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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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와 성숙 - (30). 신자의 전생애가 회개다!(시리즈 마지막)

김형익 목사 / 교리강의 / 2009-10-25

말씀내용
성화와 성숙(30): 신자의 전생애가 회개다!

신자의 성화와 성숙은 회개를 통해서 진행된다. 전생애에 걸친 계속적인 회개는 우리가 깊이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자라가고 있다는 최고의 표지다.

종교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
종교적 회개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당신을 행복하게 하고 기도에 응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적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의 마음에 반하는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으로 반복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종교적 회개는 이기적이다. 종교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미치게 될 죄의 결과 때문에 죄에 대해서 후회한다. 그것은 형벌을 가져올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죄는 궁극적으로 정죄로 우리를 데려갈 수 없다고 말해준다(롬 8:1). 그러므로 죄의 가증스러움은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불명예스럽게 한다. 그러므로 종교에서 회개는 자기 중심적이지만, 복음은 회개를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시킨다. 종교에서 우리는 주로 죄의 결과 때문에 후회하지만, 복음에서는 죄 그 자체를 인하여 슬퍼한다.

종교적 회개는 자기의와 연결된다. 종교적 회개는 쉽게 죄를 속하는 형식이 되고만다. 종교적 회개는 종종 우리가 너무나 비참하고 후회하고 있어서 그 죄의 용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납득시키는 자학의 형태가 되곤 한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비참해지셨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용서를 획득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얻어진 죄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요일 1:8).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용서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종교에서 우리는 우리의 회개로 죄용서를 획득한다. 그러나 복음에서 우리는 단지 죄용서를 받아들인다.

종교적 회개는 밑바닥까지 쓰디 쓴 것이다. 종교에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도록 충분히 선하게 사는 것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죄와 회개의 모든 경우는 고통스럽고, 자연스럽지 않으며 두려울 정도로 위협적이다. 엄청난 강요가 있을 때에만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이유는 그들의 소망이 오직 자신들의 도덕적 선함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용납되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결함을 인정하는 것을 더 쉽게 만든다. 우리가 우리 죄성의 깊이를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쫓겨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있고 우리 자신의 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다. 종교에서 우리는 종종 회개를 덜 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우리가 용납되고 사랑받을수록 우리는 점점 더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모든 회개에는 씁쓸함이 있지만, 복음 안에서는 궁극적으로 달콤함이 있다. 이런 회개는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근본적이고 새로운 동력을 창조한다. 우리가 자신의 결점과 죄악을 보면 볼수록 더 보배롭고 전율하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납하심을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자기 변호를 점점 더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고 자신의 죄의 진정한 수준을 인정하게 된다. 모든 죄악들 아래 있는 죄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의 결핍이다.

복음적 회개의 훈련
회개에 대한 이 두 개의 다른 방식을 분명하게 이해했다면 이 전제 위에서만, 우리는 정규적이고 정확한 자기 살핌과 회개의 훈련으로부터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8세기 감리교의 지도자들인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는 이런 자기 살핌과 회개의 훈련을 꾸준히 했었는데, 조지 휫필드가 1739년 한 편지에서 이것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조지 휫필드는 이렇게 매일 밤 자신을 살폈다.

깊은 겸손(교만에 대하여)
나는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는가? 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내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꼈는가?
이렇게 회개하라. 나의 오만함이 줄어들고(나도 같은 죄인이다), 비판으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 때까지(내가 하나님의 사랑보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더 소중히 여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라.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 아래서 나는 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떠나보낼 수 있다. 이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은 쓸데없는 일이다. 내가 감사와 평안한 기쁨을 경험할 때까지 그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라.

뜨거운 사랑(무관심에 대하여)
내가 누군가에게 불친절하게 말하거나 생각했는가? (마음 속에서라도) 누군가를 풍자함으로써 나를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는가? 나는 참을성 없고 조급하지 않았는가? 나는 자기에게 몰입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이렇게 회개하라. 차가움이나 불친절함이 없어질 때까지(당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생각하라), 조급함이 없어질 때까지(당신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 무관심이 없어질 때까지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라. 내가 따뜻함과 애정을 보이기까지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라.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로 나를 무한히 참으셨고 나를 주목하셨다.


지혜로운 용기(불안에 대하여)
나는 직면해야만 하는 줄 알고서도 사람이나 할 일을 피하지 않았는가? 나는 불안해하고 염려하지 않았는가? 나는 신중해지는데 실패하거나 조급하게 충동적으로 행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회개하라. 어려운 일을 회피하려는 두려움이 없어지기까지(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악을 직면하셨기 때문에), 불안이나 조금한 행동이 없어지기까지(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시며 나를 지켜보신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라. 불안해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만큼 지혜롭지 않다. 조용한 사려깊음과 전략적 담대함을 경험하기까지 그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라.

경건한 동기(a single eye)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하는가 아니면 두려움, 인정받으려는 욕구, 위로와 편안함에 대한 사랑,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 갈채와 권력에 대한 굶주림, 또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움직여지는가? 나는 어떤 사람을 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정욕이나 폭식의 욕구에 순응하여 첫 발자국을 떼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이런 무절제한 욕구 때문에 내 시간을 중요한 일이 아니라 급한 일에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회개하라. 주님께서는 내가 이 다른 것들 속에서 찾고 있는 모든 것을 나에게 어떻게 제공해주시는가? 기도하라. “오 주 예수님, 제가 죄를 피할 수 있도록 주님 안에서 저를 충분히 행복하게 하여 주시고, 위험을 피할 수도 있도록 제가 주님 안에서 충분히 지혜롭게 해주셔서 언제나 주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