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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십시오

누가복음 15: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3-24

말씀내용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십시오> 눅 15:1~7


오늘 본문은 즐거움과 기쁨에 대해서 말합니다. 5절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목자의 즐거움을 말합니다. 6절에는 목자가 집에 와서 벗과 이웃을 불러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기쁨을 함께 즐기자고 청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7절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에게는 이 기쁨이 충만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기쁨,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고 하늘의 잔치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쁨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라고 우리 모두를 초청하십니다.

1.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계산 99:1
주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목자는 양 100마리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녁에 세어보니 한 마리가 비는 것을 발견합니다. 웬만하면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고, 시장하고 피곤하기도 할텐데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려고 99마리를 두고 이미 어두워진 길로 다시 나갑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양떼를 치다 보면 한 마리 정도 잃어버리는 일이 있을텐데 그 한 마리를 찾겠다고 그 저녁에 다시 나서는 목자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5마리나 10마리쯤 된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이런 관점으로는 목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목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눅 19:10) 주님 자신이고 양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입니다. 목자는 ‘찾도록 찾아 다녀서’ 결국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야 맙니다(4). 이 표현은 찾을 때까지 결코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여줍니다. 목자는 결국 찾아냈습니다. 양이 스스로 목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목자는 즐거워 합니다(5). 그 양에게 분풀이를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제는 내가 너를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께. 내가 너를 보호하여 줄께.”하는 심정으로 어깨에 둘러메고 즐거움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피곤한 줄도 모르고 벗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6).” 이쯤 되면 어떤 독자들은 “아, 어리석은 목자여, 당신은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값보다도 더 많은 비용을 지금 잔치에 쏟고 있는 것을 아시오?”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목자를 더욱 이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1/100이라고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자에게 이 양은 1/100이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양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허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까지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합니다.

2.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라(7)
하나님의 기쁨이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 잃어버려졌던 양 한 마리가 목자의 품으로 돌아오듯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던 죄인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 그 품에 돌아와 안기는 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 있는 양 99마리와 그 한 마리 양을 비교하셨습니다. 물론 잃어버려지지 않은 99마리가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우리에 안전히 거한다는 사실은 기쁨입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려졌던 양 한 마리를 찾게 되었을 때 목자의 기쁨은 앞의 기쁨보다 더 크다고 말씀합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세 비유를 모두 보십시오. 세 비유는 각각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 비유는 모두 잃어버렸던 양과 은전과 아들을 찾은 후의 즐거움과 기쁨의 잔치를 말합니다. 10절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잃었다가 찾은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며 잔치를 벌입니다(23~24).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이 세 비유를 통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라고,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라고 말입니다.

3. 두 부류의 청중들(1~2).
그런데 이야기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세 비유는 사실상 하나의 묶음으로 되어 있기에, 단지 하나의 비유만으로는 전체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전체 메시지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 비유가 시작되기 전의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4장에서 주님은 누가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될 수 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14:25~35). 만일 무늬만 제자라면,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서 땅에도, 거름에도 쓰지 못하고 버려질 뿐이라고 하셨습니다(14:34~35). 그리고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35). 그러자 ‘들을 귀 있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겠다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15:1). 세리는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로마 제국의 앞잡이들이요 민족의 반역자들이며, 조상들의 신앙을 저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죄인은 그 직업상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다고 유대 랍비들이 선언했던 직업에 종사하는 천민들이었습니다. 몸을 팔아야 했던 창녀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겠다고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뒤로 수군거리며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예수님을 비하하는 말로써)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며 비난했습니다(2). 이들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무늬만 제자’인 사람들입니다. 이미 주님은 이런 비난을 계속해서 받아오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 5:30).” 또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그들은 비난했습니다(눅 7:34).” 주님께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이 이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청중은 두 부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첫째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양들이고, 잃어버린 은전이며, 잃어버린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려진 자들이며 죄인임을 압니다. 그들은 세번째 비유에서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말한대로, 자신들이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19, 21). 그런데 지금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회개, 이들의 돌이킴이 말할 수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지를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다른 한편, 주님은 두번째 청중인 수군거리며 주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자신들이 우리 안에서 목자의 인도를 받고 있는 양이라고 생각하지만, 너희는 자신을 집 안에서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이 섬기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너희들은 실상 잃어버려진 자들이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번째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큰 아들은 여느 날과 같이 밭에서 열심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즈음,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간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의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맛보고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이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1~32).”

4. “우리는 다 길 잃은 양이(었)다.”
기쁨의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분노하는 이 아들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에 대한 무지와 착각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에서 대단한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경력 때문에, 이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려진 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단순히 전에 자신도 잃어버려진 양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는 곧 깨닫고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한 번도 잃어버려진 자였던 적이 없다고 여기는 착각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저는 이 말처럼 성경에 나오는 말 중에 비참한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섬겨’라는 말은 사실상 종으로서 섬긴다는 단어입니다. 즉, “여러 해 동안 나는 노예처럼 일했는데..”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그에게 원했던 바가 아닙니다. 비록 집 안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와 통하지 않는 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자기 동생에게 베푸는 헤세드가 싫었습니다. 헤세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데,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세드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놀랍고 자비롭고 선하신 성품을 드러내주는 단어입니다. 헤세드는 정말 이상하게 반응합니다. 자신을 아들의 자격도 없어 품군의 하나로 여겨달라는 아들에게는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넘치도록 훌륭하고 자격이 넘치는 아들이라고 확신하는 아들에게는 주어 누리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다고 인정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받으시고, 자격이 넘친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거절하십니다. 우리는 다 길 잃은 양, 잃어버려진 은전, 잃어버려진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는 열쇠입니다.

5. 하나님의 기쁨: 죄인 한 사람의 회개
다시 7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아무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오직 자비와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전에는 잃어버려진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채, 오직 자비와 은혜만을 바라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향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분들은 하나님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거나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여러분을 찾아내시려고 2000여 년 전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 한 사람의 회개함으로 누리는 그 하늘의 기쁨을 맛보시려고,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으시려고, 고난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종려주일로 시작하는 이 고난 주간에 우리를 찾으시고 찾으시는 주님에게 찾아지고 주님의 품에 안겨 아버지께 돌아오는 복된 은혜가 이 자리에 계신 여러 심령들 가운데 경험되기를 구합니다. 오늘뿐 아니라, 매 주일 우리가 죄인 한 사람의 회개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고 하나님의 잔칫집이 되는 복된 은혜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