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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0). 완성된 에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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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0). 완성된 에덴

요한계시록 22:1-5, 요한일서 3:2-3, 창세기 2, 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7-25

말씀내용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 22:1-5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21장 전체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지나면,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인 22:6-21이 남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결론부가 새 하늘과 새 땅—새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성경이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아담과 그의 신부 하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은 창조와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요한계시록 21-22장은 새 창조와 완성된 에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곧 에덴 동산의 완성이라는 점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은 시작한 곳에서 끝나는 셈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은 1500년에 걸쳐 4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는데, 마치 탁월한 한 사람의 작가에 의해서 쓰여진 한 권의 책 보다 더 놀라운 통일성과 완결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오류가 없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1. 생명수의 강(1-2a; 창 2:10-14; 겔 47:9; 슥 14:8; 요 4:10-14; 7:37-38)
우리는 앞에서 요한이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고, 성전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었으며, 밤이 없었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성 내부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먼저 1-2절 상반절에서 생명수의 강을 묘사합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요한계시록 22:1-2a).”
창세기 2장은 에덴동산을 묘사할 때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갈래로 나뉜 강들을 언급합니다(창 2:10-14). 물은 종종 생명의 젖줄로 불립니다. 그래서 고대의 주요 도시들은 대개 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에덴에서 흘러나온 강은 동산을 적셨다고 되어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완성된 에덴에서 그 강은 생명수의 강으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이 강이 발원하는 곳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수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에스겔 47장을 떠올릴 것입니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강물이 흘러나와 그것이 미치는 곳마다 죽은 것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차고, 그 다음에 무릎과 허리에 그리고 헤엄쳐야 할 강이 됩니다. 그 강물은 미치자 죽은 사해가 살아나고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게 됩니다. 에스겔 47:9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에스겔 47:9).”
생명수의 강은 에스겔 선지자가 보고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외에 스가랴 선지자도 생명수의 강에 대한 예언을 하였지만(슥 14:8), 무엇보다 생명수의 강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 자신의 말씀들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약속하셨습니다(요 4:10-14). 또 초막절 큰 날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요 7:37-38). 주님의 이 약속이 완성된 에덴에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요한계시록 7:16-17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완성된 에덴은 오늘 본문에서 그 실체를 보여줍니다.
생명수의 강은 무엇보다 ‘수정 같이 맑습니다.’ 이미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와(4:6),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인 거룩한 성과(21:18) 그 성의 길을(21:21) 보았는데, 생명수의 강도 ‘수정 같이 맑습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맑음은 하나님의 순결하심, 거룩하심, 초월적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 강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얼마나 순결한지, 믿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그 은혜가 우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령 오늘날과 같이 하천의 오염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고 마실 수 있는 강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완전히 순수한 물입니다.
이 강의 원친이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강의 원천이 하나님 자신이시니, 이 물이 깨끗하고 맑아서 마시는 자마다 생명을 줄 것은 분명합니다. 2절에 보면, 이 강은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고 합니다. 길은 거룩한 성의 대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는 말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운데, 길을 따라 나란히 강이 흐른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수의 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는 성령을 주심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는 요한복음 7장의 주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해석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좀 더 폭넓게 설명합니다. “물 은유는 주로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나누는 영원한 교제의 삶을 표상한다…강이 길 가운데로 흐르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거룩한 성의 핵심 의미라는 점을 증명한다.”


2. 생명나무 (2; 창 3:22-24; 겔 47:12; 계 2:7)
이어서 요한은 생명나무를 소개합니다. 이 또한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던 생명나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소환합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창세기 3:22-24이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2–24).”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회복된 에덴, 완성된 에덴에서 우리는 다시 그 생명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생명수의 강과 마찬가지로 생명나무도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바 있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에스겔 47:12).” 요한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한 바와 같이 생명나무가 생명수의 강 좌우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기원하는 생명수의 강이 생명나무에 수분을 공급하여 자라게 한다는 것이고, 생명나무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명나무가 나무들(복수)이 아니라 단수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집합명사의 단수형으로, 강 좌우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많은 나무들을 가리키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는 하나의 거대한 뿌리에서 강 좌우로 쭉쭉 뻗어 자란 생명나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본 하나의 생명나무는 이제 강 주위의 많은 생명나무가 됨으로써, 완성된 에덴의 충만함과 풍성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 생명나무의 기능을 묘사합니다. 먼저,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는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완성된 에덴의 부족함이 없는 충만함과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자연은 때를 따라 결실을 내었지만, 거룩한 성 완성된 에덴에서는 결실의 계절이 따로 없고 언제나 모든 시간이 결실의 계절이 될 것입니다.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영원토록 충분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계 2:7), 여기서 우리는 그 성취를 봅니다. 짐승에게 굴복하여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승리한 성도들은 이 열매를 먹고 영생의 풍성함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만국을 치료하는 잎사귀입니다. 만국은 물론 구속 받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잎사귀가의 치료하는 기능은 천국에서도 치료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은 육체적 치료와 영적 치료가 완성된 곳임을 암시하고 내세의 무한한 영광을 현세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상징합니다. 브라어인 탭(Brian J. Tabb)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영생을 상징한다.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날 때 영생을 상실했으나(창 2:9; 3:22-24) 새 창조에서 다시 회복한다(22:2).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배제되고 접근을 차단당했던 길이 이제 의인이 들어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열린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붙잡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성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종말론적 기업을 상징한다(22:14,19).”


3. 완성된 에덴의 제사장과 왕들 (3,4a; 갈 3:13; 계 1:1; 창 2:15; 출 28:36-38; 창 1:26,28; 민 6:25-27)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에 이어 요한이 완성된 에덴에서 세번째로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받은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그 성에 다시는 저주가 없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총 1189장인데, 저주와 저주의 영향력이 없는 장은 네 장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인 창세기 1-2장과 모든 저주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된 후의 요한계시록 21-22장입니다. 하지만 저주가 제거되는 결정적 사건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으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이제 십자가의 구속이 완전히 성취된 것을 우리는 본문에서 봅니다. 저주가 사라지고 난 후에 요한이 본 것은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자기 백성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심으로써 그 성이 성도들에게 모든 것—영생, 충분한 양식, 완전한 치료, 절대적인 안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구속 받은 성도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종은 요한 같은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1:1을 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요한계시록 1:1).” 요한은 성도들을 자기와 동등한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점을 보면, 오늘날 목사를 지나치게 특별한 종으로 구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직분을 맡은 자로서 크게 존경할 수 있을 뿐입니다(딤전 5:17).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는 말씀은 구속 받은 백성이 완성된 에덴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암시합니다. ‘섬기며’라는 말은 구약 제사에서 제사장에 의해서 행해지는 섬김과 경배를 의미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헬라어이지만, 구약적 배경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었습니다(창 2:15). 여기 ‘경작하고 지킨다’고 두 단어가 결합되어 사용될 때,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할 이스라엘의 책임 혹은 성막에서 봉사하고 성막을 지키는 제사장의 직무를 가리켰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은 하나님의 최초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에덴 동산을 섬기고 지킨 첫번째 제사장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뱀이 들어와 자신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는 일로부터 에덴 동산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서 실패했고 그 결과 동산—성전을 지키는 제사장의 직무를 박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4절 하반절에서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는 말씀도 대제사장의 이마에 쓰던 순금패를 생각하게 합니다(출 28:36-38). 그 금패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메레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이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기는 자들의 이마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말이고 즉, 그들이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성별됨으로써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거룩한 특권이 모든 주의 백성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은 완성된 에덴에서 성도들이 제사장 뿐 아니라, 또한 왕으로 통치할 것을 말씀합니다. 왕노릇은 천년이라는 한정된 기간의 왕노릇이 아닙니다. 세세토록, 영원히 왕으로 통치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였듯이(창 1:26,28), 이제 구속 받은 성도들은 완성된 에덴에서 모든 새 피조물들에 대하여 영원한 왕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5절은 다시 밤이 없으며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다는 사실을 21:25에 이어 강조합니다.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수기 6:25–27).” 옛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었겠지만,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성도들의 영생과 왕노릇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4. 지복직관(至福直觀, 4a; 출 33:18-23; 요 1:18; 시 11:7; 17:15; 27:4; 42:1-2; 고후 3:18; 요일 3:2-3)
끝으로 우리는 완성된 에덴에서 경험하게 될 최고의 복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요한은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말합니다(4a). 구속 받은 성도들은 완성된 에덴에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소위 지복직관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무엇을 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찾아 부르실 때, 아담은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전과 같이 뵈올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잃어버린 최고의 저주이고 비참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시며 등만 보여주겠다고 하셨습니다(출 33:18-23).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 모세라도(신 34:10)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 그러나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완성된 에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이것과도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지복(至福), 즉 더한 행복이 없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필립 휴즈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모든 복의 정상이며 총체이다.” 그러니 이 복의 크기를 어떻게 말로 다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비록 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할지라도,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다니요?
참된 성도들의 소망은 언제나 주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었음을 시편의 고백들이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편 1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17:15).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편 42:1–2).”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은 구약 성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성도가 가진 가장 큰 소망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생후 6주 때 의료사고로 실명을 하고 94세로 임종하기까지 시각장애인으로 살며 수많은 찬송시를 썼던 패니 크로스비는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 생전에 눈을 떠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제일 먼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얼굴이 나의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우리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을 볼 때, 우리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한1서 3:2–3).”


5. 교훈과 적용
말씀을 맺으면서 두 가지 교훈과 적용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 요한일서의 이 말씀처럼 여러분도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보고싶은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고 영화로운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의 은혜를 받은 모든 성도가 가지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있을 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할 힘을 얻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 형편없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너무나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완성된 에덴에서 지복직관을 누릴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그날 거기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소망을 품고, 이 소망이 여러분의 어떤 소원보다 더 강렬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러게 되기 위해,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둘째 교훈입니다. 성도는 종말론적 안목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저주를 정복하심으로 에덴을 완성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최초의 에덴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에덴 동산을 통해 의도하셨던 영광, 완성된 에덴으로 나아가가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에덴동산에 한정되었던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비치는 하나님의 빛으로 온 세상을 밝히고 새 하늘과 새 땅 전부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곧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따라(행 1:8)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던 선교사와 교회들은 자신들의 수고와 섬김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며 너무나 영광스러운 감격으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날에 영광스럽고 즐거울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1세기 말, 믿음과 복음 증거로 끔찍한 박해를 직면하고 살아야 했던 성도들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비전을 보면서, 얼마나 큰 힘을 얻었을까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소망을 가지고 그들은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었고, 갖은 박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등지거나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힘이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이 말씀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복음의 증인된 신자로, 교회로 살아가십시오. 머잖아 완성된 에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지복직관의 행복을 소망하며, 우리의 눈물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영광스럽게 그리고 즐거이 보며 감격할 날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안목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