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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2018 - (1). 존 칼빈과 기독교 강요

다니엘 11:32 / 김형익 목사 / 교리강의 / 2018-10-28

말씀내용
1강 존 칼빈과 기독교 강요(단 11:32)

1. 존 칼빈은 배교의 시대에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가진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모범이다.
A.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가진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이다.
B. 어떻게 하면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일목요연하게(전체를 일정 기간 내에 가르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나 피상적이지 않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가르칠 수 있을까?
C. 『기독교 강요』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2. 존 칼빈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이 사람처럼 혹독한 비판을 받으면서 동시에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있을까?
A. 부정적 평가: “이중적이고, 잔인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지닌 종교 권력자이며 위선자”, “제네바의 살인자”
B. 긍정적 평가: “가장 겸손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을위해서 살았던 사람”, “칼빈은 보편적 교회의 교사(doctor)로서의 성품과 능력을 가진 인물(T.H.L.Parker).”

3. 왜 칼빈이 중요한가?
A. 데이빗 웰즈, "거룩하고 위엄에 찬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현대 복음주의 세계에서 사라지셨다."
B. 레슬리 뉴비긴, "우리가 복음주의 모든 기독교 용어들을 사용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중심적이고,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필요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할 수 있음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또 나는 상당히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구원의 필요 속으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가 거기에 집중하는 것을 보았다."
C. 존 파이퍼,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중요하고 유력한 경험이 되는 교회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D. 칼 홀, "칼빈주의자는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를 알고 있다."
E. 우리는 이 모든 현대 교회의 현상들이 보여주는 결핍에 대한 해답을 칼빈 에게서 얻을 수 있다.

4. 존 칼빈(1509~1564)의 생애

A. 그는 자신에 대해 너무나 적게 말했고 썼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알 수 없다.

B. 종교개혁 2세대: 칼빈은 루터가 25살로 비텐베르그대학에서 성경을 막 가르치기 시작하던 해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노용(Noyon)에서 태어났다. 루터의 말기, 종교개혁의 2세대에 종교개혁 운동이 크게 필요로 했던 것은 이 신앙을 정돈하고 한 체계 안에 표현할 능력을 가진 신학자였다. 그가 존 칼빈이다.

C. 가정 배경과 공부, 회심: 그는 스위스 사람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으로, 프랑스 신흥 중산층 가문의 똑똑한 아들로 태어났다. 귀족 가문의 자제들과 함께 귀족들 사이에서 어색하지 않은, 세련되고 개성 있고 확신에 찬 인물로 성장하는데 처음에는 아버지의 바램으로 신학 공부 준비의 일환으로 철학, 신학, 문학을 공부하다가 아버지의 뜻이 바뀌어 법학으로 길을 바꾸게 되지만, 회심을 하게 되면서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의 고삐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회심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각인시켜주었고, 오직 하나님의 권위만을 유일의 권위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D. 도피와 망명 결정(1535): 프랑스에서 개신교에 대한 핍박이 일어나면서 그는 “복음의 진리, 순수한 종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예배가 프랑스에서 떠났기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 망명하기로 작정한다. 1534년 1월 방랑의 길에 올라 1535년 1월 바젤에 정착하였다.

E. 『기독교 강요』(1536) 저술: 1536년 3월 바젤에서 초판을 출간하였는데 이 때 칼빈의 나이는 만 26세였다! 그는 이 책을 프랑스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신교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그들이 믿는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이후 1559년까지 5번의 개정증보를 거쳤지만 그 기본 내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라틴어로 출판되어 지식인 계층만이 읽을 수 있었지만 1541년 칼빈은 일반 대중을 위하여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F. 제네바 개혁의 1기(1536~1538): 당시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과 사보이 공국과 프랑스의 틈새에서 꼼짝달싹 못하는 인구 1만명의 공화국이었다.
제네바 시민 총회는 1536년 5월 25일 투표를 해서 ‘복음에 따라 살기로’(live by the gospel) 결정을 내렸다. 칼빈은 프랑스 개신교 난민들이 많았던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말씀을 연구하며 평온하게 여생을 보내기를 원했으나 전쟁으로 길이 막혀 제네바로 우회하던 중 1536년 8월 제네바의 개혁자 기욤 파렐과의 섭리적인 만남을 통해 제네바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학교수(성경강해자)로 임명되고 1536년 말에는 제네바의 세 개의 교회 중 성 베드로 교회의 목회자로 임명되지만 18개월 후 성찬과 권징 문제로 제네바 의회와 대립하다 파렐과 함께 추방된다.

G. 스트라스부르크 난민교회(1538~1541): 프랑스 난민 500여명의 목회자로 3년 동안 신약을 가르치면서 그의 첫 주석인 『로마서 주석』을 썼고 『기독교 강요』 2판(증보)을 출판했다. 이곳에서 칼빈은 과부 이델레트와 결혼을 한다(1540). 칼빈의 가정사는 슬픈 가정사였다. 1549년 이델레트가 결핵으로 사망하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모두 어려서 사망했다. 이델레트 사후 칼빈은 재혼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로서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나는 내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와 결혼하면 누구든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간에 나는 하나님을 더욱 자유롭게 섬기기 위해 결혼을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형제들보다 더 고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H. 제네바 개혁의 2기(1541~1564): 제네바 의회는 1541년 5월 추방을 철회하고 다시 칼빈을 초청한다. 칼빈은 착잡하지만 순종의 심정으로 이 초청에 응하여 1564년 5월 27일 임종할 때까지 보통 주일에 두 번 설교하고 거의 격일이나 매일 설교를 하면서 24년간을 섬겼다. 칼빈이 이 초청에 응할 때의 심정은 의외로 많이 나타나있다.

i. “비록 나는 당분간은 제네바의 교회를 책임지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를 부모와 같은 애정으로 감싸고 싶은 나의 마음을가로막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교회를 맡기셨을 때, 나를 영원히 그 교회에 충성하도록 맹세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매일 천 번씩 죽어야 하는 이 십자가보다 차라리 다른 죽음으로 백 번 죽고 싶습니다.” “(파렐에게 쓴 편지에서) 그곳에서의 비참했던 나의 삶을 돌이켜 볼 때 돌아와 달라는 소리에 어찌 나의 영혼이 떨지 않을 수 있었겠소? 내가 당신의 동료로 지명된 이후에 우리가 줄곧 당했던 불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소....내가 그 당시 나의 양심이 얼마나 괴로왔으며 내 마음이 얼마나 불안으로 들끓었는지를 생각하고, 비록 내가 그곳을 내 경우에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한다고 하더라도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오. 하나님과 함께 당신이 바로, 내가 주님께서 메어주셨다고 확신하는 소명의 굴레를 감히 벗어 내팽개치지 않는 이상 내가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소. 손과 발이 묶여있는 이상 잠시라도 딴 곳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 무의식 중에 엄습하는 잡념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그 모진 고통을 당하기로 결심했었소.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은총으로 그곳에서 구원함을 받았으니 만일 내가 그곳을 위험하고 해로운 심연과 소용돌이로 생각하고 다시 들어가기를 꺼린다고 해서 누가 나를 용서하지 않겠소?” “나는 내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주님께 희생제물로 바칩니다.” Prompte etsincere!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 “주여 저는 제 마음을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ii. 제네바 시 당국과의 갈등과 마찰(1546~1555): 세르베투스의 처형 사건과 부도덕한(내연의 처를 둔) 사람들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인한 시 당국과의 마찰과(1553) 온건하게 설교하라는 제네바 시 당국의 요청 그리고 열매 없는 사역이라는 칼빈 자신의 판단은 다시 제네바를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I. 임종(1564년 5월 27일): 2월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수면 부족, 적은 식사, 끊임없는 긴장 상태, 쉼 없는 노동 등이 원인이었다. 그는 임종의 자리를 방문한 시 의원들에게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뜻이 원래 선한 의도였음을 밝혔다. 또한 자신의 참을성 없는 나쁜 성질이 천성이나 이를 부끄러워하며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다음 날 목사들이 방문했을 때 그는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저는여러분이 마지 못해 참아주신 여러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한 일은 모두 별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저는 선을 의도했으며 저 자신의 악 때문에 항상 슬펐으며 항상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근본 뿌리는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저는 성경 한 구절도 내 지식이 미치는 한 한 번도 잘못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구를 미워해서 글을 쓴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썼을 따름입니다.”
i. 유언장: “하나님은 그의 초라한 피조물인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나를 그의 복음의 밝은 빛으로 인도하사, 나무도 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구원의 교리에 참여케 하셨고...그는 백 번 버림받아 마땅한 악하고 가련한 나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내게 자비를 베푸사 그의 복음을 견지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나와 나의 노동을 사용하시기까지 했습니다......내가 갖고 있던 의지와 열심은 그것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면 너무도 차갑고 느슨해서 나는 여기 저기에 빚진 느낌이며 만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이 아니었던들, 내가 가진 모든 애정은 한낮 없어질 연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내게 베푼 은혜조차도 나를 더욱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였고 너무도 그러해서 나의 의뢰는 긍휼의 아버지이신 그분이 스스로를 그토록 불쌍한 죄인의 아버지로 나타내는 그곳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5. 존 칼빈의 영향
A. 유럽 개신교 지도자들과의 교류: 제네바는 당시 유럽 개신교도들의 피난처였고 그들에게 복음의 학교 역할을 하였다. 제네바 교회는 유럽 교회들의 개혁 모델이 되었는데 이와 관련 존 낙스를 비롯하여 많은 지도자들과 서신 왕래를 하였는데 총 4302통의 서신이 남아있다. 이중 1369통은친필로 쓴 편지이다.
B. 저서들: 대표적으로 『기독교 강요』와 많은 설교와 주석들(요한 2,3서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전체를 포함한 30권의 주석을 썼다)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C. 개신교 개혁주의 신학: 칼빈의 신학은 이후 제네바(베자, 프랜시스 투레틴), 프랑스, 독일(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화란(카이퍼와 바빙크), 잉글랜드(윌리엄 퍼킨스, 존 오웬)와 스코틀랜드(존 낙스와 새뮤얼 러더포드) 그리고 미국의 장로교(잉글랜드의 청교도주의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의 핏줄)를 넘어 한국 장로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6.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A. 『기독교 강요』에 대한 평가:
i. 마틴 로이드존스: “기독교 강요는 그 자체가 신학적 고전이다. 그 어느 저작도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이보다 더 위대하고 더 두드러진 영향을 미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책의 훌륭하고 고상한 사상에 더하여 문체상 참으로 감동적이고 때로는 몸을 오싹이게 할 정도의 책이라는 것을 언제나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하는 가장 현대적인 신학과는 달리 이 책은 참으로 경건한 책이다. 그 어느 책도 독서를 통한 학식을 이 책보다 더 많이 보상해주지 못한다. 특히 말씀의 설교자들의 경우에 그렇다....... 기독교 강요 안에는 칼빈의 입장의 진수가 체계적이고 규범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우리 모두가 기독교 강요를 읽어야 하는 가장 긴박한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 기초에서 흔들리고 있고, 어떤 궁극적인 권위도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영광스런 교회를 장엄하게 강해하고 연구하는 일보다 사람의 영혼을 강하게 하고 견고케 하는데 그처럼 적합한 것이 없다. 이 책은 종교개혁을 위해 순교한 자들, 1662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대륙에 건너간 102명의 청교도들, 언약주의자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과 죽음을 대면해야 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의 영혼의 비상 휴대 식량이었다. 오늘날 이 책보다 더 필요한 책이 없다.”
ii. 필립 샤프: “이 책은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조숙한 천재의 걸작이다.”

B. 저술 목적: 일차적으로 이 책이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되었고 국왕에게 기독교의 교리를 바르게 설명하려는 의도로 쓰여졌지만 또한 궁극적으로는 경건한 독자들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다는 것을 칼빈 자신은 밝힌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접근하며 아무 장애 없이 그 말씀 안에서 생의 걸음을 걸어나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1559년판 독자에게 드리는 글)

C. 기본 내용: 칼빈은 신학서적이 아닌 경건서적으로서, 경건의 총체와 구원의 교리에 관한 필요한 모든 지식을 거의 포함하고 있는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 경건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 되기를 의도했다. 초판에서는 그 내용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 권위인 십계명, 사도신경 그리고 주기도문을 뼈대로, 율법, 믿음 그리고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다루었으나(이것은 교리문답의 구조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결정판(1559)에서 상당한 증보와 함께 그 구조는 전적으로 개편된다.

D. 구성(1559년 결정판의 구성은 사도신경에 따른 구조를 보여준다)
• 1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을 아는 지식,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삼위일체, 창조와 섭리
• 2권 중보자 그리스도: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 율법, 구약과 신약의 일관성
• 3권 성령 하나님: 믿음, 회개, 이신칭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예정론, 기도, 종말론
• 4권 교회와 시민국가론: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성례, 교회와 국가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