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강의 및 강좌 > 기독교 강요 2018 - (22). 이신칭의

책강좌강의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기독교 강요 2018 - (22). 이신칭의

로마서 4:3-8 / 김형익 목사 / 교리강의 / 2019-07-21

말씀내용
의롭다 하심: “이신칭의는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다.” (마르틴 루터)
1. “종교를 떠받치는 대들보인 이신칭의는 제3권 11-18장에서 논의되는데, 위치로나 신학적으로나 『기독교강요』의 중심을 차지한다.” (J.I.패커)
2. 성도의 구원에 있는 이중적 은혜—칭의와 성화
A. 칭의는 성화와 별개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성화와 함께 주어지는 쌍둥이 선물 중 하나이다. 성화와 칭의는 모두 우리와 그리스 도와의 연합에서 나온다. 둘 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여러 조각으로 나뉘실 수 없기” 때 문이다(3.16.1)
B. 칼빈은 구원의 결과(성화)가 구원의 근거(칭의)로 여겨지는 것을 허용하 지 않는다.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기반을 두지 만, 성화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에 기반을 둔다.
C.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로 단번에 성취되었다. 성화는 우리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을 통해 날마다 성취되고 있다. 칭의는 구 원을 얻기 위해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의무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성 화는 거룩해지기 위해 우리가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해준다. “칭의는 전 가된 순결을 제공하고, 성화는 실질적인 순 결을 제공한다.”(조엘 비키)
D. 칭의는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성화에 앞선다. 칭의는 성화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성화가 필요하게(그리고 어쩌면 불가피하게) 만들지 만, 칭의가 성화의 원인은 아니다. 칭의에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듯 이 성 화에도 마찬가지다. 참된 성화는 칭의가 없으면 알아볼 수 없다(3.16.1).
3. 칭의에 대한 정의
A.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자로 용납하여 그분의 은총 속으로 영접하는 것 ...... 그것은 죄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있다.”(3.11.2)
B. “의롭게 한다는 것은 고소당한 사람을, 마치 무죄가 확증된 것처럼 유죄에서 풀어주는 것이다.”(3.11.3)
C. “우리는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영접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과 화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서 죄를 용서받고, 마치 자기 것인 양 그리스도의 의(義)로 옷 입고, 하늘의 심판석 앞에 담대하게 서는 것이다.”(3.17.8)
4. 칭의 안에 있는 두 가지 은혜(롬 4:6~7)
A. 죄사함: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받는 사람’(롬 4:7)
i. 칭의 없는 죄사함은 없다(3.11.3).
ii. 죄가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졌다.
B.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의로 여기심을 받는’(롬 4:6)
i. 칭의로써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죄짓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 피조물이 된다.
ii.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를 얻는다.
5. 칭의는 구원진리의 정수이고(합 2:4; 롬 1:16; 3:28; 엡 2:8), 종교(기독교)의 중심축이다(3.11.1).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6. 칭의는의의전가의상태,즉성도가전가받은의를누리는그리스도와의연
합에 그 본질이 있다(3.11.21~23).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연합) 성도에게는 그분의 의가 전가된다. 성도들은 신비한 연합으로 그 분과 교제한다.
7. [전가(轉嫁)] 전가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교리다. 전가 란 값이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뜻이다. (계좌이체)
8. 이 연합은 오직 믿음으로 일어난다. 믿음은 구원의 도구적 원인이며 공로가 아니다.
A.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에(갈 3:21~22)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없다(3.11.19).
B.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고(롬 3:24) 하나님은 자 신을 믿는 자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롬 4:5).
C. “믿음은 의를 받기 위한 그릇이다.”(3.11.7) “칭의에 있어 믿음은 수동 적인 것에 불과하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3.13.5)

9. [믿음과 행위의 관계]
A.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는 양립할 수 없다. '믿음으로 아버지께로부터 난 의'(빌 3:9) 밖에 없다(3.11.13). 로마 카톨릭은 두 의가 함께 작용한다고 본다. 즉,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가 믿음으로 선행을 함으로 의에 이른다는 것이다.
B.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아버지의 자비와 아들의 순종에서 공로 를 찾아야 한다(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의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 도의 완전함을 의뢰하고 확신하며 바라는 것이다(롬 11:6). (3.11, 14, 16).
C.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믿음에 는 사랑이 따른다.
10. [법정적 칭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법정적으로 선포 하심에 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없다(시 143:2; 130:3). 인간 앞에 자책할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인생은 없다(고전 4:4). 하나님 앞 에서 인간의 의는 더러운 걸레다(사 64:4).
A. 루터파 오시안더(Andreas Osiander,1498-1552)의 주장: “하나님은 실제로나 개인적으로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의롭게 간주하실 수 없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전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질이 실 제로 주입되어 이뤄진다. 그러므로 칭의로 우리 것이 된 그 의는 신적 존 재인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가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이지 법정적으로 전가된 의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자로 보시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의롭기 때문이다.”
B. 칼빈의 반박: 오시안더는 가톨릭처럼 칭의와 성화를 혼동했고, 오직 믿 음에 의한 칭의보다는 성화에 의한 칭의를 가르쳤다. 칼빈은 신자에게는 “그들 밖에 있는 의”가 주어졌으며(3.11.11), 그로 인해 “본질적으로 의롭지 않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된다고 했다 (3.11.3).
적용: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특성
11.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아진다(3.13.1~2)]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조금이라도 인식하는 자들, 또 중생한 자들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 자기 영광을 벗어버려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A.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을 때(고전 1:31; 렘 9:23~24) 그 의미는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된다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바울은 이 말씀을 이런 뜻에서 해석해서 우리가 주만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라고 가르쳤다(고전 1:30~31). 그가 말하는 뜻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는 것이다. (3.13.1).
B.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3.13.2)
C.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12.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양심이 평화를 누린다. (3.13.3~5)
A.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자유함으로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언하신 죄 용서와 칭의 만이 양심을 자
유하게 한다. (3.13.4)
B. 이신칭의는 양심에 평안과 기쁨을 준다(롬 5:1). 이 확신은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3.13.5).
C.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푼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면서 수행하신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풀 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떨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한 고통에서만 우리의 평안을 찾아야 한 다. (3.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