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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 (17) 음부에 내려가심

김형익 목사 / 교리강의 / 2011-02-13

말씀내용
44문.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1. 이 구절이 사도신경에서 논란이 되는 이유
A. 사도신경은 12사도가 함께 앉아서 쓴 것이 아니다.
B. 초대교회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면서 교회에 가르쳤던 내용이 하나의 본문으로 확정된 것이다.
C. 5세기 공인본에는 이 구절이 들어있다.

2. ‘음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A. 헬라어 ‘하데스’, 히브리어 ‘스올’의 의미
i.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가리킨다(눅 16:23). 지옥을 가리키는 ‘게헨나’라는 다른 헬라어 단어가 있다.
ii. 무덤 혹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가리킨다(창 42:38; 계 1:18).
iii. 상징적으로 ‘지옥의 고통, 큰 고통’을 의미한다(시 18:5~6; 시 116:3).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에 대한 세 가지 해석
1. 로마 카톨릭: 음부=연옥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몸은 무덤에 있었지만 영혼은 지옥에 내려가셨다.
지옥의 변두리에는 영세를 받지 못한 아이들이 머무는 ‘유아 림보’와 구약의 성도들이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머무는 ‘선조 림보’가 있다.(림보는 가장자리, 변두리라는 뜻).
예수님은 장사되신 다음, 지옥의 변두리를 방문하셔서 거기 있는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을 구원해서 하늘로 가셨다.
?아브라함은 선조 림보에 있지 않고 산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막 12:27; 눅 16:22). 구약의 신자는 다 이와 같다.
예수님은 한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2.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50문: 음부=무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고 할 때 음부를 무덤으로 이해하면 자연스럽다.
?장사지냄과 무덤에 내려감은 반복이 아닌가?(칼빈, 우르시누스)

3. 칼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음부=십자가에서 당하신 지옥의 고난
시편 18과 116편은 음부를 지옥과 같은 큰 고통으로 표현하듯이,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면서 지옥의 고통을 받으신 것이다.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주님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아셨던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세 번을 기도하셨다(마 26:37~38; 막 14:33~34). 주님은 십자가에서 실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으셨고 버림을 당하셨다. 그 모든 고통을 당하신 후에, 주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하시고 낙원에 가서 쉬셨다.
?그렇다면 음부에 내려가신 것이 죽으심과 장사되심 앞에 와야 바른 순서가 아닌가?

어려운 성경구절 해석
1. 벧전 3:18~19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A.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18):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심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고전 15:45).
B. ‘옥에 있는 영들’(19): 영들을 복수로 사용할 때에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영들은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영적인 존재들을 가리킨다. 전파하였다는 말도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리의 소식을 사단과 그 휘하 모든 영적 존재들에게 선언하셨다는 뜻이다.

2. 엡 4:9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다”?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신 것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성육신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심을 모두 포함한다.

고백의 유익
1. 칼빈, “이것을 뺀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은덕을 대부분 잃어버릴 것이다.”
2.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다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성도의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