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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6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9) - 신자의 사회생활 : 그리스도인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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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6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9) - 신자의 사회생활 : 그리스도인과 일

골로새서 3:22-4:1, 창세기 2:5,15, 창세기 3:16-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4-28

말씀내용
인간의 삶에 일처럼 묘한 게 있을까 싶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 때문에 힘들어하고,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일이 없어서 힘들어 합니다. 일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을 인생의 필요악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일 없는 세상에서 산다면 즐겁고 행복할까요? 혹시 일이 없으면 인생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요? 오늘도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자신과 싸우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일에 대한 관점, 일을 대하는 태도는 변하던가요? 아니면, 일과 신앙은 크게 연관성이 없는 것입니까? 사실, 우리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에 비하면, 우리는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 일에 대한 신학에 너무나 무지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취업을 준비하는 것과 주님을 모르는 불신자가 취업을 준비하는 것은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 또 직장생활을 하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관점, 태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크지도 않은 일정한 수입을 주는 것 외에 그다지 의미를 발견할 수 없어 보이는 직업에서도 신자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직접적으로 영적인 것과 연관된 직업을 선택해야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기준으로 영향력 있는 직업을 가지고 성취를 이룰 때,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일과 직업과 관련해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수 없이 많습니다.
여기서 제가 의미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교회 안에서 우리가 담당하는 일을 포함할 수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우리가 일반 나라의 시민으로서 세상을 살면서 감당하며 살아가는 일을 가리킵니다.


1. 일과 예배의 분리(창 2:5,15; 3:16, 17~19)
우리가 ‘일의 신학’—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의 창조기사로 거슬러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의 모습을 창세기 2:5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창 2:5).”
여기서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는데, ‘갈다, 경작하다’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바드’라고 발음하는데, 구약성경의 더 많은 곳에서는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일하는 것이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배와 일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15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에서 다시 한 번 ‘아바드’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그 다음에 ‘지키게 한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주로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제사장이 더러혀지지 않도록 성막을 지킨다고 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이 하나의 성전 개념으로 주어진 것이고 아담은 에덴의 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권력을 찬탈하여 에덴동산의 거룩함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 모든 피조물과 싸워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정복하고 다스리고 지켜내야 했습니다.
즉, 아담이 에덴에서 해야 하는 일 즉, 땅을 경작하고 에덴동산을 돌보는 일은 곧 예배 행위와 다르지 않았고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소위 우리가 구분하기 좋아하는 성속(聖俗)의 이원론적 구분이 여기에는 없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일과 관련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범죄한 아담은 이제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고는 일이 고통스러워졌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말씀이나 ‘얼굴에 땀이 흘러야’ 한다는 말씀은 일이 고통스러워졌다는 것을 부연합니다.
범죄한 뒤에 일과 관련하여 여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앞 부분이 일과 관련된 언급입니다. 여기서 ‘고통’, ‘수고’라는 단어는 임신과 출산에 연결되는데, 이것은 임신과 출산이 본래부터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노동, 일을 의미하는 labor와 travail이라는 단어는 둘 다 한편으로는 수고롭고 고된 일을 의미함과 동시에 분만, 산고, 진통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죄로 말미암아 임신/출산의 고통과 일의 고통이 더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앗아감으로써, 일을 고통스러운 것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일과 예배의 분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일은 사람에게 힘겨운 짐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조차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2. 비뚤어진 동기—돈벌이, 자기 실현, 성공의 수단
범죄한 후 일이 예배와 분리되자, 인간이 일을 보는 관점, 일을 대하는 태도, 일을 하려는 동기는 모두 비뚤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이 돈벌이나 성공의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조금 고상하게 표현하면 일은 자아 실현의 수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도 일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청년들에게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일을 합니까? 왜 취업을 원합니까? 혹시 취업을 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결혼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지기 때문입니까? 여러분은 그 이유가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취업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일을 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들은 현실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버거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라면,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많은 현대인은 직업적 성공을 통해 자존감과 자부심의 구원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직업적 성공, 높은 연봉이 곧 구원입니다. 세상은 직업, 직장, 연봉, 외적 성공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런 사회 현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게 만들었고, 결국 높은 연봉, 높은 포지션을 섬기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하는 인생들을 양산했습니다. 일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우상이 되고 말았고, 자기도 모르게 일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더 쉽게 벌어서 출세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인이 품을 수 있는 정상적 생각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하는 정상적 사고는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여러분, 우리 좀 더 정직해집시다. 여러분은 과연 이런 정상적 생각을 정상적으로 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일을 우상으로 섬기는 인생들의 사고에 매몰되어 살아가십니까?


3. 참된 동기의 회복—복음이 가져오는 변화
그렇다면 복음은 일에 대한 세상의 관점, 태도, 사고를 변화시키지 못합니까? 복음은 그저 죽으면 천국으로 보내주는 티켓에 불과한 것입니까? 복음은 그렇게 무력합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일에 대한 이전의 관점을 그대로 견지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A. 소명으로서의 일(골 3:22~4:1)
복음은 일을 다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할 뿐 아니라,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일이 가졌던 고유의 가치를 회복하게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타락 속에서 복음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삶의 모든 영역이 새로워졌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중세 시대에 거의 모든 영역에 드리워져 있던 성속(聖俗)의 이원화를 깨뜨리기 위해 싸웠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입니다. “비록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의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다.” 이것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가졌던 일에 대한 관점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칼빈도 동의하는 바,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직업을 소명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가 살며 일을 하는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업을 소명으로 보는 관점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직업 윤리의 전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종들에게 먼저 말합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2–24).”
1세기 로마제국 내의 종들은 서구 근대역사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로잡아서 팔며 발달한 노예제도의 노예와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고용계약을 맺고 종의 신분을 가진 노동자에 가까웠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일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람 앞에서 일을 하는 것이라면, 대충 눈가림을 하고 편안함을 추구하고 요령을 부리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어떤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한다면,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실 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단지 월급, 임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은, 단지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좀 더 생각해보지요. 우리가 단지 우리를 고용한 인간 보스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가져오게 될까요? 일단, 일을 하는 사람은 일종의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자유함은 사람(보스) 앞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방종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은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는 격이 아닌가 반문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의 은혜가 개입합니다. 복음 안에서 무한하고 불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고 그 사랑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임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그 사랑을 더 받기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섬기게 합니다. 복음은 직업과 일을 통한 자기 증명과 정체성 확인이라는 부담과 압력에서 우리를 자유 하게 해줍니다. 여기에는 자유함을 넘어 기쁨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신 것에 대한 감격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하던 일을 계속 할지라도, 내가 섬기는 대상은 이제 사람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시기에 그 의미와 내용은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돈벌이와 자기 증명의 수단인 직업과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의 상을 주께로부터 받을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이렇게 일을 하다 보면,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일의 귀천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자유와 힘을 얻게 됩니다. 종이 하는 일이나 주인이 하는 일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일에 대한 이런 관점은 우리를 더욱 존귀하게 하고 고상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돈과 권력과 성공의 수단으로 직업과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점차 짐승의 마음으로 변해가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세속적 직업관은 너무나 강해서 우리가 거기서 완전히 풀려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의 말입니다. “의사는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진료를 한다. 환자가 낫는 건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일 따름이다. 변호사 역시 정의를 실현하려는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활을 뒷받침하는 직업이 법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이 속박에서 자유 하게 하고 주님을 섬기게 합니다.

B. 이웃 사랑의 수단으로서의 일(엡 4:28; 마 25:26; 살전 5:14; 살후 3:10)
이 자유함은 하나님을 섬기게 할 뿐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일을 통하여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어줍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자, 또 하나의 부수적인 목표가 주어지게 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도둑질을 할지라도 자기를 위해서 살고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다른 직업관이고 일에 대한 관점인지 모릅니다.
사람을 섬기는 것은, 돈벌이의 수단으로서의 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된 사람이 가지게 되는 일에 대한 새로운 목표입니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이 벌어서 자신을 위해서 더 많이 쓰라고 부추깁니다. 여기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평균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벌어서 안락함을 누리자. 십일조는 정확하게 하나님께 드렸으니, 이제 나는 누리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수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목표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직업과 일은 이웃 사랑의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더 풍족히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풍성하게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에서 게으름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태도를 성경은 책망합니다. 주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임금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을 향해 이렇게 책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 25:26).” 또 바울 사도는 게으른 자들을 권계(훈계)하라고 말씀합니다(살전 5:14). 심지어 바울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합니다(살후 3:10).
여기까지 말한 것은, 고스란히 고용주나 보스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들입니다. 본문 4:1에는,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의와 공평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기준입니다. 이런 기준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들도 자신들을 판단하실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 종들에게 적용되는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고용주든 고용인이든, 신자는 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일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일을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으로 보는데서 나아가, 일을 이웃사랑의 수단으로 보게 합니다. 신자들이 일을 이웃사랑의 수단으로 볼 때, 그 일에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 중 간과하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실히 일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게 하고, 기도하며 일하는 것은 중요합니다마는, 여기에는 탁월함이라는 덕목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일을 탁월하게 해내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우리의 일을 통해서 고통을 받게 되거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가령, 조립하는 가구를 구입했는데 구멍이 맞지 않는다면, 그것을 구입한 사람에게 불편과 좌절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성실하게 만들었는지, 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탁월함의 덕목은 분명히 결여되었고 이것은 모든 소비자를 좌절하게 할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 일을 위해서 우리의 직업이나 일에서의 탁월함의 기준을 타협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 일은 거룩하고 직장 일은 속되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섬기듯이 일을 한다면, 스스로 탁월함을 추구할 것입니다. 이점에서 신자들은 탁월한 실력을 위해 노력하면서, 지혜를 구하며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일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으로 보는 신자가 일에서 탁월함을 드러내야 할 정당한 이유입니다.


4. 적용적 교훈— 『니글의 이파리』 (고전 15:58)
혹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중에는, 뭐 대단한 직업,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직업도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어찌 보면 사소해보이기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나에게, 이 말씀은 좀 거창해 보인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지요? 평생 일을 해도, 아무 티도 나지 않을 일을 하는 내게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생각하십니까? 역사에 한 페이지를 기록할 만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평범히 살다 가는 거지, 내 직업과 일에 뭐 그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겠나 생각하십니까? 혹은 정말 의미 있고 대단한 일을 이루려고 하지만, 평생 해봐야 얼마나 하겠나 생각 하는 분이 계십니까? “결국은 다 없어져버리고 말텐데,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뭣하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반지의 제왕』을 쓴 J.R.R.톨킨이 쓴 단편, 『니글의 이파리』의 이야기입니다. (아쉽지만, 저는 직접 이 단편을 읽지 못했고 팀 켈러의 책 『일과 영성』에서 읽은 내용을 들려드립니다.) 톨킨은 이제껏 세상이 보지 못한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반지의 제왕』 집필을 준비하면서 소설의 저변을 형성할 고대의 가상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십년에 걸쳐 언어와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집 앞의 한 그루 나무에서 누군가가 가지란 가지는 다 잘라내 버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렇게 공들여 쓴 소설도 누군가 다 잘라버린다면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서, 하나의 단편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니글의 이파리』입니다.
니글(Niggle)은 “깨작거리거나 비능률적으로 일하거나 … 쓸데없이 시시콜콜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여기서는 톨킨 자신을 가리킵니다. 화가인 니글에게는 꼭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파리 하나에서 시작해서 나무 한 그루 전체의 이미지, 그리고 그 나무 뒤에 펼쳐진 멋진 세계를 그는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니글은 이 그림을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만큼 큰 캔버스를 준비했습니다. 언젠가 죽기 전에 이 그림만은 꼭 완성하고 싶었던 니글은, 화폭에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진척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니글이 나무 전체 보다 이파리 하나에 너무나 공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니글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니글은 이웃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너무나 자주 붓을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니글은 자기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한 이웃이 자기 아내가 아프니 비 내리는 차가운 밤거리를 달려 의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합니다. 결국 니글은 독감에 걸리고 고열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니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립니다. 불쌍한 니글은 엉엉 울며 소리칩니다. “아직 완성하지 못했단 말이예요!”
니글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의 세월이 흘러 니글의 집을 사들인 사람은 잔뜩 해어진 큰 캔버스를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이파리 하나만이 달랑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잎사귀: 니글 작(作)”이라는 이름이 붙어 마을 박물관, 사람들의 눈길조차 닿지 않는 후미진 구석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니글은 하늘나라 기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두 가지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월을 허송하고 평생 이뤄놓은 것이 없다고 꾸짖는 엄한 공의의 목소리가 하나이고, 또 하나의 목소리는 니글이 한 일을 잘 알고 있으며 그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쪽을 선택했으니 잘 했다고 말하는 자비의 목소리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의 가장자리에 거의 이르렀을 때, 니글은 상급처럼 보이는 뭔가를 보고 그곳으로 달려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니글이 평생 꿈꾸던 것이 서 있었습니다. 커다란 나무, 그가 그리고 싶었던 그 나무가 완성된 모습으로 서 있는 겁니다. 잎이 벌이지고 가지는 길게 자라서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니글은 천천히 팔을 들어 활짝 벌리고 말합니다. “이건 선물이야!”
죽기 전에 살았던 세상은 화가 니글을 잊었지만, 그리고 니글의 작품은 미완성인 채 사람들의 주목도 별로 끌지 못하고 있었지만, 영원하고 참된 이곳에서 니글은 놀랍게 완성된 자신의 나무가 더 이상 상상의 산물이 아닌 영원히 살아 즐길 수 있는 실재로 자기 앞에 선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톨킨의 단편 『니글의 이파리』의 줄거리입니다. 우리가 다 니글입니다. 뭔가 성취하려고 꿈꾸지만 이룰 힘이 없고 그러다가 인생을 마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잊혀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 영원한 실재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불현듯 죽음이라는 순간이 찾아올 때, 이파리 한 장 그리고 간다는 생각에, “아직 완성하지 못했단 말이예요!”라고 니글처럼 울부짖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로 그 일을 했다면, 그곳에서 완성된 ‘진짜 나무’가 서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한 수고는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할지라도 하나하나가 영원무궁한 가치를 가집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이만 하면, 우리는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온 마음을 쏟아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평생 이파리 하나 그렸다”고 말할지라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면서,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완성해주시는 ‘진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