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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3). 주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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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3). 주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시편 83:1-18, 역대하 20:1-30, 창세기 3: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7-07

말씀내용
83편은 시편에 있는 총 열두 편의 아삽의 시 가운데 마지막 시편입니다. 아삽의 시는 50편을 제외하면, 열한 편의 시가 모두 제3권에 위치해있습니다. 아삽의 시들은 대개 믿음이 흔들리는 좌절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옮겨가는 시인의 경험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신자가 자신의 좌절의 상황에서 주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대하 20:12,15,17)
83편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쓰여진 국가적 탄식의 시입니다. 나라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상황을 생생하게 살려본다면, 오늘 설교의 제목은 ‘주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라기 보다, ‘주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서’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악한 세력들에게 포위되어 있고 그들은 큰 소리로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며 떠듭니다. 주변에 10개나 되는 나라들이 동맹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렇게 대대적으로 주변의 국가들이 모두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사건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접한 사건을 찾아본다면, 유다 왕 여호사밧 때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남왕국 유다를 침략했던 사건일 것입니다(대하 20).
경건한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기도하면서 온 나라에 금식을 선포합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때에 온 백성이 왕의 명령에 따라 금식하며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역대하 20:12).”
이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의 내용입니다. 유다의 어른들만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이때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그는 승리를 예언하게 됩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역대하 20:15,17).”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치러 온 자들이 서로 싸워 죽이게 하심으로써 유다에게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어떤 학자는 야하시엘이 바로 이 시편을 쓴 아삽 자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별별 일을 다 만납니다.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앞에 있는 우리는 너무나 무력하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개인적인 차원보다 공동체적 차원의 위기에 더 가까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2. 구조
물론 역대하 20장의 상황이 정확하게 이 시편이 쓰여진 상황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지만, 이런 배경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읽어간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83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8절은 탄식과 고발입니다. 지금 ‘주의 백성’이 강대하고 기고만장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9-18절은 간구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 같은 승리들을 회상하면서(9-12), 대적들에게 패배와 수치를 안겨주시기를 간구합니다(13-15). 그리고 하나님의 승리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구함으로써(16-18) 이 시편은 마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침묵 (1)
먼저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쉽지 않은 상황을 만납니다. 시인은 3중적 호소로 하나님께 한 가지를 간구합니다. “침묵하지 마소서! 잠잠하지 마소서! 조용하지 마소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지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어떤 행위도 하지 않으신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시인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만 발하시면, 우리를 둘러싼 원수들은 한 순간은 패망하여 물러갈 것입니다.”하는 믿음이 시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2절은 ‘주의 원수들은 떠들며’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잠잠하심은 떠들고 소란한 원수들의 태도와 대조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끼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부터 임재를 거두셨거나 멀리 계셔서 도울 수 없으시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느낌을 아십니까? 나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고 하나님께 간절히 도우심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는 것 같지 않고 아무 응답도 주시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 말씀을 개인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국가적 탄식의 시이기에, 우리가 이 말씀을 공동체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이런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우심을 지연하실 때에는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속히 행하실 것을 간구하도록 허락하시는데 이 때 인내함으로 기다리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우리의 의무이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인내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권면입니다.


4. 우리를 보옵소서 (2-8; 삿 8:28; 창 3:15; 눅 23:12; 시 2:2-3)
2-8절은 한 마디로 ‘우리를 보옵소서’라는 탄식의 기도입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원수들의 거만함과 궤계를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 것은, 시인이 원수들을 묘사할 때, 그리고 자신들을 언급할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2절에서 ‘주의 원수들,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 자신들을 가리켜 ‘주의 백성, 주께서 숨기신 자’라고 말합니다. 4절에서 시인은, 지금 자신들을 대적하고 있는 원수들을 가리켜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표현들은 기도하는 시인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일이 단순히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원수들의 미움을 사고 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수들은 비록 자기들을 공격하고 있지만,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한 절씩 살펴보지요. 2절은 한글개역개정역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보소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께 고하려고 하는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라고 합니다. 떠든다는 말은 바다가 뿜어내는 거품처럼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자신감이 충만하여 떠듭니다. 그리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라고 하는데, 머리를 든다는 말은 승리를 자신하면서 적의와 확신을 표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다음의 표현을 보면 이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사사기 8:28).”
3-4절에서 시인은 대적들의 음모와 궤계를 고발합니다.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시편 83:3–4).”
그들이 치려고 하는 대상은 ‘주의 백성’이고 ‘주께서 숨기신 자’입니다. 시인은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을 이렇게 부르는데, 이것은 ‘주께서 보호하신 자들(LEB)’ 또는 ‘주의 보배로운 자들(ESV)’이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주님께서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우리를 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원수들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 두 나라도 아니고 여러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이런 정도의 적대감을 가진다는 것은 창세기 3:15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에 이런 적대감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지속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 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은 사실 모든 시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삶으로 확장됩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 존재하고 살아가는 교회는 세상이 우리에게 좋은 태도를 보여준다고 해서 “세상이 변했구나”하고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은 기회가 되면 교회를 무너뜨려 멸하고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30여년 정도를 지내면서 유럽과 미국 그리고 온 세상과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뜨거운 이슈들의 중심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대중의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편향된 언론과 비뚤어진 정치인들을 통해서 이런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313년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10년 전, 303년 2월 23일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제거하라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교회들이 불탔고 성경과 기독교 문서들은 재가 되고 말았으며 로마 제국 전역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문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디오클레시안 황제가 하려고 했던 일은 기독교의 흔적을 제국의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4절에서 원수들이 하려고 했던 바로 그 일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멸절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무위로 돌리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창세기 3:15의 맥락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이 일을 홀로 행하지 않고 함께 행합니다. 5절입니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시편 83:5).”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언약을 맺었다는 말입니다. 이 동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험한 동맹 언약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동맹을 맺습니다. 동맹이 언제나 한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모두 실리를 챙기기 위해서 동맹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동맹은 한 마음으로 하는 동맹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모두 이해관계가 똑같을 수만은 없는 나라들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주를 대적하는 일에서는 완전히 한 마음이 됩니다. 유다의 제사장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손을 잡았고, 원수였던 헤롯과 빌라도가 그날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눅 23:12; 행 4:27)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시편에 말씀한대로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편 2:2–3).”
어떤 나라들이 동맹의 언약을 맺었습니까? 6-8절에는 열 나라의 목록이 나옵니다. 에돔과 이스마엘은 선택받지 못한 형제들의 후손입니다. 에돔은 늘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이스마엘도 이스라엘을 향해 지속적으로 반감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의 어머니와 연결이 될텐데 길르앗 동쪽에 살던 유목민들입니다(대상 5:10, 19-20).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딸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들의 후손입니다. 이들 또한 이스라엘에게는 지속적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치려는 동맹군의 주도적 세력이 바로 모암과 암몬이었다면, 이 시편과 역대하 20장의 사건과의 관련성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발은 사해 남쪽 지역으로 보이고, 이외 아말렉과 블레셋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원수들이었고, 두로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우상숭배를 퍼뜨린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8절은 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롯 자손이 모암과 암몬인데, 앗수르가 이들을 도왔다는 것은 앗수르가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주전 8세기 이전에 모암-암몬 연합군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인은 국가적으로 당면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께 ‘보소서’라고 아뢰고 고발하는 것입니다(2).


5. 과거의 승리들을 회상함 (9-12; 삿 4-8; 마 16:18; 요 19:27-29; 고전 3:17)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9-12절은 과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승리한 사건들을 회상하면서 오늘도 그렇게 해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9)’ 그리고 ‘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11)’는기드온이 미디안에게 거둔 승리를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이 300명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십 이만 명의 미디안군대를 쳐서 이기고, 그 방백들인 오렙과 스엡, 그리고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를 잡아 죽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삿 6-8). 시인이 회상하는 두번째 승리의 사건은 사사 드보라와 함께 바락이 하솔 왕 야빈과 군대장관 시스라에 대하여 거둔 승리입니다(삿 4-5). 10절의 ‘엔돌’은 사사기 4-5장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드보라와 바락이 승리를 거둔 지역일 것입니다. 하솔의 군대는 패망하고 매장되지 못하여 땅의 거름 같이 되었습니다. 매장되지 못했다는 것은 패망 보다도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패망하게 한 자들과 같이 이 원수들에게 행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12).” 그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영토를 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의 (소유된) 목장’을 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교회(마 16:18),’ ‘내 양(요 10:27-29)’이라고 하셨고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고전 3:17)’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치려는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 할 중요한 이유가 발생한 것입니다.


6. 검불 같게 하소서 (13-15)
시인은 구체적으로 구합니다.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13)”라고 말입니다. 검불은 회전초(回轉草, tumbleweed)라는 식물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뿌리에서 분리되어 바람에 굴러다니는 식물의 지상 부분으로, 하나의 종이 아닌 여러 식물군을 포함하고 있으며 일부 종은 뿌리가 없이도 살아서 식물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스텝 기후나 사막 기후 지역에서 둥근 실 뭉치 같은 것들이 바람에 날려 굴러다니는 모습으로 확인이 된다고 합니다.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바,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시편 83:14–15).”라는 기도는 원수들이 자신들에게 이루고 싶었던 일을 그대로 당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7. 마지막 소망(16-18; 마 6:9)
16-18절은 시인의 마지막 소망을 잘 보여줍니다. 16절이 17-18절에서 확대 진술되는 구조입니다. 16절에서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라는 기도는 17절에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라는 말로 확대되고, 다시 16절 하반절에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18절에서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로 확대 진술됩니다.
첫째는 원수들이 수치를 당하고 패망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수치는 기고만장하던 자들이 당하게 될 부끄러움입니다. 그들은 실패하여 불명예를 안고 망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교만과 확신은 놀람으로써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뀔 것입니다. 두번째는, 원수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회심을 위한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철장으로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이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끝에서 강조하는 것이 자기들의 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에 관심을 가집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구하는 것입니다(마 6:9). 시인의 궁극적 소원은 악인들의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과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자신의 처지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순간에 자기 자존심과 명예와 손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8. 교훈과 적용 (슥 2:8; 창 12:1-3; 시 3:6; 롬 8:31; 마 27:46; 막 15:34)
우리는 이 시편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얻습니다. 첫째로, 시대는 바뀌어도 상황은 동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편의 상황은 아주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원수들은 언제나 교회를 무너뜨리고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합니다. 죠지 혼(George Horne)의 말대로입니다. “막과 장은 바뀌어도, 무대와 드라마는 동일한 것을 연출하고 있다.” 세상이 교회에게 나이스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알아야할 것은, 원수들의 공격이 단순히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스가랴 2:8b).”고 하신 말씀을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우리는 이 시인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창 12:1-3). 그리고 우리도 다윗과 바울 사도와 같이 외칠 수 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편 3:6).”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로마서 8:31).”
둘째로, 원수들이 강하고 그들이 우리를 둘러쌀 때에, 무력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때 우리는 시인이 하듯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여호사밧과 유다의 백성들이 했듯이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온 천하를 다스리시는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아뢸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정치인이며 작가이기도 했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말입니다. “악이 승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All that is necessary for evil to triumph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해야할 또 하나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여 소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역사하셨던 그 일들을 떠올리고 그 승리를 다시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제임스 보이스가 시편 83편 설교를 마친 방식으로 이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기도에 대한 사상 최고의 하나님의 침묵을 상기함으로써 설교를 마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삽(혹은 아삽의 자손)에 의해서, 1절의 기도가 드려진 후 수 세기가 흘러서,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를 비난하는 잔인한 대적들이 그를 둘러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드리셨던 기도는 어떤 면에서 바로 이 1절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적들로부터 예수님을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그를 건져 주시기 위해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외로운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얻었고, 우리는 심판 만이 아니라 또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는 선한 일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