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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0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3) - 두 언약, 두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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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0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3) - 두 언약, 두 나라

창세기 3:14-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1-25

말씀내용
두 언약, 두 나라 (창 3:14~19)

1. 두 나라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요 17:14~16)
우리는 지난 주일, [두 아담]이라는 주제로, 둘째 아담이요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첫째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을 온전하게 성취하셨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는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고, 특별히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신 명령에 순종하는 일에서도 실패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여 말하는 뱀의 존재를 하나님의 성소인 에덴에서 쫓아내기는 커녕, 그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제사장으로서나 왕으로서의 사명을 성취하는 일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진정한 사람인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첫 아담이 실패한 모든 일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둘째 아담은 택하신 백성을 대신하여, 죄의 결과로 주어진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받으셨고,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홀로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는데, 소위 문화명령으로 불리는 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경작하고 지키는 일에서도 둘째 아담은 완전하셨습니다. 둘째 아담은 이렇게 세상 만물을 정복하고 만물을 당신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습니다(엡 1:10, 20~22; 빌 2:9~11). 성도들의 구속을 포함한 이 모든 일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새창조를 이루시고, 그 영광 속으로 많은 아들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먼저 구원의 선구자로 들어가셨습니다(히 2:10).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앞서 들어가신 새창조의 영광에 들어간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데, 성도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담의 성취로 장차 올 세상에 대한 권리와 특권에 참여하게 된 성도는 장차 올 것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히 12:22; 13:14). 이것이 지난 주일에 상고한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동안, 성도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안에서 잘 살아가려면(요 17:14~16), 교회와 세상, 혹은 교회와 국가, 이 두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두 아담]에 이어, 어떻게 두 나라가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2. 타락 후의 두 양상: 대립과 문화적 공유 영역(창 4)
먼저 첫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인류 역사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보겠습니다.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두 가지 양상을 허락하시는데, 그 두 가지는 대립과 공유 영역입니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는 철저하고 근본적인 영적 대립이 형성되지만, 다른 한편, 양자가 공유하는 문화적 공유 영역도 존재합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교회와 세상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게 되고, 또는 둘을 무분별하게 섞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에, 하나님께서 뱀(14~15)과 여자(16) 그리고 아담에게(17~19) 하시는 말씀을 각각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이 말씀에는, 어떻게 타락 후에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영적 대립과 문화적 공유 영역이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 15절을 먼저 보지요.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원시복음으로 알려진 구절입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대립과 대결 개념이 나타납니다. 뱀과 여자 사이에, 그리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있게 되는 대립과 대결입니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이때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서술되는 종말의 순간까지 이 대립과 대결의 그치지 않는 역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각각 누구를 가리킵니까? 물론 이것은 뱀이라는 짐승과 인간의 대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신자와 불신자, 뱀에게 속한 자와 여자와 그 후손인 에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대립이고 대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여기 있습니다.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는 대립과 대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6절 이하 하나님께서 하와와 아담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면, 여자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 그리고 남자에게는 고된 노동이 있을 것이고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육체적 죽음이 있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타락 후의 모든 인류가 공유하게 될 영역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자라고 해서 해산의 고통이 없지 않고, 노동의 수고를 힘들어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두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분명히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대결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겪어야 하는 공유 영역도 있습니다.
이제 성경의 이야기는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면서, 바로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대립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뱀의 후손은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 가인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정말 몸서리칠만큼 무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는 말을 들은 하와는 첫 아들 가인을 낳았을 때, “아, 이 아들이 우리의 원수인 뱀의 머리를 깨뜨리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와는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소리친 것입니다(창 4:1).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아들을 낳았다는 탄성입니다. 하지만, 그 아들 가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뱀의 후손’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후일에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은 그들의 둘째 아들인 아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인류 역사의 첫 살인이 일어납니다.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대립과 대결의 첫번째 사건입니다.
창세기 4장 후반부는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가인의 후손들 안에서 활발한 문화적 발전이 일어나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목축업의 아버지 야발(창 4:20), 음악의 각종 악기들의 아버지 유발(창 4:21), 그리고 금속기구의 장인인 두발가인(창 4:22) 모두 가인의 자손들입니다. 조금은 이상하게 여겨지는 대목이 아닙니까? 왜 아벨을 대신한 셋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쫓겨난 가인의 후손 중에서 이런 문화적 발전들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것은 반드시 여인의 후손에게서만 문화적 발전이나 우월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즉, 신자가 불신자보다 언제나 공부를 잘 하고, 역사 속에서 더 나은 성취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3. 노아 언약과 일반 나라(창 9:1~7, 9~10, 16~17; 8:22; 벧후 3:6~7, 10~13)
성경을 조금 더 따라가게 되면, 사람들이 번성하면서, 점점 더 그들의 죄악성이 만연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시게 됩니다. 그 무서운 홍수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십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이 다 죽는 심판이 마치고 방주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와 가족들이 땅으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언약을 세우시는데, 이것을 노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9:1~7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노아 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일반 나라’를 세우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노아 언약은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명령과 흡사한 명령들입니다. 가령,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창 9:1). 이 말씀들은 매우 유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몇 가지 존재합니다. 첫째, 노아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고기를 음식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이것은 첫 사람 아담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말씀입니다. 둘째로 노아 언약에서는 살인에 대한 형벌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범죄하기 전의 아담에게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에 대한 금지명령과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서는 살인에 대하여 그 살인자의 생명을 취하는 형벌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이미 죄가 들어온 타락한 세상에서 살인 같은 악행을 억제하시고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형벌을 담당할 사법체계와 집행자들의 필요를 암시하고 전제합니다. 이것이 모든 형태의 일반적인 나라와 정부가 하는 일입니다. 세째로, 노아 언약의 명령에는 예배나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과 같은 영적 의미나 제사장적 역할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가령, 노아는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동산을 ‘경작하고 지켜야 한다’는 명령을(창 2:15) 듣지 않습니다. 물론 노아 언약에는 순종으로 주어질 생명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노아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정된 영적, 종교적 명령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문화 활동을 다루는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언약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를 포함합니다. 심지어 노아 언약은 생물과 땅까지도 포함합니다. 창세기 9:9~10을 보지요.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또 16~17절도 보겠습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이 노아 언약은 대대로 유효한 언약입니다.
네번째로, 노아 언약에서 눈여겨 보아야 하는 점은 자연 질서와 사회질서의 보전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는 말씀은 자연 질서의 보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 질서가 인간의 어떤 행위로 인하여 붕괴되거나 망하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 훼손으로 말미암아 지구가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는 어떤 사람들이 듣고 기억할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개발과 자연 훼손 또는 환경 오염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도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또 짐승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람의 문화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2입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이런 말씀은 소위 혹성탈출과 같은 영화가 그리고 있는 침팬지의 반란, 그리고 침팬지와 인간의 전쟁과 같은 설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통해서 세상의 구속이 아니라, 자연질서의 보전을 약속하십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노아 언약에는 구속의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구속이 아니라 ‘보전’과 관련된 것입니다.
끝으로, 노아 언약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반 나라’는 “땅이 있을 동안에”(창 8:22) 있게 될 한시적인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겠다고 무지개로 보증하고 약속하시는 것은 다시는 세상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였듯이,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즉, 물이 아니라 불로써 종언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6~7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서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는 창세기 8:22에서 “땅이 있을 동안에”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더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말씀, 10~13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렇다면, 노아 언약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노아 언약을 통해서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노아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받은 백성으로 구성되는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나라, 곧 일반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일반 나라, 즉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는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모두에게 동일하게 법이 적용되고 집행됩니다.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영역에도 구분이 없습니다. 가령, 결혼, 출산, 음식, 문명과 문화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살아갑니다. 법과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에게 형벌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말씀하신 뱀과 여자,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대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거나 언급되지 않습니다. 노아 언약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영역, 일반 나라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4. 아브라함 언약과 구속의 나라 (창 12:1~3; 15:6; 롬 4:3; 계 5:9~10; 21:24)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성경을 읽어나가게 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이 인물을 정점으로 인류의 역사는 놀라운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의 상황을 묘사하는 창세기 10~11장은 홍수 이후, 인류 번성의 이야기와(창 10) 바벨탑 이야기를(창 11) 각각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노아 언약을 통하여 악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나라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반역으로 치닫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인도하여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것을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하고 그 내용은 창세기 12:1~3과 15장과 17장에 나타납니다. 노아 언약을 통해 일반 나라를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는 이제 구속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 구속의 나라의 성격이 아브라함 언약에 잘 드러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세우시는 구속의 나라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예배 등 영적인 성격을 지니는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왔으며, 모든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이신칭의의 복음을 설명할 때, 인용한 말씀입니다(롬 4:3).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구속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로 인정해 주신 이 구원 얻는 믿음은 순종의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어떻게 일반 문화 활동에 참여하여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요소들입니다. 이 영적 요소들이 구속의 나라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둘째로 아브라함 언약은 노아 언약과 달리 전 인류가 아니라, 오직 구속 받은 거룩한 백성만을 구별하여 그들과만 맺으시는 언약입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도 보편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족속으로부터 구속함을 받게 되는 백성에 대한 언급이라는 점에서, 노아 언약처럼 전 인류를 포함하는 언약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속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반 나라로부터 한 나라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5:9~10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아브라함 언약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백성만을 포함하고 그들과만 관련됩니다.
셋째로, 아브라함 언약이 드러내는 구속의 나라는 세상을 보전하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구속의 나라가 가지는 관심은 장차 올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올 세상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구속의 나라가 하는 일입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복음 전파와 구원에 관여하는 나라입니다.
끝으로, 구속의 나라는, 일반 나라가 “땅이 있을 동안”에 국한된 한시적 성경을 지닌 것과 달리, 항구적으로 그리고 영구히 지속되는 나라입니다. 구속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4을 보지요.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새 예루살렘의 빛 가운데로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나라와 왕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만국(나라들)’과 ‘땅의 왕들’은 세상 나라와 그 왕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차 올 세상을 다스릴 영원한 구속의 나라가 된 신자들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씀입니까?
이와 같이, 아브라함 언약은 신자와 불신자를 근본적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듯이, 근본적으로 이 양자는 대립과 대결의 구도 속에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5. 두 나라 시민으로 산다는 것—하늘에 소망을 두는 삶(히 11:13~14; 벧전 3:15)
우리는 어떻게 세상 나라와 구속의 나라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은 구속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일반 나라의 백성과 시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미국에 입국하실 때, 천국 여권을 내밀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대한민국 여권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이라는 것은 불변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두 언약 아래서, 두 나라 시민으로서 살아야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노아 언약 아래서 일반 나라에 참여하여 살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받은 자요, 구속 받은 백성으로서 구속의 나라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렇게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삶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아브라함의 삶과 오늘날 신약 백성으로서의 우리 삶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기본적인 사실은 아브라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삶에 존재하는 긴장은, 한편으로는 불신 세계와의 대립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삶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긴장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 주변의 백성들과는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지만, 동시에 그들과 공유하는 공동 영역에서는 다양한 참여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자, 이제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의 긴장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면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고지를 점령하고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함으로써 세상을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리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답입니까? 성경이 이것을 승인합니까? 교회의 역사는 이런 오답을 정답으로 알았기에 수많은 피가 흘려진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흘림까지는 아닐지라도, 신자들은 이 본질적인 대립과 대결을 다양한 힘의 정복으로 해결하려는 유혹을 늘 가지고 살아갑니다. 공부 잘하고, 승진하고, 성공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 라는 증언을 받고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이 모든 것을 정복하신 분은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복종하게 하셨고, 당신 안에서 다 통일되게 하셨습니다(엡 1:10).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 만물을 정복하고 통일되게 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올 것, 새 창조의 영광으로 들어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전히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찾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 나라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본향,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히 11:10) 그날의 영광을 기다리며 사는 자들인 것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자의 소망이고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 존재입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바라기에 이렇게 사는 겁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우리 소망이 장차 올 것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렇게 여러분의 삶이 그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지금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