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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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종려세례주일: 구하고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1:9-13, 15:1-7, 베드로전서 1: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3-16

말씀내용
오늘 저는 목회를 시작하고 가장 기쁘고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세례, 그 영광스러운 순간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납니다. 처음 태어나서 사람의 자녀가 되고 두번째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두번째 태어나는 것을 중생 혹은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처음 태어난 사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태어나는 중생의 증거를 찾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성령님께서 일으키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죠이선교교회가 설립되던 처음부터 계셨던 고태경 자매님과 김석현 형제님을 옆에서 지켜보고 기도할 때 가졌던 최고의 거의 유일한 관심은 바로 중생?거듭남?이었습니다. 그럴듯한 많은 조짐들도 없지 않았지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결국 두 분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최근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두 분의 삶을 비슷한 시기에 거듭나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두 분의 거듭남을 인정하면서 주님께서 명하신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두 분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며, 죠이선교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이래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첫 열매를 주신 것입니다.

A.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하는 사건(롬 6:6,11; 골 2:11; 갈 3:27~28)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 사람의 거듭남을 공식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확인하고 공포하는 의식입니다. 이로써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중생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다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와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불가시적 교회(invisible church)로 구분합니다. 죠이선교교회는 가시적 교회입니다. 가시적 교회는 참 성도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멤버십을 분명하게 한다고 해도 완전무오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시적 교회는 바로 거듭남으로 세례를 받은 참 성도들?하나님만이 아십니다?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두 분은 세례를 통해서 참 교회의 성도들과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태어날 때 피로써 맺어지는 관계를 초월하는 강력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다 하나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B. 천국의 시민권을 받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식적인 출발(빌 3:20)
오늘 이 세례의식은 마치 천국의 시민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천국시민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두 분께 특별한 축하를 드립니다.

2.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눅 11:9~13)
저는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생각한 핵심적인 본문을 누가복음 11장에서 찾았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A.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심으로써 응답하시는 하나님
구하지 않는 자에게, 찾지 않는 자에게,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 자에게 하나님이 만나주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 빠져서 자기의 의와 교만을 한껏 드러내고 사는 인생에게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마음이 부유한 자가 하나님을 만났거나 천국을 얻은 예는 없습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는 결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간절함을 가지지 않습니다. 가진 자는 구하지(ask) 않습니다. 만족하는 자에게는 추구함(seek)이 없습니다. 모든 열쇠를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천국문을 두드리지도(knock)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 앞에까지 왔다가도 두드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옆에까지 와계시지만, 그분에게 아무 것도 구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들어와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도 천국문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삶에 만족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고 살기에?기준이 너무나 낮아서?옆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망, 구원에 대한 소원이 없으면 구하지도, 찾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켜 보았던 지난 1년여 이상의 시간 동안 두 분은 정말 구하고 찾았으며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눅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B. 하늘 아버지의 최고의 선물인 성령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신 것은 성령님이란 선물이었습니다.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고 싶어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없어서 못 줄지언정,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 아버지의 마음을 비유하여 하늘 아버지이신 당신의 선하신 의도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가장 큰 선물은 이 세상에서 부를 얻어 사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며, 권력을 점하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욕심없이 화목한 가정이루고 사는 것만도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기 자녀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왜 성령님이 최고의 선물인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하여 보내주신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큰 선물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 주신 하늘 아버지는 궁극적으로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원수요, 죄인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정결케 해주시고 죄를 사하여주신 후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어주실 수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최초의 사역입니다. 어떤 사람의 영혼입니까? 바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영혼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보다 더 고차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제와 그 영광과 기쁨에 참여하게 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회복시키시고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로 본래의 삼위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말입니다.

C. 성령을 주시는 방식: 구하고 찾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벧전 1:23; 롬 10:17)
하나님께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들에게 어떻게 성령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주십니다. 거듭남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 속에 심겨짐으로써 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단지 기도의 행위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서 그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거듭남은 거짓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성경은 체험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거듭남은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입니다. 모든 것이 다 썩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썩지 아니할 씨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인간의 말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전하는 한, 그리고 예수를 믿고자 하여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영혼들이 계속해서 그 말씀 앞에 머무르는 한, 하나님께서는 거듭남의 역사를 그 영혼들 가운데 주실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저의 목회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확실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신 두 분이 바로 그 열매입니다. 실력있는 목사가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목사라 할지라도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무르는 삶을 사십시오. 그 말씀이 영혼을 거듭나게 하며,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십시오.

3.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관한 이야기(눅 15:1~7)
오늘 또 하나의 성경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거듭남과 회심의 진리를 온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 본문을 택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A. 99마리로 만족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 비유에 나오는 목자는 100마리의 양을 돌보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숫자를 세어보니 한 마리 양이 없습니다. 그 목자는 그래도 99마리의 양이 있으니까 괜찮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있다가 내일 돌아오겠지 라고 편하게 생각하면서 잠자리로 가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10 마리도 아니고 한 마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목자는 그냥 잊어버리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눈 앞에 있는 99마리의 양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가 만족하지 않는 것은 99마리가 적은 수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한 마리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B. 잃어버린 양 1마리를 찾으러 가시는 예수님: 당신이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찾으신 것이다.
목자는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아마도 저녁 해가 뉘엇뉘엇 지기 시작했거나 이미 어두움이 덮였을 듯 한데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나섭니다. 아니, 주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는 어두워졌기에 오히려 더 서둘러서 급한 마음으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섭니다. 99마리를 들에 두고 찾으러 나갔다고 표현하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에 대한 목자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표현이 아닙니까? 여기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신 말씀은 강조적인 어법입니다(15:4). 즉,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저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만나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했으니까, 찾았으니까, 문을 두드렸으니까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 목자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가 잃어버려진 자들이었으며, 우리 스스로가 잃어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도 오래 전에 이미 우리를 찾아 나서셨으며, 우리를 찾을 때가지 우리를 만나실 때까지 찾으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찾아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였지만, 사실 알고 보니 예수님께서 나를 먼저 찾으셨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받으신 두 분은 분명히 구하고 찾고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예수님께서 두 분을 찾아 나서셨고 두 분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림으로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옆에서 참고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다 그렇게 찾아서 주님을 만난 자들이기 이전에, 주님에 의해서 찾아진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C. 대조적인 두 가지 반응
그래서 그 목자는 결국 잃은 양을 찾았습니다. 그 반응이 무엇입니까? 너무 기쁜 나머지 어께에 그 양을 메고 돌아옵니다(5). 이 표현은 목자의 그 양을 향한 돌봄의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잃어버려져서 그 마음이 어땠을지를 생각하는 목자는 그 양을 어께에 매고 ‘내가 다시는 너를 잃어버리지 않을거야’라는 마음을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i. 즐거움과 기쁨의 잔치(5~7, 9~10, 23~24, 32)
이제 즐거움과 기쁨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잔치를 벌이며 즐기자고 합니다. 이 잔치는 아마도 잃은 양 한 마리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비용을 들인 잔치가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살진 소를 몇 마리나 잡아야 하는 잔치가 되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잃은 양 하나의 가치와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모두가 다 잔치의 이야기들입니다. 잃은 양 하나를 찾은 잔치, 잃어버린 드라크마(은전) 하나를 찾은 잔치, 그리고 잃어버렸던 둘째 아들을 찾은 잔치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주님께서 하신 것일까요? 잃은 양 하나의 가치를 설명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이 일차적인 의도였을 것입니다. 잃은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렸던 아들이 상징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바로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은 한 영혼이 하나님께 죄인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사건이 얼마나 큰 천국의 기쁨인지를 설명해줍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천국의 기쁨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ii. 원망과 질투(1~2, 28~30)
그러나 모두가 다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래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1~2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모습에 불만을 품고 원망을 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업신여기는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이것이 천국의 잔치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세 개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왜 이것이 기쁨의 잔치가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마지막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돌아온 동생을 인하여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하는 형의 모습을 특별히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는 그런 분이 계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례가 뭐길래 이렇게 떠들썩하게 이러는가’라고 혹시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이 없으시길 바랍니다마는, 그렇다면 그런 분에게 주님은 이 잔치에 기쁨으로 들어오지 그러냐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단순히 원망과 질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씀한 주님 자신의 기쁨, 천국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시간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D. 무감각한 자들을 기쁨의 잔치로 초대하시는 하나님(6~7, 9~10, 32)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천국 잔치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너도 들어가서 함께 먹고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기쁨, 하늘 아버지의 기쁨,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알고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초대이며 이 초대 역시 회개를 통해서만 응답할 수 있는 초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두 분의 세례식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하시며 진정한 회심에 이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4.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의 길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오늘 세례를 받으신 두 분 그리고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분들을 향하여 권면하고자 합니다.

A.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임을 기억하십시오.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십시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B. 좁은 길로 행하는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좁은 길로 행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미 좁은 문으로 들어선 분들은 계속해서 좁은 길을 걸어서 천성문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어려움도 있고, 고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약속이 있는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 좁은 길을 걸어가십시오.

C. 시험을 이기는 삶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끊임없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며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넉넉히 모든 시험을 이기게 하실 것이며, 그 환난 가운데서도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심으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D.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신뢰)으로 행하는 삶
마지막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여기까지 베풀어주신 은혜, 우리로 죄인됨을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구주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은혜가 참으로 크지만, 앞으로 하나님께서 장래에 베풀어주실 은혜를 생각하고 그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살아가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서 좌우되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