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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가이오, 디오드레베 그리고 데메드리오

요한삼서 1:1-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2-13

말씀내용
1. 오해: 초대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였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요? 오늘날의 교회는 우리가 가보고 경험해보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도 오늘날의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였을까요? 우리는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교회의 상황과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적어도 사도들이 살아있던 시대의 교회였습니다. 교회사에서 특별한 권위를 지녔던 특별한 사람들이며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시대의 교회들에게 특별한 권위를 상징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읽게 되는 서신서들을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그다지 문제가 없는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또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을 보면, 저는 이것이 오늘날 제가 경험하고 보아왔던 교회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무서울 정도로 들곤 합니다. 아니 신약성경의 서신서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너무나도 무서울 정도로 오늘날의 교회가 들어야만 할 적실성(relevancy)이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요한삼서를 택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상고하려고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다음 주일에 있게 될 장로 선출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더 나아가서 초대교회와 지난 2000년의 교회가 경험했듯이, 우리 교회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어느 정도는 짧은 3년의 역사 속에서도 상당히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일을 미리 내다보고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2. 요한삼서의 배경: “교회가 한 지도자에 의해서 사유화되고 있다.”
요한삼서는 가이오라는 교회 지도자에게 개인적으로 쓰여진 편지입니다. 아마 이 가이오는 초대교회의 한 장로였던 것 같습니다. 가이오 장로에게 보내는 개인서신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성령님께서 사도 요한을 감동하셔서 오는 시대의 모든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요한삼서는 매우 실제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성경입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세 사람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편지의 수신자인 가이오 자신이고, 둘째는 그와 함께 한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디오드레베라는 인물입니다. 신실한 장로인 가이오는 디오드레베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면서 교회에서 소수파가 되어 밀려나게 되었고 어쩌면 출교까지 당하는 입장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디오드레베라는 인물에 의해서 거의 사유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번째 인물은 데메드리오입니다. 그는 아마 순회 교사 중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다만 참된 주님의 종이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에 대한 예로서 등장합니다. 이렇게 요한삼서는 세 사람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3. 가이오(1~8): 진리 안에서 행하고 형제를 대접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
아마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격려해야한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나의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디오드레베 장로에 의하여 소수파로 내몰리고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르는 가이오 장로를 향하여 보여주는 마음은 매우 따뜻합니다.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사도 요한의 한 마디 말은 가이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가이오를 위하여 사도 요한이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염려가 없는 듯 합니다. 가이오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복음의 진리를 인내로 붙들고 있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복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는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육적 상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밀려나게 되고,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서 사도는 그의 영혼처럼 범사가 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범사가 다 잘 된다고 하는 형통의 복음을 말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이 복되고 귀한 가이오를 위하여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제자들이 그렇게 진리 안에서 행하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4). 사도 요한이 이것을 어떻게 확인하는 것입니까? 형제들이 와서 증거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기 자신의 주관에 빠져서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말하는 형제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순회하는 교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이 신뢰하는 이 순회 교사들은 가이오에 대해서 그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거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가이오가 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이런 순회교사들을 진실한 마음으로 영접하고 섬겼다는 것이었습니다(5).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 25:40). 그 일은 신실한 일, 즉 믿음으로 한 일이었습니다. 가이오를 만나고 온 모든 사람들은 가이오가 보여준 형제 사랑에 대해서 증거하였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증거는 바로 형제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이오는 그의 행위로써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행위의 열매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순회교사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때, 그들로부터 어떤 사례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7). 그러므로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여러면에서 그들을 영접하고 후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실상 전도의 일에 전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있어서 ‘손대접’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롬 12:13; 딤전 5:10; 히 13:2; 벧전 4:9). 특별히 감독(장로)의 직분을 행함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이었습니다(딤전 3:2; 딛 1:8). 이런 일을 감당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빛도 없고 이름도 없이 섬기는 순회 교사들과 함께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8).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기억해주시는 수고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행한 대접이 하나님께 합당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 그런데 문제는 가이오가 이런 일을 잘 감당하다가 다른 장로인 디오드레베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서 소수파로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4. 디오드레베(9~10):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
디오드레베 장로,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그가 사도 요한이 살아있던 시절에 한 교회의 장로가 되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계열에 있는 루돌프 하르낙이라는 교회사가는 디오드레베가 아시아 최초의 최고 감독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진 자리가 그저 한 교회의 장로였든지 아니면 하르낙의 말대로 아시아 최초의 최고 감독이었든지,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가짜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한 마디로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9). 으뜸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본성으로 행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 교회는 육신의 생각으로 일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지금 사도 요한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 20:26~27). 세상의 원리와 교회의 원리는 매우 다른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육의 정신이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어지러워집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런 식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정치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뭔가를 하는 식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다루고 있는 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욕심을 가진 사람이 장로가 되자, 교회가 어지럽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A. 사도 요한에 대하여 악평을 했다.
디오드레베가 한 일은 사도 요한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교회를 자기의 영향력으로 가지고 가면서 자기를 정당화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리 사도라고 할지라도 사도 요한이 자기를 지지해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을 깍아내려야 했을 것입니다. 사도는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니”라고 말입니다. 교인들과 사도의 사이를 벌려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뜻으로 세움을 받은 사도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곧 주님 자신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B. 형제들을 접대치 않았다.
그는 사도 요한 자신에 대하여 악평을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사도 요한이 보낸 순회 교사들에 대해서도 악을 행했습니다. 순회교사들을 접대해야 하는 것이 그의 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도 요한, 아니 참 사도들과 연관된 진리의 종들을 그는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사도 요한이 요한이서에서 썼던 말을 이용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이서에서 거짓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하기를,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이 1:10,11). 그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라는 말씀을 악용하였습니다.

C. 접대하고자 하는 자들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에 대하여 말하는 이 짧은 구절에서 그에 대한 악행을 조목 조목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순회 교사들을 접대하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그들을 접대하려고 하는 성도들이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교회의 지도자라는 것을 악용하여 참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것을 금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교회의 모든 일에서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으뜸되기를 좋아하는”이라는 표현 속에 이미 담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억제되지 않은 허영의 한 단면입니다.

D. 참 성도들을 파문하였다.
마지막으로 디오드레베가 자신의 지도적 위치를 이용하여 행했던 악행은 참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어쫓은 것입니다. 참 성도들은 참과 거짓을 분별했을 것입니다. 순회교사들이 왔을 때, 그들은 사도들의 서신서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이 참 복음을 전하는지, 거짓 복음을 전하는지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 교사들을 대접하기를 당연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는 그들을 대접하는 일을 금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 참 성도들은 몰래 숨어서 그들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디오드레베가 그 일을 알게 되면 그는 가차없이 이들을 교회에서 내어쫓았습니다.

한 사람의 장로가 잘못 세워졌을 때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오늘 본문은 섬뜩할 정도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5. 데메드리오(12): 뭇 사람과 진리 그리고 사도의 칭찬을 받는 사람
이제 사도는 이런 형편 속에서 내몰리고 있는 가이오를 다시 격려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꺼내는 이름은 데메드리오입니다. 우리는 데메드리오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은 세공으로 우상을 만들어 파는 대규모 우상사업을 하는 업자의 이름이 데메드리오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 우상 사업이 위기에 처할 것을 우려하여 업자들을 충동하여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어떤 성경 학자들은 여기 사도 요한이 칭찬하는 데메드리오가 아마도 그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초대교회의 소중한 일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여하튼 사도 요한은 데메드리오라는 인물을 가이오에게 소개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12).” 사도는 이미 가이오에게 디오드레베와 같이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11). 말하자면, 디오드레베는 믿는 자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야할 길은 그가 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데메드리오의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A. 뭇 사람의 칭찬을 받는 사람
여기 뭇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칭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라 함은 참으로 주님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일차적으로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사도 자신이 디오드레베로부터 악평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일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욕을 당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일입니다. 데메드리오가 성도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 일차적 의미라면, 이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까지도 연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 안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주실 때에도 “이방인들의 목전에서 너희가 내 이름을 더럽혔다”고 책망하십니다(겔 20). 교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예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를 선출할 때,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딤전 3:7). 교회의 지도자, 교회의 장로를 선출할 때 이 기준은 중요한 기준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데메드리오가 그런 조건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B. 진리의 증거를 받는 사람
여기서 진리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동시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지상에 계시던 어린 시절에 대한 누가복음의 묘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어떻게, 무슨 기준으로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님의 주신 모든 말씀에 비추어 그 사람을 판단할 때, 그는 정말 믿음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과 같이 여기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C. 사도 요한 자신이 칭찬하는 사람
데메드리오는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이다라는 판단은 사도 요한의 판단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사도 자신이 이 사람 데메드리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는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라고 말함으로써 가이오에게 소개하는 이 사람, 데메드리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6. 교훈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이 장로 가이오에게 쓴 개인적인 서신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게 하심으로써 성경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신 것일까요? 사도의 권위가 살아있던 시대에도 이런 잘못된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졌으니, 너희가 교회를 섬길 때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라, 대충 해라 하는 것이 의도였을까요? 물론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교회에 주신 성령님의 의도는 한 교회가 지도자를 세울 때, 목사나 장로를 세울 때, 신중에 신중을, 기도에 기도를 통하여 선출하라는 경계의 말씀으로 주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교회에 지도자를 잘못 선출함으로써 파생되는 결과가 교회에 얼마나 치명적이며, 참된 성도들을 얼마나 큰 고통으로 몰아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 개인의 전유물이 되거나 장로들의 전유물이 되는 듯한 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곤 합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 자신이 살아있던 그 시대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점에서 늘 마귀의 공격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마귀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교회를 넘어뜨리고 성경적인 교회가 되지 못하도록 공격하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을 잘 세우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하고서 이 일에 있어서 만큼은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때로는 이런 저의 생각이 너무나 확고해서 적잖은 어려움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이면 교회의 첫 번째 장로님들을 선출하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참여하는 교회의 멤버들은 그저 준비없이, 자기의 기호에 따라서 투표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세움을 받게 될 분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분들인지를 분별하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분들이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분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의 멤버로서 투표를 하게 되실 여러분이 분별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다음 주일에 하게 될 이 일은 죠이선교교회의 장래에 매우 결정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가이오 라는 초대 교회의 한 장로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데메드리오라는 삼중의 칭찬을 듣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이오와 같은, 데메드리오와 같은 장로님들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지도자, 뭇 사람과 진리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의 칭찬을 듣는 지도자들을 주께서 세워주시옵소서! 아멘.”

그러나 이것만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교회 생활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가이오나 데메드리오와 같이 사람들과 사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만한 삶이 있는가 하면 디오드레베와 같이 사는 동안에는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살았다고 할지라도, 나름대로는 뭔가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마지막 날 주님의 칭찬을 받는 일이 되지 못할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모든 일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소중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알아주시는 수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