 시스템에서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연로한 부모나 약한 이웃들은 무가치한 존재들로 전락합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생산성이고, 여기에 부모 공경과 이웃 존중은 없습니다. 5계명 위반입니다. 이 체제에서 모든 이웃은 경쟁 상대일 뿐이므로 이웃을 죽이는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게 됩니다. 6계명 위반입니다. 사랑과 결혼을 전제로 한 성적 관계는 팔고 사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사람은 비인격화됩니다. 7계명 위반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힘으로 그것을 빼앗을 수 밖에 없습니다. 8계명 위반입니다.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고 탐욕에 헌신하게 됩니다. 9,10계명 위반입니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기 위해 분주함과 탐욕을 부추기는 세상, 이것이 바로의 체제, 죽음의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이런 무거운 짐 아래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십니다. 당시 주님이 언급하신 ‘무거운 짐’은 로마제국이 지운 무거운 형벌과 자신들의 군사적 확장을 위해 끝없이 부과하는 혹독한 과세를 가리킬 뿐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지나치게 적용하여 백성의 삶을 얽어 매어 무한 충성을 요구하는 유대교의 율법주의 시스템을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런 바로의 시스템에도 휴가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휴가로서의 안식은 그저 노동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좀 쉬고 나면 일을 더 잘 할 수 있고 더 많은 생산량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안식의 본질이 아닙니다. 안식은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거나 다음의 노동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짐을 지는 짐승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눈치 보지 않고 원 없이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성경적 안식에 대한 오해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일은 천지 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차원의 안식에 너무 무지합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노동으로부터 잠시 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 때, 그것이 안식이요 쉼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렇게 노동과 거짓 안식의 쳇바퀴 속에서 “이만 하면, 살 만한 세상이야”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합니다. 바로의 체제에는 기만적 요소가 언제나 존재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수기 11:5).”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과연 ‘값없이’ 그런 것들을 먹었습니까? 그들은 노예노동을 통해 간신히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 삶에서 고난이 깊어질 때, 과거를 미화하는 기만적 요소가 작동하지만, 번영의 상황에서도 기만은 작동합니다. 신명기 8:11-14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명기 8:11–14).” 하나님께서는 번영이 가져다 줄 영적 기억상실증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약속하심으로써 적당히 이 세상의 기만에 마음을 빼앗긴 우리를 깨우십니다.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프쉬케(ψυχή)’인데 ‘목숨, 영혼, 생명’이란 뜻입니다. 주님이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신 것은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의 쉼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의 쉼’은 세상이 주는 쉼, 바로의 체제에서 우리가 누리는 쉼과는 다른 차원의 쉼입니다. 그 안식은 바로의 체제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안식이고,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안식입니다. 주님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전인적인 완전한 안식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안식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3. 영원한 언약의 표징, 안식 (출 31:12-17)
다시 잠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보지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실 때 매우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12-17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출애굽기 31:12–17).”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영원한 언약의 영원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임을 보여주는 표이고, 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애굽에 살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온 백성에게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너희와 나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실 뿐 아니라,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존재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끝없는 생산에 종사하라고 보냄 받은 일용품이나 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용도로 사용되는 짐승이 아니며, 중앙통제 경제에 복종하는 도구가 아니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것처럼,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쉴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쉬심으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전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중독자가 아니시며, 피조물의 행복이 끝없는 일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더 이상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을 때, 우리는 일하는 동물로 창조된 게 아니라 참된 안식을 누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안식을 잃어버렸고 예수님께서는 그 잃어버린 안식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안식 (마 23:4; 5:20; 요 8:32)
그렇다면, 주님이 약속하시는 안식의 성질을 좀더 살펴보지요.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는 기본적으로 압제자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바로잡아야 할 중요한 오해는 주님이 약속하신 안식은 멍에를 벗어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짐을 벗겨준다거나 모든 짐으로부터 해방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멍에는 보통 소 두 마리가 한 조로 묶어 함께 일하게 하는 장치인데, 여기서 주님은 그런 멍에가 아니라 사람이 무거운 짐을 쉽게 들고 가도록 혼자 메는 멍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 멍에’는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게 해주는 멍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멍에는 친절하고 쉬운 멍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본래 여기 사용된 ‘짐’이라는 단어는 무겁다는 뉘앙스를 가지는 단어인데, 주님은 당신의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마도 백성들에게 무거운 유대 전통과 율법주의의 짐을 지우는 긍휼함 없는 무자비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의식하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마태복음 23:4)”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내 멍에는 쉽다고 하실 때, ‘쉽다’는 말은 ‘부드럽다, 좋다, 감미롭다, 도움이 된다, 친절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이런 성질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내 멍에(다스림)는 너를 기쁘게 할 거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멍에를 지는 이들을 최상의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안식, 마음이 쉼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을 조금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는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멍에를 메는 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성취해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멍에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게 아니라, 짐을 가볍게 해주는 새롭고 쉬운 멍에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당신께 오기를 주저하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하다는 말은 비천한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너희가 아무리 비천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내게 오면 내가 너희를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약한 사람도, 아무리 불쌍하고 비천한 사람도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할 사람은 없으니, 주저 말고 오라는 초청입니다.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배울 것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옥죄고 지치게 하는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리, 마음에 쉼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배우는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항상 해야 하는 일은 배우는 일입니다. 진리를 알 때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요 8:32).


5. 교훈과 적용: 그치라 (창 2:3)
그렇다면 주님의 이 초청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이 초청에 응답하는 첫번째 방식은 ‘그치는 것’입니다. 창세기 2:3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세기 2:3).” 여기서 ‘안식하셨다’는 히브리 단어는 ‘그치다, 멈추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첫번째 길은, 멈추고 그치는 것입니다. 무엇을 멈추고 그쳐야 합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쳐야 합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였을 때 품었던 생각이고 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속에, 자신의 계획 속에 넣으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이 생각과 노력 속에서 신이 되려는 인간에게는 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운다는 것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삶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친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우리 자신의 노력을 내려놓고 그쳐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의 체제 속에서 쉼 없이 일하며 살아갑니다. 일을 멈추는 순간, 경쟁에서 밀려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무자비한 세상에서 쉼 없이 일하는 인간에게 과연 피할 길이 있습니까? 죽음 외에 대안이 있습니까?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은 내게로 오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갈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약속대로, 여러분의 마음은 쉼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심오한 차원의 안식입니다. 안식을 누림으로써 여러분은 바로의 체제, 죽음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일에 예배당에 나오는 일은 더 이상 무미건조한 타성에 젖어서 하는 행동이 될 수 없고, 율법주의적인 짐이거나 그저 공허한 의식이 아니라, 기쁨의 습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리게 될 안식을 모든 안식일마다 미리 맛보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무기력함에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약속하신 쉼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달콤한 약속은 결코 이런 안식을 줄 수도 보장하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자애롭고 은혜로운 약속을 들으십시오.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나와 마음이 누리는 안식을 경험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