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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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야외예배-가슴 벅찬 찬송을 하나님께!

시편 8: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4-24

말씀내용
다윗이 언제 이 시를 썼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대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동을 시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본 것은 단순히 자연 자체의 영광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보고, 또 느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자연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가슴 벅차게 말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즉 자연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윗튼 칼리지(Wheaton College)의 영문학 교수였던 클라이드 킬비(Clyde Kilby)가 그의 유명한 결심문에 넣었던 내용들을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최소한 매일 한 번씩 나는 하늘을 곧바로 올려다 보며 양심을 가진 인식체인 내가 내 주위와 내 위의 놀랍도록 신비스러운 물체들과 더불어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한 행성 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6. 나는 내 눈과 귀를 열 것이다. 매일 한 번 나는 나무나 꽃이나 구름이나 사람을 그저 쳐다볼 것이다. 나는 그들이 무엇인가를 묻는데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며 그저 그들이 거기 있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루이스가 칭한대로 그들의 '신적이고 마술적이며 두렵고 황홀한' 존재의 신비를 기쁘게 허락할 것이다.

10. 비록 내가 틀린 것으로 판명될지라도 나는 이 세상이 멍청이나 또는 부재중인 지주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오늘 바로 이날 우주의 화판에 한 붓놀림이 더해지고 있으며 머지않아 그 붓놀림이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부르는 한 위대한 화가에 의해 되어진 것을 기쁨으로 이해할 것이라는 가정에 나의 인생을 걸 것이다.

11. 나는 가끔 내가 어릴 때 가졌던 시각의 신선함을 뒤돌아보며 최소한 잠시 동안만이라도, 루이스 캐롤의 말처럼, '순수하고 맑은 표정과 경이감으로 꿈꾸는 눈을 가진 어린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1. 시인의 안목: 천지창조에서 마지막 심판까지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핵심은 시 전체를 통해서 다윗은 천지 창조로부터 마지막 심판 때까지 우주의 역사 전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야를 가질 수 있으면 낙심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3절에서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5절 이하에서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실 마지막 날을 또한 예언자로서 주목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합니다. 순간 순간의 일들로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유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여유로움이 없이 분주함의 노예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없을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인간의 삶은 그런 분주함의 쳇바퀴 속의 삶이 아닙니다. 시인의 여유로움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가지고 살아야 할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유가 있어야, 노래를 부르고, 감동도 받고, 시도 지어보고 할 것 아닙니까? 노래를 불러도 노래방에서 시간에 맟추어서 불러야 하고, 여행을 가도 여유롭게 즐기기 보다는 깃발 쫓아서 뛰어다니면서 감동을 받기 보다는 증명사진 찍어가지고 오고 이런 삶에서는 도무지 오늘 이 시를 제대로 읽는 것도, 하나님을 잘 믿는 것도 요원한 일이기만 합니다. 다윗이 여기서 가지고 있는 이런 영원에 가까운 안목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여유로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자연 속에서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다음인지 그 전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그는 지금 다음의 일정에 쫓기면서 시 한 편을 마감일에 맞추어 내는 심정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우리가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가슴 벅차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랜 만에 돌집과 딱딱한 철제의자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 시를 통해서 다윗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주님의 재림 까지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저 이 한 시간이 빨리 끝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2. 탄성? 찬송?(1,2): “주의 이름이 아름답습니다.” 온 땅에, 하늘 위에 그리고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까지..
시인이 이런 말로 시를 시작합니다. 찬송이라고 해야 하지만, 찬송이란 말이 우리들에게 ‘찬송가 몇 장 부르겠습니다’로 느껴지는 한, 그것은 찬송이란 말보다는 오히려 ‘탄성’이라고 해야 더 우리에게 의미있게 전달될 것 같습니다. 그는 탄성을 지릅니다. 누가 듣습니까? 하나님 들으시라고 그는 자연 속에서 탄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편기자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이렇게 탄성으로 자연에 대한 자기의 시를 시작합니다. 주의 이름과 그 영광이 지상에 어느 한 구석에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그는 말하면서 물론 하늘 위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공감이 되시나요?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라도 미치지 않은 곳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탄성을 발하는 것입니다. 나뭇이파리 하나, 잔디 위에 솓아오른 잡초 하나, 호수와 모든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쏟아지는 빗줄기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이름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만물에 주의 이름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것을 그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즐길 수 있는 자연 뿐이겠습니까? 아무도 찾아보지 않은 바닷속 깊은 해저에 모래밭 조차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다윗은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여 주신 이름입니다. 출 3:14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름 여호와를 주셨습니다. 이 히브리 이름의 뜻은 ‘I am who I am’이란 의미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I am’ 이십니다. 언제나 어디에나 그대로 계시고 존재하십니다.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변하지도 않으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다윗은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에서만 아니라 하늘에서 경배를 받으시고 하늘의 모든 우주 공간에 있는 별들 속에서도 그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석양이 지는 기막히게 멋진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또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별들의 무리를 보신 적도 있으시지요? 그 모든 모습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과 함께 그 영광을 선포하는 듯이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목회를 하는 평생에 건강이 좋지 못해서 종종 알프스가 있는 스위스로 요양을 가야만 했습니다. 한 번은 거기 알프스 산을 바라보면서 이런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장관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그분과 비교할 수는 없네
그분을 보기에는 창이 너무 어둡고
우리의 눈이 너무 침침한 까닭이라네.

구름 위로 머리를 드러내고
수많은 별들과 대화를 나누는 알프스도
그분의 무한한 신성과 비교하면
한줌 먼지에 불과한 것이라네.

눈으로 왕관을 쓴 정상도
영원하신 그분을 드러내지 못하네
그분의 이름만이
고귀하고 높은 것이라네.

측량할 수 없는 깊음도
여호와의 지혜와 지식을 드러내지 못하네
피조물의 모습으로는
영원하신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네.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새기시고
그분의 도장을 피조물의 이마에 찍으셨다네
그러나 토기장이는 그가 만든 그릇보다 아름답다네
여호와, 그분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보다
더욱 아름다우신 분이라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여호와를 담지 못한다네
영원하신 분이 쉬기에는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라네
눈사태나 천둥 소리도
그분을 온전히 찬양하기에는 소리가 부족하다네.

그러할진대 내 어찌 그분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으리요
내 어찌 그분의 이름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요
조용히 그분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겸손히 그분을 경배할 뿐이라네.

다윗의 마음에 또 한가지 들어온 생각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과 힘을 이 세상에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나타내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2절입니다.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 자신이 여기서 놀라는 것은 그 방식입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써 원수와 대적하는 자들의 입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입니다. 약한 자를 통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능력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입니다. 인간에게 아무런 영광이 돌아가게 하시지 않으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당신께 ‘호산나’하며 찬송을 하는 무리들을 대하여 분노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바로 이들이 강한 자들이요, 주의 대적이며, 원수와 보수자들인 것입니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대답하셨습니다.
마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여러분, 하나님께 대적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이나 한 말입니까? 어떻게 어떤 존재가 하나님을 대적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젖먹이를 통해서,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서 그들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8:3). 하나님의 나라는 젖먹이들의 나라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나라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권세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런 방식을 기뻐하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3. 묵상(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창조물을 내가 봅니다.”
다윗은 이제 3절에서 ‘내가 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면서 말하기를,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라고 합니다.

다윗은 마치 창조의 순간에 있었던 것처럼 그의 모든 상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바라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이란 표현은 그야말로 모든 미미한 피조물 하나 하나에게 미치는 조물주의 섬세한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이 세상의 미미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서 무심코 만드신 것이 없다고 다윗은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미천한 피조물일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디자인과 솜씨가 배어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더기를 더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구더기를 도대체 왜 만드셨을까? 그런데 최근의 한 뉴스는 당뇨를 치료하는데 구데기처럼 효과적인 것이 없다고 합니다.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던 날들은 얼마나 놀라운 날들의 연속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창세기 1장을 그냥 읽어내려가지만 사실 하늘의 보좌와 온 우주에서는 얼마나 놀랍고 흥분되는 장관이 연출되었겠습니까?

A. 창조의 순간에 우주의 분위기(욥 38:4~7)
욥기는 바로 그 순간을 우리에게 약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기 38:4~7입니다.
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準繩)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세계창조보다 먼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관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은하계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 좀 봐’ 하시면, 천사들은 우레와 같은 소리로 ‘와~!’하며 탄성을 자아냈을 것이며,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불렀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영물인 천사가 물질계의 창조를 보게 되었을 때 그 놀라움이 어떠했겠습니까?

B.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을 보고 기뻐하신다(시 104:31; 19:1~2)
천사들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시 104:31; 19:1)
시 104: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시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어떤 인간의 눈길도 손도 미치지 못한 곳에서 피었다 지는 꽃 한 송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고 즐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C. 자연(피조물)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주된 메시지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의 모든 피조물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주된 메시지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미미한 것에서 거대한 것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거대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은하계의 거대한 벽은 약 5억 광년의 길이에 2억 광년의 넓이 그리고 일천 오백만 광년의 두께라고 알려져있다. 1광년은 거의 6조 마일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의 계산과 상상을 초월한 영역일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다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들이다라고 다윗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4. 참된 묵상은 겸손을 가져온다(4).
이 정도로 자연의 모든 피조물들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참된 묵상은 언제나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겸손으로 이끌고 가지 못하는 묵상은 그것이 성경말씀을 묵상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참된 묵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말합니다.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A. 사람(=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간)을 심방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사람’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인간의 연약함을 특별히 강조하는 단어가 선택되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에노쉬’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약하고 비참한 사람,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영광을 보니 늘 깨어지고 상하는 자신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무엇이길래’라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같은 인간들을 생각해 주시고, 또 인자(사람의 아들)가 무엇이관대 권고하시냐고 묻습니다.

이 거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얼마나 의미있는 존재인가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울창한 숲에서 나뭇잎이 하나 떨어진다 해도, 숲의 영광에는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소멸된다 해도 이 광활한 우주의 영광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런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방문하셨습니다. ‘권고하다’라는 단어는 ‘방문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과는 어울릴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 자기의 집을 찾아온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사물에게도 특별하게 생각해서 방문한 것이 없는 듯 한데, 자기에게 찾아오신 것을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나를 찾아오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목사의 심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제가 전에 부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 심방을 하면서 느끼게 된 것인데(물론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마는) 부목사가 심방을 하는 것보다는 담임목사가 심방을 가는 것을 크게 다르게 생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심방을 오면 영광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것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심방하셨다는 것이 바로 여기서 다윗이 쓰고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까? 왜 찾아오셔야 했습니까? 여러분 같은 존재에게 위대하신 창조주께서 꼭 찾아오셔야 할 이유가 있으십니까? 다윗은 그것을 노래합니다. 감격하면서 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나를 찾아오시다니’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B.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방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히 2:5~9)
사실, 이것은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방문(심방)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여자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가리켜 왕이 자기 땅에 자기 백성에게로 온 사건이었다고 씁니다(요 1:11). 조물주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낮아지셔야 했습니다. 비천해 지시지 않고서는 우리 죄인을 찾아오실 수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장에서 바로 이것을 시편 8편을 인용하고 해석하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편 8편의 이 본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찾아오시려고 낮아지시고 비천해 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죄인의 모습을 하시고 찾아오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 비천하고 약하심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5. 영광과 존귀로 관씌워주시는 하나님(5~8):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5절입니다.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아니지요. 예수님과 함께 우리 인간, 에노쉬 즉 깨어지고 연약한 우리들을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으로 씌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존재로 높이신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한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면에서 천사보다 못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셔야 했을 때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한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 우리가 부활하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는 천사보다 위대한 존재로 다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다시 하늘의 보좌에 앉으시고 마지막 날에 여기에 쓴 대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행하시게 될 것입니다.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8: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魚族)과 해로(海路)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그날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거나 그리스도의 통치 밖에 있는 존재는 우주 안에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 그대로입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의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그 때에(계 21:5)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피조물 위에 영원히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선지자로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이 시를 썼을 때, 그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감동이 밀려올라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윗은 겸손했기에 은혜를 알았고 은혜를 알았기에 감동하며 이 찬양, 이 탄성을 주님께 가슴 벅차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은 겸손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6.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찬송을 부르자”(9).
그래서 다윗은 마지막으로 다시 처음 그 탄성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8: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는 가슴이 터질 듯이, 가슴 벅찬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 이름이 온 땅에 미치지 않는 구석이 없으며 너무나 아름다우신 분, 그 영광을 하늘 위에 두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정서를 나누게 하십니다. 다윗과 함께 노래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다윗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오늘 이 시간 허락하여 주사, 우리의 입술을 열고 가슴 벅찬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