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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고통 속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57: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09-27

말씀내용
고통 속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이 제목은 과거에 서편제라는 영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딸이 창을 잘 하기 위해서는 한을 품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 양아버지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게 하는 한약을 달여먹여서 창을 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송화의 창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었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게 되는 고통 속에서 부르는 노래는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고통 속에서 부르는 노래를 이 시편에서 봅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시편에 있는 수많은 시들을 다윗이 썼는데, 적지 않은 시들이 슬픔과 고통 속에서 쓴 시들입니다.

1. 다윗이 당한 곤경과 슬픔
다윗이 처한 형편과 상황을 우리는 그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이 시편의 제목에 그 상황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알다스헷’이란 히브리말은 ‘멸하지 마소서’라는 뜻인데, 다윗은 아마도 자신의 생명이 끊어질 수 밖에 없을 상황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멸하지 말아달라고 구하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윗이 이 시를 쓴 상황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유없이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 쫓기면서 여러 차례 굴에 숨어야 했습니다. 굴에서 쓴 시 가운데 유명한 것이 시편 34편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멋진 말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지금 또 다시 굴에 있습니다. 굴이 서늘해서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의 생명은 경각간에 있고, 굴은 그저 숨을 수 있을 뿐 도망할 수 없는 막힌 곳이며, 쉬고 잘 수 있기에는 너무나 음침하고 음습한 곳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다윗이 굴에 있었다는 말은 고통과 곤경과 슬픔 중에 있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무 것도 그를 기쁘게 할 만한 상황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위기이고, 쫓김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누가 다윗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도리어 쫓기는 다윗을 의지하는 자들 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상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말이 또 있습니다. 그는 ‘재앙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1). 인생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항해라고 할지라도 그 인생 가운데서도 재앙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시기를 지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쓸 때, 바로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삼키려는 자들의 비방 속에 처해있었습니다(3). 사방에서 다윗을 삼키려는 자들이 다윗을 비방하면서 다윗을 쫓고 있는 상황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4). 다윗은 자기가 굶주린 사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 처럼 느꼈습니다. ‘불사르는 자’라는 말은 사실 ‘굶주린 짐승’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짐승 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사자 같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빨은 창과 살이어서 다윗을 찌르고 또 찌를 수 있는 무서운 무기들입니다. 저희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아서 다윗의 심령을 깊이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는 무기입니다. 이쯤 되면 다윗이 어떤 형편과 상황 가운데 있는지를 우리는 그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나를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줄 때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다윗이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선한 사람들 마저도 그렇게 밖에는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정신이 온전해도 아주 온전한 상태에서 실제로 다윗을 잡아죽이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 틈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넘어지게 하려고 그물과 함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6). 이런 모든 모습들을 보는 다윗의 마음은 비통한 것입니다. 6절에 억울하다고 표현한 것은 자신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런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한 말인데, 비통한 심적 고통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이 시를 쓴 다윗이 처한 상황이 곤경과 슬픔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어느 사람도 살다보면 이런 유사한 상황 속에서 처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런 슬픔과 곤경을 만나지 않는다고 성경이 약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이 기억한 것
다윗이 이런 곤경과 슬픔 속에서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무엇을 하기 전에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기억했습니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은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고 할 때 남자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기억한다’는 뜻을 가진 자카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남자는 기억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그리고 나아가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기억하라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이런 곤경 속에서 처하게 되었을 때, 기억할 것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무엇을 기억했습니까?

A. 재앙이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1).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곤경 속에서 깊은 침체를 겪게 되고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재앙이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는 이 재앙 한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 재앙이 결코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 재앙 죽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재앙으로 말미암은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재앙이 지나기까지’라는 표현은, 내가 죽는 날까지 이 재앙이 계속된다고 해도 이 재앙이 결코 나의 죽음과 죽음 이후까지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앙이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아도 재앙은 결코 죽음 이후까지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을 병이 걸려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얼마나 합당한 고백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비록 재앙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 재앙이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B.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했습니다(2).
다윗이 기억한 것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2). 이것은 얼마나 담대하고 확신에 찬 고백입니까?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다윗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과 곤경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곤경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이루시는 모든 것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통과 곤경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끝도 목적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압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수단들을 통해서, 이 과정을 통해서 나를 위한 목적을 이루고야 마실 것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서도 이렇게 질문을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증거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을 내게 알게 해주신다면 나는 내 평생 하나님을 위해서 살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은 멀리 자기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는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곤경과 슬픔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게 틀림없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여러분이 곤경 속에 있을 때 집어넣어주는 생각인 것입니다. 곤경 속에서 사단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순간 순간 들어오는 사단의 생각과 사단의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고백하십시오.

C. 인자와 진리로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했습니다(3).
다윗이 마지막으로 기억한 것은 인자와 진리로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 것입니다. 아무리 나를 삼키려는 자들의 비방이 있을지라도 다윗의 마음을 지켜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였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된 용어들입니다. 진리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신 성품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인자 즉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백성을 향해서 그 언약에 따라서 신실하게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틀림없이 성실하게 자기와 언약을 맺으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언약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두 개의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이 비참한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3. 다윗이 행한 것
자, 이제 우리는 다윗이 기억한 후에 무엇을 행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기 전에, 비록 그것이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한 후에 기도하십시오. 기억한 후에 행동을 하십시오. 기억이 없이 하는 모든 기도와 행동은 사실상 얼마든지 불신앙 가운데서 행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의 행위 자체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불신앙으로 울부짖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혹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억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한 순서대로 그가 먼저 기억했듯이, 우리는 기억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A.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했습니다.
다윗이 먼저 한 것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곤경이 찾아오면 숨을 곳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자신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했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숨을 수 있고 피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고려와 생각과 계산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사람의 날개 그늘 아래, 돈의 날개 그늘 아래, 권력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할 수 있습니다. 정말 곤경의 날에, 재앙의 날에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은 사람입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다윗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숨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에 그의 마음이 낙심되고, 오늘 본문과 같이 기억할 것을 기억하지 못했을 때, 그는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가서 가드 왕 아기스 아래로 들어가서 자신을 위장하고 1년 4개월이란 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삼상 27). 다윗의 삶 가운데서 가장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갔던 시간이었습니다. 왜 그가 블레셋 왕에게 피했는지 아십니까?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삼상 27:1). 이것이 열쇠입니다. 그가 이 재앙이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고 결국 자기는 쫓기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이제 하나님도 포기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인자와 진리로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기를 그쳤기 때문에 그는 블레셋 왕에게로 피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려고 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날개 그늘과 돈의 날개 그늘과 어떤 다른 힘의 날개 그늘 아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 자신이 재앙 중에서, 곤경 속에서 어디로 피하시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지금 여러분이 재앙 중에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피하여 계십니까?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날개 그늘 아래입니까?

B.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2).
다윗이 두번째로 한 것은 기도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곤경 중에서 하는 기도는 두 가지일 것입니다. 확신 가운데서 담대하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과, 막연한 바램과 소원을 가지고 불안하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첫째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불신앙의 기도입니다. 신앙으로 나아간다고 할때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억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곤경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실 때, 여러분의 부르짖음이 믿음 안에서 인지 불신 가운데서인지를 확인해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바로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며 인자와 진리로 나를 모든 곤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C.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했습니다(5, 7~11).
처음에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1~2). 이시편의 제목에 있는 ‘알다스헷’이란 말처럼 그는 자기를 멸하지 말아달라고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르짖음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4절에서 그런 기도는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6절에 잠시 나타납니다. 그렇게 부르짖던 다윗의 음성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다고 말합니다(7). 더 이상 흔들리고 요동하던 마음이 이제 다 가라앉았고, 확고부동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자기가 당한 상황이 호전된 것도 아니고, 굴 속에서 있다가 궁궐로 간 것도 아니고, 중한 병을 앓다가 나은 것도 아니고, 경제적 곤궁함에서 성공가도가 열린 것도 아니지만, 그의 마음은 이제 확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생각하기 쉬운 방식은 바깥에서 안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즉, 일이 잘 풀려나가기 시작하고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하면 마음도 그에 따라서 평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흐름을 정반대로 가게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밖의 환경은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고 곤경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에 매이지 않고 그의 마음은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각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마음이 확정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부르짖지 않습니다. 이제 재앙은 지나갈 것입니다. 그는 비록 재앙 속에서지만,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자기를 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는 아마도 이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마음 속 깊은데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높여서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의 흐름을 보면 그런 찬송이 5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자기를 잡으려는 자들을 묘사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내가 노래해야지’라고 결심하고 의식하면서 뭔가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르짖던 중에 갑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찬송을 억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 생활 가운데서 이런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경험해보신 분들은 지금 다윗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것을 알지 못하신다면,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아시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는 7절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

4. 성도는 고통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고통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을 향하여 깨라고 외칩니다(8). 자기가 당한 곤경 속에 완전하게 잡혀있는 성도의 영혼은 깨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지 못하는 영혼은 잠자는 영혼입니다. 그는 잠자던 자기의 영혼을 깨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쓰던 악기들인 비파와 수금도 깨라고 외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깨어난 영혼이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함으로써 새벽을 깨우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결코 혼자서 하나님을 조용히 찬송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겠노라고 말합니다(9). 왜냐하면 자기의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신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을 향하여 자기의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동기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이 섬기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거기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하고자 할 때,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당연히 이 하나님은 나 홀로 찬송할 하나님이 아니시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이 다 찬송을 드려야 할 분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선교는 시작합니다. 선교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어주시는 것은 거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작게는 전도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러분 자신이 감격과 감사로 그분을 섬기신다면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을 갖게 되실 것입니다. 그가 노래하고 찬송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입니다(10). 주의 인자와 진리는 자기를 모든 상황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는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른다고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며 그 영광이고 그 위엄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찬송합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의 곤경으로부터 하나님께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은 온데 간데 없고 구속하신 주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이 자신들의 기도 속에서 경험하는 믿음의 경험입니다. 자기 자신이 여전히 굴 속에서 있든지, 곤경 속에 있든지 상관이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온 세계 위에서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5. 고통 속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 Barbara Johnson
크리스천 작가 중 바바라 존슨(Barbara Johnson)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2007년에 하나님께로 가셨는데, 그녀는 베트남 전쟁에서 아들을 잃었고 다른 아들은 음주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남편도 교통사고로 심각한 뇌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 그녀의 남은 아들이 동성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녀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침체의 깊은 계곡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중에 남편과 함께 동성애 자녀를 둔 가정을 위한 스파툴라 사역(Spatula Ministries)을 시작해서 재작년 하나님 곁으로 가기까지 그 고난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재 나의 삶을 가능케 한 한 가지는 성경의 말씀대로, ‘그것도 지나가리라’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지나간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오늘 깊은 곤경과 고통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다윗이 기억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바라 존슨이 기억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재앙은 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인자와 진리로 자기의 언약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십시오. 이것들을 기억하고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여러분의 가슴 속 깊은데서 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아니 생각할 수도 없었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십시오. 그 찬양으로 새벽을 깨우십시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런 복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