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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하나님의 친구

출애굽기 33:11, 신명기 34: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6-29

말씀내용
하나님의 친구 출 33:11; 신 34:10

1. 하나님과 친하십니까?
여러분은 오늘 아침 이 본문 말씀을 대하실 때,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친구처럼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로 친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십니까? 성경이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말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질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 외에도, 저는 욥이 고백하는 말 가운데 참 인상적인 대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욥 29:4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 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성경에 하나님을 섬겼던 수많은 인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던 특이한 표현을 우리는 이 구절에서 보게 됩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되’라는 표현입니다. 저는 성경 전체를 보면서 누구보다도 모세라는 인물에 많이 끌리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구약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줌으로써 유대교를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애굽 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신비스럽게 그 정체를 숨는 듯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광야로 내쫓겼고 거의 포기한 듯한 인생을 살다가 인생 노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서 그의 인생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 이야기가 성경의 첫부분의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원했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목전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그 많은 이야기 보다도 그의 기도의 삶에 대해서 성경이 살짝 제시하는 이 구절에 마음을 모아보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와 같이 여겨질 만큼 하나님과 친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입니다. 애굽에서 살았던 처음 40년의 인생도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중반 40년을 보냈던 때에 그는 거기서 그렇게 깊이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성경을 보면 그렇다는 증거를 갖기도 어렵습니다. 그의 삶을 변화시켰던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위해서 호렙산의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 앞에 섰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을 깊이 배우기 시작했고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한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어느 시간부터,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혹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 가운데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이 아침에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인생이 모세와 같이 그런 복된 인생으로 나아가는 깊은 갈망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과의 사귐과 그 친밀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오스왈드 샌더스(Oswald Sanders)는 그의 책 Enjoying Intimacy with God 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정도에 따라서 네 가지 차원 혹은 써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밖에 있는 써클은,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을 때 백성들이 하나님의 가시적 임재를 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출 19:11~12을 보십시오.
출 19:11 예비하여 제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신 산으로 접근할 수는 있었지만, 그 산에 올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모세만 가까이 올라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출 24:2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세번째 원이 있습니다. 일단의 그룹에게 하나님은 조금 더 가까이 올 수 있도록 허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특별한 체험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들은 모세를 포함하여 아론과 그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명이었습니다. 그 체험은 이것입니다.
출 24: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모든 백성들에게 허용된 것은 아니었고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체험은 영원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체험을 했던 사람들이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 모두에게 산정상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 가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출 24:13~14을 보십시오.
출 24:13 모세가 그 종자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모세는 아론과 및 장로들을 그곳에 기다리게 하고 더 높은 산정상으로 올라가는데 여기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한 문장이 있습니다. 모세가 혼자 올라가지 않고 그 종자 여호수아와 함께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모세 외에는 아무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던 그 길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행비서로서 따라 올라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나중에 모세의 계승자로 여호수아를 지목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야말로 모세 다음으로 하나님께 가장 친밀하고 가까이 다가갔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 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진 밖에 쳐놓았던 회막(tent of meeting)에서 기도를 마치고 진으로 돌아왔지만, 여호수아는 여전히 그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얼마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렸고, 사모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안에 있는 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장 가까이서 누리는 차원입니다. 출 24:15~18을 보십시오.
출 4: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결국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친밀하게 만나기 위해서 산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단 한 사람 모세 뿐이었습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도록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 속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40주야를 하나님 앞에서 지내게 됩니다. 모세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렸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계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 질문은, 여러분은 그냥 그 자리에서 인생을 보내다가 마지막을 맞이하시겠습니까?

3. 모세, 기도의 사람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기도를 더불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사람들은 위대한 지도자라고 말하고,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소개하실 때 사용하시는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친구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보통 영광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참 친구는 친구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갔던 사람, 하나님과 사귀었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비록 그의 인생은 아마 인간적인 눈으로 보자면 성경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 가운데 하나일지 모릅니다. 적어도 그의 인생의 마지막 40년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결여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야 하는, 또 마음대로 사임할 수도 없는, 정말 고난으로 점철된 삶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고된 인생을 견디게 만들어주었는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보다, 그가 하나님의 친구였다는 사실보다 더 명확하게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더욱 고달파 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비방하자,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렸습니다(출 5:22~23).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모세를 비방하며 모세와 다툴 때,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출 17:4). 그는 출애굽하여 강력한 아말렉의 전사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손을 들어 기도함으로써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하는 경험을 합니다(출 17:8~16).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겨 범죄했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께 올라가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시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달라고 그는 구했습니다(출 32:31~32).

우리는 모세의 삶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을 관찰하게 되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키고자 하였을 때, 모세가 취했던 행동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12사람의 정탐군이 가나안에 대한 보고를 하게 되었을 때 백성들은 부정적인 그들의 보고를 듣고 나서 한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민 14:5). 이후 고라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말을 듣고 엎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민 16:4). 또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공격하면서 말하기를, 모세가 모든 위기의 상황에서 했던 일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께 자기의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모세로 하여금 이런 깊은 경건과 하나님께 나아감과 하나님과 말씀드리는 것을 알고 배우게 하였다고 느끼십니까? 또 무엇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정도의 제한된 친밀함만을 가지고 살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모세와 우리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4. 모세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든 요인들
모세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든 요인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조심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다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런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 속에 내 인생 가운데 모세와 같은 은혜를 누리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는 갈망과 소원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은혜이며, 사모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 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을 무위로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공식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사람들의 신비롭고도 정직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A.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결단(히 11:24~26): 비록 방법은 미숙해도 하나님은 동기를 보신다.
우리가 모세 편에서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히브리서에서 하나님께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히 11:24~26을 보십시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가 믿음으로 결단을 했다고 하는 것은 언젠가 하면 바로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서 서서 그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하나님의 장래에 상주심을 바라보고 애굽의 보화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나이가 40세가 되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방법의 면에서는 애굽인과 이스라엘 사람의 싸움에 간섭하여 애굽인을 몰래 쳐죽이고 다음날 두 이스라엘 사람의 싸움에 관여하다가 살인사건이 발각된 줄을 알고 바로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하게 되는 식이었지만, 그의 동기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서 고난을 함께 하기로 그가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믿음의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행위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외모를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동기를 살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행위가 옳아보여도 동기가 틀리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겉이 괜찮으면 다 용납됩니다. 믿음으로 살겠다는 결단이 없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친구는 같은 마음을 품습니다.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서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듯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겠다는 분명한 동기가 없이, 아무리 종교생활에 열심을 품는다고 해도 그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B. 광야의 삶과 고난: "즐거움은 감사를 잊게 하지만 고난은 기도하게 만든다."(George McDonald)
모세는 그의 중반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왕궁에서 보낸 처음 40년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낮아짐 자체였습니다. 모세가 왜 광야로 가게 되었습니까? 그가 선택한 방법, 비록 동기는 옳았을지라도 그가 선택한 방법의 미숙함 때문인데, 그런 미숙함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모세가 왕궁에서 왕자로 길러짐을 받으면서 가진 그의 교만함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아닐까요? 그의 자신감 말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으로부터 나온 것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열심과 인간의 노력과 행위와 모든 수고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일 때 그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자기의를 쌓게 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왕궁에서 보낸 40년의 세월에 준하는 광야의 40년을 그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고난이었고 낮아짐이었습니다. 낮아지지 않고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낮아짐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런 점에서 George McDonald의 말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즐거움은 감사를 잊게 하지만, 고난은 기도하게 만든다.” 광야는 우리의 기도처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 인생에 광야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낮추사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그 기간은 무려 40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인생의 1/3이 광야에서 마치 허송세월하는 것처럼 흘러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길다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모세의 삶 전체를 보십시오. 그의 120년의 삶은 버릴 데 없이 하나님께서 쓰신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애의 한 순간도 낭비하여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모세 자신에게는 긴 시간의 광야라고 느껴졌을지도 말입니다.

여러분, 광야의 삶과 고난이 없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자리로 가기 위해서, 영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가 거기서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낮추시는데로 낮아지는 것이며,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내 계획을 도와주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을 보는 삶(출 3:6; 33:18; 요일 3:2)
모세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변화시키는 가장 주효한 방법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하나님을 보게 하심으로써 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에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 나무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가 두려워 했던 것은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었습니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그래서 그는 얼굴을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그에게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비록 신현으로 나타난 불붙는 떨기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세는 두번씩이나 시내산 정상에서 40일 40야를 하나님을 뵈었던 사람입니다. 두번째로 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비추어져서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출 34:29~35).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그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구했던 성경에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가 구했던 것은 하나님 자신을 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하게 그는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미 산정상에서 하나님과 40일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큰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향한 쉬지 않는 열심과 갈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성공이나 번영이나 성취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것들을 두번째의 자리에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가 포기할 수 없었던 첫번째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참으로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갔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텐데, 그 근거는 그의 모습을 그래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를 볼 때 변화된다는 말씀입니다.

D.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출 34:29~35; 고후 4:4~6).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설명을 좀 붙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마치 기도하다가 무슨 신비적 환상을 본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성경이 너무나 분명하게 하나님을 본다라고 말할 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도 동일한 이치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면서 살아간다, 믿음이 성숙해간다는 것은 다 성도가 하나님을 봄으써 변화되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고후 3~4장에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난 2000년 동안 신약교회 안에서 그렇게 역사하셨고 구약 시대에도 그것은 동일했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5. 하나님과의 친밀함(Intimacy with God)을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다.
여러분, 여러분 인생에 가장 중요한 비전은 무엇입니까?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내 인생에서 누리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모세와 같이 친구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성도에게 이보다 더 큰 자기 인생 개인의 비전이 어디 있을 수 있습니까?

A.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다(요 15:14~15).
저는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하신 한 놀라운 말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요한복음입니다.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명하는대로 하는 것으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마음을 여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분의 명하시는 것을 여러분의 삶에서 순종하면서 살아가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감정이 이끄는대로, 마음의 생각대로 자신을 내맡기고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을 인생의 비전으로 삼은 사람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격려가 되는 것입니까?

B.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인생의 성패를 결정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든지, 그것이 여러분 인생의 성공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영향력있는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도 여러분의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았는가에 따라서 그 성패가 결정된다고 성경은 일관성있게 증거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이 가지는 관계가 다른 모든 인간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그보다 더 영향력이 있고, 그보다 더 끈끈한 관계라고 여러분은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다면, 이것을 경험하고 누리면서 살아감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교회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십시오.

C. 천국의 소망은 하나님과 누리는 친밀함에 있다(계 7:15; 22:4).
여러분, 천국의 소망은 도대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줍니까? 천국의 소망은 하나님과 누리는 친밀한 교제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계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이것이 참으로 천국의 소망이라면, 하나님과 시공간의 제약이 없이, 그리고 우리의 죄악이라는 한계가 없이 교제하고 사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 교제는 얼마나 친밀한 사귐이 되겠습니까? 천국의 기쁨은 바로 그 사귐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도록 허용하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구약시대를 살았던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우리가 사모할만한 삶의 모습입니까? 과연 이것보다 더 큰 여러분 개인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6. 교훈과 적용
마지막으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얻는 교훈을 정리합니다.

A. 하나님과의 더 친밀한 관계를 사모하라.
여러분, 하나님과의 더 친밀한 관계를 사모하십시오. 10년을 믿어도, 20년을 믿어도 하나님이 그냥 멀리 계시는 어떤 신 정도라고만 느끼신다면 어찌 그것이 제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른채 죽음을 맞이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 죽음이 평안한 죽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목회 초기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냥 죽음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죽음 말입니다. 저의 목회가 가치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기셨던 영혼들이 영광스러운 죽음을 죽으실 수 있도록 그 영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러분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더 가까운 관계로 가기를 갈망하십시오. 종종 우리 인생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찾아오지만(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기 위해서 댓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 은혜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B. 댓가를 지불하라.
그러므로 여러분, 댓가를 지불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혹시 이렇게 잃어버린 기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고통스런 기회가 왔지만, 결국 여러분 자신의 불순종과 영적 부주의함과 영적 게으름에 의하여 놓쳐버린 일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기회를 잡으셨습니까?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은, 비로 여러분의 영혼이 아무리 메마른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를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도>를 쓴 Forsyth가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이 무기력한 상태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영과 통찰이 없는 까닭에 복음을 마음으로 깨닫고 더욱 배워가지 못하며, 그저 설교에서 받는 감흥에 일희일비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대면하여 말씀해주시는 그 깊은 경건, 하나님의 친구로 여김을 받는 그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