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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들

누가복음 15:11-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6-15

말씀내용
저는 하나님께서 왜 스스로를 우리에게 아버지로 계시해주셨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셔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원형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가정이라는 인류 최초의 제도의 가장 기초적인 관계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그 사람이 성숙하든 성숙하지 않든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면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습니다. 배우지 않은 채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본 것은 자기 아버지를 통해서 본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새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했듯이 하는 것을 많은 아버지들이 느끼게 됩니다. 자기 아버지를 닮은 아버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아버지로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아버지됨은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소명: 사람의 소명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이것은 하나의 소명이다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의 소명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앉아계시는 여자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말은 한편 아버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모호하지 않고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사람의 소명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더우기 아버지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하는 분들에게 이 말씀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피할 수 없도록 다가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같은 아버지가 되어야 할 소명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의 가정들이 가지는 많은 문제의 근원은 이런 아버지들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이해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아버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하나님 같은 아버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도 원리는 동일합니다. 대통령은 있어도 정치인들은 있어도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를 가진 가정,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들을 가진 교회, 그런 아버지들을 가진 사회는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께서 오늘 이 본문으로 전하는 설교를 이미 여러 번 들어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여러 차례 이 본문을 설교했습니다. 오늘 아버지주일에 특별히 이 본문을 선택한 것은 이 본문이야말로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아마 가장 드라마틱하게 감동적으로 설명해주는 본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 같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 댓가를 치루는 자유: 아버지는 아들을 구속하지 않고 자유를 준다.
잘 아시는대로, 문제가 많아 보이는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당차게 요구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미리 나누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12). 구약의 법에 의하면 장자가 다른 아들들에 비해서 유산을 두 배로 받게 되어있었는데(신 21:17), 그렇다면 아마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의 1/3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나이는 당시 남자가 결혼하게 되는 적령기가 18~20였으며 그가 싱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 열 일곱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배경적 지식이 얼마나 정확한가가 아니라, 그 아들의 요구가 아버지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는 독립해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버지는 그 아들의 성향도, 그리고 그 아들이 실패하고 말 것임도 어쩌면 알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저 착하고 순수하지만, 머리가 모자라는 그런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이 이야기 속의 아버지가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댓가를 치루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한국의 전통적 가족 사회 속에서 경험한 많은 아버지들의 모습은 권위적이고 말이 적고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으며 자녀와 최소한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전반적으로 볼 때 감정을 표현할 줄 알고, 자기의 권위 속에 자식을 구속하지 않으며, 자유를 주고 있고, 말이 적지 않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비록 그 자유가 실패로 그 아들을 인도할지라도 그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가능하면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그럼으로써 자기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이 부모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성향이고, 미숙한 사람에게 힘이 주어졌을 때 주어지는 모습입니다.

여기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기르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각양 조항으로 구속하셔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는 이 말씀 속에 표현됩니다.
창 2:16b~17a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마라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심히 왜곡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셔서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길을 막으시고 인간을 끊임없이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묶어두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율법에 구속되는 것이고, 아주 고리타분한 것이며, 답답해서 못 사는 그런 삶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전통적인 유대인 사회에서도,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에서도, 아니 인간 사회에서는 참 특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권위와 통제 속에 잡아두심으로써 안심하고 만족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써 인간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가르치시고 믿음을 배우게 하시며 성장해가도록 도우십니다.

이런 자유는 결코 속편한 자유는 아닙니다. 댓가를 치루는 자유입니다. 그 댓가는 아들 편에서 볼 때 쓰라린 실패의 댓가이며 아버지 편에서 볼 때에도 기다림의 고통이란 댓가를 지불하게 하는 자유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 말씀 속에서 생각해봅니다. 자녀교육의 원리나 공식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과 통제를 통해서 자녀를 기르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빗나간 자식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습니까? 여러분, 눈물의 기도 보다는 구속이 더 쉬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기다리는 고통 보다는 통제하는 것이 더 쉽겠지요? 자녀의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내 뜻 안에 자식을 묶어두는 것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하나의 가정이라고 볼 때 그렇습니다. 교회가 어떤 억압할 수 있는 권위와 힘으로 사람을 구속하는 방식으로 신앙이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듯이, 교회에서도 그 원리가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권위를 사용해서 사람을 통제하고 구속함으로써가 아니라 댓가를 지불하고 기다림의 고통과 눈물의 기도로 자유를 주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가 되는 길입니다.

3. 은혜: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니라 아들 자신이다.
아버지가 예상했던대로, 재산을 나누어준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가버렸고 자기가 원하는대로의 허랑방탕한 삶을 살면서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마침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인생에서 아마도 처음으로 궁핍함을 경험하게 됩니다(14). 아버지 아래서 살 때 무슨 궁핍함이 있었겠으며, 그가 자기 몫을 받아가지고 있는 동안 무슨 궁핍함을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아버지와의 관계도 단절되었고 그는 먼 나라에 홀로 있었으며 의지하고 살던 돈까지도 끊어지자 드디어 궁핍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의 일군으로 들어가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해도 그 마저 얻을 수 없는 것이 이 둘째 아들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의 풍성함을 한번도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어버지의 집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도 몰랐으며, 감사한 적도 없이 살아왔었는데, 이런 비참한 처지 속에서 그가 이제 비로소 생각하는 것이 과거에 아버지 집에서의 삶의 행복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아들은 이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는 비록 아버지가 자기를 용서하고 일군의 하나로만이라도 받아주신다면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18~19).

그런데 정작 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경험하게 된 것은 자기의 믿음대로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일군 중 하나로 여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보여준 것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성품과 태도는 은혜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넘치는 호의와 사랑’이 은혜입니다. 자격으로 말하자면, 둘째 아들은 유산을 다 받았기에 더 이상의 몫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아버지를 등지고 떠났기에 다시 받아달라고 말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분노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했을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에게 보여진 아버지의 태도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죄인을 대하시는 태도를 한 마디로 성경은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을 때 뼈저리게 배우게 된 것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원했던 것은 금의환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떳떳하고 당당하게 서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얼마나 은혜와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아들이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생을 살되, 금의환향하듯이 성공해서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꼈을 때, 그냥 자기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실패자로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 “지금까지 내가 내 힘으로 버티고 살아보았는데, 얻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님 아버지는 은혜로 영접해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직도 제 힘으로 잘 버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멋진 것 하나 터질 겁니다”라고 말하고 사는 인생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런 삶의 모습은 첫째 아들의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자기는 너무나 잘 하고 있습니다. 불효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언젠가는 터지게 되어있는 풍선같은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바라시는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4. 기쁨: 아버지의 기쁨은 진정한 결속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기쁨은 진정한 결속이 주는 기쁨입니다. 무엇이 아버지와 아들의 결속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은혜입니다. 은혜가 결속을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원하는 기쁨은 바로 이런 결속으로부터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결코 이전에 집에 살면서 이런 결속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당연했습니다.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기의 권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한 권리 주장을 하는 관계 속에서는 결코 은혜가 설 자리가 없고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계 속에서 은혜라는 것이 매개가 될 때 우리의 관계는 결속어린 관계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런 결속이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을 자기의 권위 아래 묶어두거나 통제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이런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댓가를 지불해야함에도 그 아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먼 훗날 주어질 결속의 관계를 바랬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먼저 발견하고는 불쌍한 마음이 가득해서 뛰어나가 그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마 이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이런 포옹은 거의 처음이 아니었을까요? 이전에도 포옹을 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었을지라도 아들의 마음은 귀찮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고, 결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포옹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비록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아들과 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결속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원하고 원했던 기쁨이었습니다. 아들과 결속을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정이란 제도를 주셨을 때 이런 관계들이 가정에서 일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와 우리 사이에,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이런 결속을 깨뜨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정에서 하나님은 다시 이런 결속어린 관계들이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이루어진 결속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쳐주는 귀한 훈련의 장입니다. 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이겠습니까? 우리와 우리 사이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따지고 자기 주장하고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은혜입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 잘못을 이제 알겠냐고 묻지 않습니다. 아들이 먼 나라에서 혼자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앞으로 잘하라는 훈계도 없습니다. 은혜가 허물을 덮어줍니다. 은혜가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들은 은혜가 만들어내는 결속의 관계를 추구합니다. 그 결속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속이 없다는 것은 줄이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전류가 흐른다고 해도 저리로 연결되어 흘러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하나님의 선한 것이 아들에게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가고 그 흘러들어간 것이 그 사람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살리는 것을 보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바로 이야기 속의 아버지가 원했던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기쁨을 얻기 위해서 댓가를 치루는 자유를 아들에게 주었고 기다림의 고통을 감내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5. 능력: 아버지는 아들을 만들어낸다.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능력이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진정한 아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버지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아버지는 진정한 아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모두가 능력이 없습니다. 자식을 기르다보면 무력감과 무능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우리 역시 기다림의 고통을 감내하며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과 하나님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만이 참된 아들들, 참된 자녀들을 만들어내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6. 가정같은 교회의 경건한 아버지들을 소망하며
교회가 또 하나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정입니다. 이 가정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경건한 아버지가 많은 교회가 되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경건한 아버지와 같은 분들과 그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자녀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는 관계적인 용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은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리고 그 관계가 연장되어 나와 너 사이에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아버지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들, 오늘 이 본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같은 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을 닮은 아버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모든 아버지들은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모습과 태도를 통해서 배우고 닮아가십시오. 경건한 아버지가 되십시오. 기다림의 고통과 눈물의 기도를 여러분의 권위적인 통제와 바꾸려는 유혹을 이기십시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기도와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서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교회에서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가 되기를 바라십시오. 경건한 아버지들이 많이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관계들 속에 은혜가 채워지고 결속이 이루어지며 그 기쁨을 누리는 교회가 되게 하십시오. 더 이상 아들의 삶 속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경건한 아버지들,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들이 우리의 가정마다, 교회마다 넘쳐나는 날을 저는 소망합니다. 그런 아버지들을 통해서 우리의 육적인 영적인 많은 자녀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들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것이 이런 아버지들을 통하여 영적인 자녀들에게로 흘러들어가서 그들을 살게하고 또 다른 자녀들을 살게 하는 은혜로운 일들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일어나는 교회를 그려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소명임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