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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신조](17) 전적 부패(4) (3:5~6)

김형익 목사 / 교리강의 / 2018-04-08

말씀내용
17강 전적 부패(4) (3:5~6항)

[양심의 무능함] 자연인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증거
양심과 죄책감(롬 2:15)
그러나 이것으로 구원의 지식에 도달할 수도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오늘의 내용?율법과 복음의 대조(롬 8:3)
(3:5) 율법과 율법의 행위의 무능함: “비록 이 율법이 죄가 지극히 큼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사람을 더더욱 책망하지만, 결코 사람에게 살 길을 알려주거나 비참에서 빠져나올 힘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죄인을 저주 아래 남겨둔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율법으로는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
(3:6) 복음의 필요: "본성의 빛이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역사로 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메시아에 관한 기쁜 소식인 화목하게 하는 말씀 또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통하여 행하신다.”

[율법과 복음의 구분]
율법의 주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정죄하는 것
복음의 주역할은 죄에서 구원하는 것
계시의 방식, 내용, 기능과 효과 면에서 다르다.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
율법?사람 안에 새겨진 율법은 타락 후에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에, 자연인에게는 죄와 죄책에 대한 인식, 도덕 감각이 있다는 점에서 율법은 자연적이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셨을 때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볼 수 있도록 돌판에 새겨주신 것이다. 율법의 이런 측면은 거짓 종교들이 모두 율법의 자취를 가지고 있는 점이 증거한다.
복음?복음은 초자연적이고 태초부터 감추어진 신비다. 복음은 가장 적은 부분이라도 거짓 종교에서는 찾을 수 없다. 기독교에만 복음이 있다. 복음은 자연인의 본성에 거슬린다.
율법적 설교가 많은 이유는 자연인의 본성에 맞기 때문이다.

[내용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
율법?조건적 구원을 약속.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냄. 순종 여하에 따라 복과 저주가 나뉨(갈 3:10). 율법은 죄인을 위협하고 저주한다.
복음?우리가 무엇을 행해야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말해줌. 복음은 예수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약속함. 복음은 오직 약속을 준다(딤전 1:15).
믿음 ≠ 행위: 믿음은 행하기를 멈추는 것. 믿음은 구원의 도구적 원인. 믿음은 좋은 것들을 거저 받는 거지의 손이다.
복음은 생명수로 나아와 돈이나 값없이 거저 마시라는 초청이다.

[기능과 효과에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
율법?의무를 상기하고 죄를 드러냄으로 깨닫게 하여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게함. 우리의 필요를 보게 하지만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함.
율법의 연약함인가, 육신의 연약함인가(롬 8:3; 7:12)
물과 배의 관계의 비유(p.262)?온전한 배, 구멍뚫린 배
(율법을 경험함) 성령님께서 보여주실 때, 율법 앞에서 우리는...(롬 7:11)
복음?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함. 복음은 믿음을 요구하고 그 믿음을 주며, 회개를 요구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비춰준다. 복음 사역의 효과는 성령 안에서의 평강과 희락이고(롬 14:17; 15:13), 두려움을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제거함. 복음은 값없는 은혜.

[율법으로의 회귀 위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세속 현자(Mr. Worldly-wiseman)의 제안: "도덕(Morality)이라는 도시에 사는 합법(Legality)이라는 신사나 그 아들 예의(Civility)를 찾아가라. 그가 짐을 벗겨줄 것이다. 그리고 처자를 데리고 이 마을로 데리고 와서 살아라."
(p.266) 신자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할 때, 복음의 선한 길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이 노력하는 자리로 다시 떨어진다. 죄와 죄책만을 볼 때 더 열심히 성경읽기, 기도, 선행, 신실함을 통해 노력함으로 자신을 개선해 보려고 애쓴다. 이렇게 하나님께 더 받아들여질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더 통회한다면, 더 겸손한다면, 더 거룩한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기뻐하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 이때 평안을 느끼는 것은 위험하다!

[하나님의 대답?복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롬 8:3)

[적용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독생자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무한한 선하심과 구원의 은혜만을 의지함.
한시도 자기 의로 기울어지지 않고 교만함으로 가지 않음.

나와 형제/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 관점으로 형제와 이웃을 대할 때, 우리는 더 긍휼함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태도에서: 모든 형태의 교만, 자만에서 벗어나 율법 아래 있던 자신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신을 보는 삶에서 벗어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