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 - (3). 복음적 부부의 길

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 - (3). 복음적 부부의 길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 - (3). 복음적 부부의 길

에베소서 5:21-33, 창세기 2:24-25, 빌립보서 2:6-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6-26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복음 위에 세워지는 가정] 시리즈의 세번째 말씀으로 ‘복음적 부부의 길’이라는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무너진 현실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1년도에는 21만 건의 결혼이 있었고 이혼은 10만 6천 건이었고, 2022년도에는 결혼이 19만 건, 이혼이 10만 건이 넘습니다. 두 해 동안 이혼은 결혼 건수의 거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이혼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혼이 삶과 가슴에 남기는 상처가 유난히 크지만, 이것도 복음 안에서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입을 수 있고 입어야 합니다. 또한 형제들이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품는 것은 마땅합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나라의 가정 현실은 어둡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두운 세상 앞에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가정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적 부부의 길’에 대한 주의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감화를 주시고, 우리 교회의 부부들이 치유와 회복, 그리고 성화의 은혜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간구합니다.


1.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 관계가 망가졌다. (창 2:25; 3:7,16b)
결혼은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제도가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드신 제도입니다. 창세기 2:25에서 최초의 부부가 서로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부끄러움, 곧 수치심은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감각인데, 범죄하기 전의 부부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서 성경은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범죄가 부부관계와 모든 인간 관계에 초래한 비참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려는 의도 같습니다. 범죄는 수치심을 가져왔고 이것은 제일 먼저 부부 사이에서 나타났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자 마자, 눈이 밝아져서 가장 먼저 안 것은 자기들이 벗었다는 사실이었고 그것은 수치심이었습니다. 그 수치심은 서로의 벽을 만들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b).”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려고 함으로써 결혼 관계는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죄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 관계를 망가뜨린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결혼 관계는 경험이 아니라 성경에서 배운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부부는 예외 없이 망가진 결혼 생활로부터 시작하는 까닭에,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결혼 관계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보지 못하고 기대 조차 하지 못함으로써, 결혼 관계는 쓰디 쓴 아픔을 쌓아 가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할지라도 일정한 인간적 성숙함을 통해 결혼 생활의 즐거움을 제한적으로 누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 덕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부모를 봄으로써 결혼 관계를 보고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의 결혼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결혼은 적어도. 두 가지 전제를 가집니다. 첫째는 사귐과 연합이고 둘째는 언약입니다.

A. 사귐과 연합 (창 2:24-25)
먼저 사귐과 연합을 생각해 보지요. 성경은 하나님이 삼위로 계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삼위로 계시며 그 완전한 사귐과 연합 속에서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로 존재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완전한 사귐과 연합을 통해 흘러 넘치는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주시려고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인간을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처럼 공동체로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그 최초의 공동체는 결혼 관계 안에서 맺어진 부부였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고 한 것은 결혼 안에서 부부가 가지는 연합을 보여줍니다. 이 연합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연합이고 결속입니다. 이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는 말씀은 그 공동체의 본질과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부끄러움—수치심은 범죄한 후에 들어온 감정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 부정적 감정을 통해서 표현했을까요? 우리는 보통 수치심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통해서 관계를 이해합니다. 수치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죄인은 없으니까요. 수치심이 없을 때, 사귐과 연합은 얼마나 놀라운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주는 것이 될까요? 그렇다고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삼위 하나님께서 누리셨던 그 기쁨과 같은 기쁨을 그들은 누렸을 것입니다. 물론 부부 싸움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범죄 후에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 후에, 아내를 비난하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아담을 보는데, 이것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남자들이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못된 본성입니다. 어쨌던 우리는 여기서 결혼 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봅니다. 그것은 사귐과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B. 언약 (계 21:7; 렘 31:33; 눅 22:20; 마 19:6; 출 20:14)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결혼 관계는 언약이라는 본질을 전제로 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언약 개념을 통해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것만큼 우리를 안심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감정적이시며 일관성 없는 변덕스러운 분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지금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를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행복감과 안정감을 주기 보다 불안감을 더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신실하심을 말하고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그것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비교적 친숙한 헤세드(חֶסֶד)라는 히브리어는 언약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적이기만 하지 않고, 변함이 없고 영원한 언약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혹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는 표현으로 반복하고 반복하여 그 언약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죽음이 피로써 맺는 언약이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피로써 은혜 언약을 인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결혼 관계가 언약을 전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결혼 주례사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고 하심으로써, 이 관계가 언약적 관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제칠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출 20:14) 결혼 관계의 언약적 성격을 전제한 명령입니다. 여기서 간음은 기혼자가 저지르는 혼외 관계인 간통과 불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간음은 결혼 언약을 깨뜨리는 죄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구속 받은 백성의 관계, 또는 그리스도와 그 신부인 교회의 관계가 결혼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가르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헤세드를 거두지 않으시듯이, 네 배우자(남편/아내)를 향한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언약은 우리가 사회에서 맺는 계약(contract)과 다릅니다. 계약은 갑과 을 양쪽이 맺는 조건적인 약속이기에, 계약 당사자 중 한 쪽이 계약을 위반하면 상대방도 그 계약을 지킬 의무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결혼 언약은 그런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불성실한 위반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고야 마십니다. 그것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본래의 결혼 관계는 바로 이 헤세드를 반영하는 언약입니다.


3. 망가진 결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엡 5:21-33)
결혼에 대한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현실과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결혼 생활을 개선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의 갭에는 망가진 결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본문은 아내와 남편에게 주시는 권면이지만, 한 비밀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결혼 안에서 부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유비라는 사실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구속 받은 결혼 안에서 부부 관계를 복원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피차에 복종하라는 이 말씀이 22-33절에 어떻게 연결될까요? 물론 이어지는 말씀에서 남편이나 아버지나 주인이 아내와 자녀와 종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하지만 21절 이하에 이어지는 말씀은 서로를 향한 존경과 상대를 향한 사랑에 근거한 복종을 전제하라는 말씀입니다. 범죄한 뒤에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말씀하셨듯이, 죄인인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려고 하겠지만 구속 받은 남편은 복종이라고 표현할 만큼 아내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전제를 잊지 마십시오.

A. 아내들이여! 그리스도처럼 복종하라. (엡 5:22; 고전 11:3; 갈 3:28; 빌 2:6-8)
먼저 사도는 아내들에게 말하는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엡 5:22). 요즘 같은 시대에 돌 맞을 소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말씀은 특정 시대에만 유효한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듯이, 아내는 머리인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그 근거를 밝힙니다. 이 말씀은 남자가 여자 보다 우월하거나 존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머리’라는 표현은 질서를 의미합니다. 성부 하나님 그리스도의 머리라고 할 때, 이는 삼위 하나님의 신성과 권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말씀하는 것이듯, 남편과 아내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요 동등합니다(갈 3:28). 그렇다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심 같이, 자원하는 복종이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복종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순종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B. 남편들이여!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라. (엡 5:25-28)
이어서 사도는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여기서도 기준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 같이 그 정도로 죽기까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의 죄를 씻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내를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죽기까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남편의 소명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28절은 말씀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듯이 남편과 아내도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점에서 어떤 남편도 충분히 아내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기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C. 은혜를 경험하는 부부 (고전 7:29-31; 벧전 3:1)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은혜가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신자들은 은혜에 이끌려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자기 생명을 주어 아내를 사랑하는 삶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고 사랑입니다. 은혜는 자신의 자격 없음을 알게 하고 과분함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때,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복종과 사랑을 할 힘을 얻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채워 주셔야 할 기쁨과 행복을 남편이나 아내에게서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얻으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신할 대상을 구하는 이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어떤 남편도, 그리고 어떤 아내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부부들은 이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린도전서 7:29–31).”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결혼 관계 안에 주신 은혜를 누리십시오.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한 사람만이 자기 배우자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능력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까요? 남편들은 자신의 관심사, 취미, 모든 것을 주장하는 대신 아내의 기쁨을 우선시하고 자기 생명과 시간과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경험하는 남편들은 단지 돈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감정과 정서에 무관심하지 않고 아내의 내면과 소통하려고 마음을 다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사는 남편들은 아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거룩한 아내가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엎드리는 경건한 남편들이 됩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그러셨듯이,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합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누리는 아내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남편에게 복종합니다. 죄가 아니라면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며 그를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이런 아내들로 말미암아, 불신 남편들이 주님께로 돌아온 사례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인 아내들로 하여금 인내함로써 남편들에게 복종하게 하였고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해준 것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 이런 순종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이 명령과 조건들이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상대를 공격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오용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죄가 지배하는 부부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기를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남편은 지배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신 결혼 관계를 누리게 합니다.
정리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단순히 그때 그때의 감정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부는 결혼 언약을 인내와 신실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21절에 이른대로, 주안에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남편과 아내가 늘 은혜 받는 삶 가운데 살아가며 영적 성숙을 향해 가는 만큼, 이 모든 일은 더 수월하게 경험될 것입니다.


4. 복음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결혼 관계
이제 남은 것은 그 열매입니다. 성경적 부부 관계는 일차적으로 자녀들에게, 그 다음에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음과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됩니다. 완벽한 부모도, 부부도 없지만,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가 맺는 관계 속에서 복음을 보고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장래에 이룰 가정과 부부 관계에 선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결혼 관계에서 주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미치는 선한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가까운 친지와 이웃, 그리고 주변 세계에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선하고 힘있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부부 관계를 통해 주의 은혜와 행복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에 선한 증거가 되어야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이 결혼의 정의가 무너지고 결혼과 가정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부부가 가지는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기 위해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적 부부가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순적하게 가기 위하여, 여러분의 눈을 그리스도께 고정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고 주목하고 묵상함으로써,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혹은 허락하실 결혼 관계를 감사와 기쁨으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