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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우리들의 에바브로디도를 위하여

빌립보서 2:25-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4-03

말씀내용
교회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고 선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행 1:8). 여기서 사용된 증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순교자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martyr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제자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증인이라는 단어의 뜻이 순교자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말씀들을 차치하더라도 신약 교회의 탄생과 기원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을 뒤집어 놓을 만한 핍박을 일으키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교회였습니다. 박해를 받아 흩어진 성도들이 흩어진 곳에서 할 수 있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증인이 된다는 말은 적극적이고 일차적으로 입으로, 말로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증인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인가를 입증할 수 있는 신뢰성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가진 복음,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할 것을 강조했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더욱 확증될 수 있는 선한 삶을 요구했습니다. 증인이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가 하는 증언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 뿐 아니라 교회가 공동체로 존재하면서 의식해야 했던 것은 언제나 그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드러나는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조금 더 근본적이고 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교회는 자기들만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만족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땅끝 모든 족속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일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거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도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든 핍박을 견뎌냈고 심지어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다 빼앗겨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일을 빼앗길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자신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정말 그런가? 오늘날의 교회는 그들 스스로가 왜 존재하는지 정말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일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2. 다양한 형태의 수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초대교회에서 이 일과 관련하여 발생한 한 사건과 인물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어주신 성령을 받아서 세워진 초대교회는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상당히 깨닫고 있던 교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난한 중에도 상당한 물질적 도움과 기도와 다방면으로 사도의 선교사역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 이들의 모범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고후 8:1~5).

A. 사도들과 복음전도자들(엡 6:20)
초대교회의 선교를 보면 그 일선에 섰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개척선교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함”이라고 말합니다(롬 15:20). 바울 사도와 같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계를 다 내려놓고 복음 전도자가 된 사람들이 초대교회에는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헌금을 했고, 이런 이들을 대접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B. 기도의 후원(엡 6:19)
이런 일선에 서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도들이나 복음 전도자들의 배후에는 기도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들에게 자신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곤 하였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라고 에베소 교회에 부탁을 했습니다(엡 6:19). 복음의 사역 자체가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사도를 통해서 들었고 또 스스로 체험한 바 있는 교회들은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기도는 사도의 복음 전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C. 재정적인 후원(빌 4:16)
말씀드린대로 재정적, 물질적 후원이 기도하는 교회들로부터 따라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특히 빌립보 교회의 후원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라고 말하는데 여기 ‘한 번 두 번’이란 표현은 ‘거듭 거듭’ 보냈다는 말입니다. 이 가난한 교회가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사도를 아버지와 같이 여겼고 사랑했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의 복음 전도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D. 연락을 위한 사신들: 두기고(엡 6:21~22, 골 4:7)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에 특별히 주목할 어떤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연락을 위한 사신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사도의 사역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습니다. 전화나 인터넷과 같이 현대적 통신 수단이 없었던 당시에는 이런 사신들의 존재가 중요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위한 서신을 썼을 때, 그 서신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 사람들도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두기고입니다. 그는 사도가 에베소서를 썼을 때 그 서신을 에베소 교회에 전달해준 인물입니다(엡 6:21). 골로새서의 전달자도 바로 이 사람, 두기고였습니다(골 4:7). 이들에게 진실성은 매우 중요한 자질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편지 뿐 아니라, 소식을 통해서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가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두기고를 가리켜,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그를 향한 가득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형제’라는 말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무엇보다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이었고, 단순한 편지 심부름꾼에서 지나 많은 소식들을 자신이 보고 경험한대로 전달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두기고와 같은 사신들은 선교사들에게는 힘과 위로를 주었고, 교회에게는 선교를 향한 기도와 열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 에바브로디도, 사도를 향한 빌립보 교회의 사랑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기고와 같은 류의 사역을 했던 또 한 사람을 소개해줍니다. 에바브로디도라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의 배경이나 그가 언급되는 배후의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그를 설명하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

A. 사명: 재정적 전달(빌 2:25; 4:18)
그의 사명은 감옥에 갇혀 고생하는 바울 사도를 위해서 빌립보 교회가 보내고 싶어하는 사랑의 물질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희(빌립보 교회의) 사자로 나(사도)의 쓸 것을 돕는 자”였습니다(빌 2:25). 사도는 4:18에서도 반복해서 말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빌 4:18).

B. 됨됨이: 사도가 인정하는 신실함(빌 2:25)
그의 사람됨에 대해서 사도는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의 인격이 아니라 그의 신앙에 대한 표현입니다. 사도는 그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라고 표현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이 빌립보교회의 선물과 물질을 가져다주는 사람이기에 선교사인 사도에게 주는 자로서 행세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언제나 쌍방통행입니다. 그것은 형제애입니다.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 뿐 아니라, 선교사와 현지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형제로서 바울 사도를 대하였습니다. 사도와 함께 수고했고, 함께 군사된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했습니다(딤후 2:3~4). 그는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자입니다. 그리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를 군사로 부르신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자입니다. 사도 자신이 그랬고 에바브로디도도 그랬습니다. 사도는 그가 가져다 준 빌립보 교회의 선물과 물질을 인하여 기뻤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기쁘게 했던 것은 에바브로디도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C. 돌발상황: 질병(빌 2:26~27)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서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된 것입니다. 병으로 죽는 일이 많이 발생하던 고대의 상황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된 에바브로디도가 정작 염려했던 것은 자기 자신의 건강과 삶이 아니라 자신을 파송한 교회를 향한 염려였습니다(빌 2:26).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병든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랬지만, 결국은 알려지고 말았고 또 이것 때문에 에바브로디도가 염려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를 도우라고 보냈더니 병이 들어서 돕기는커녕 사도에게 짐만 되었다면 그것은 자기를 보내준 빌립보 교회에게 심히 미안한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사경에서 건져주셨고 이로 인하여 사도의 근심도 다 벗겨주셨습니다. 비록 그가 죽음의 위기는 벗어났지만 사도는 더 이상 그를 데리고 있는 것 보다는 그가 빌립보 교회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듯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라고 말한 것입니다(빌 2:25). 그리고 이렇게 고생한 그를 다시 보게 되면 그를 염려하던 빌립보 교회도 기쁨이 더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빌 2:28).

D. 존중받아야 할 일군(빌 2:29)
그래서 사도는 이제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빌립보서를 함께 써서 보내게 되는데, 여기에 에바브로디도가 생각보다 빨리 가게 된 이유를 쓰는 것이고, 그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또 존귀히 여겨줄 것을 특별히 부탁하고 있습니다(빌 2:29). 그는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일군이라는 것을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자신이 더 중요한 일군이고,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은 그의 심부름꾼 정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함께 형제된 자요, 함께 군사된 자며, 함께 수고하는 동일한 그리스도의 일군인 것입니다. 누가 크고 누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일의 특징입니다. 이 말은 큰 일은 충성스럽게 하고 작은 일은 대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배제합니다. 크든 작든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일을 맡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구하는 것은 충성입니다. 바로 이 에바브로디도가 그런 인물이라고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자들을 우리는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 그리스도의 일=사도를 섬기는 빌립보 교회의 일(빌 2:30)
우리가 이 인물에 대해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말씀은 30절입니다. 이 구절은 그의 충성심의 동기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과 사도 자신을 섬기는 빌립보 교회의 일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즉 교회가 사도 바울을 사랑하여 선물과 후원금을 보내는 일과 가서 사도를 도와주라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일을 그는 그리스도의 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맡긴 일이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일, 그리스도께서 맡긴 일이고 그리스도께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병에 걸려서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충성스러운 태도를 보여준 이유라고 사도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게 됩니다. 그 일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도 있고 띄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중요해 보이는 일도 있지만 하찮아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일을 어떻게 여기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일로 여겨지는가 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이 특별히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할 이유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4. 우리의 에바브로디도들!
오늘 초대교회 선교 역사의 주무대 뒤편에서 섬겼던 에바브로디도라는 인물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그리고 특별히 우리 시대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선교사도 필요하고 목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믿음과 태도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세계선교의 한 몫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상황을 소상하게 사도 바울에게 전달했을 것이고, 또 감옥에 있는 사도의 형편을 빌립보 교회에게 상세하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진전이 어떻게 복음의 불모지에서도 증거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선교사 사이를 더욱 돈독하고 기도 속에서 교제하는 관계로 이끌어갔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자들,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참 필요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간직한 자여야 할 것이고, 그는 그 보혈에 적심을 받은 자여야 할 것입니다.

A. 죠이선교교회의 에바브로디도들
우리 교회에 이런 인물들이 필요합니다. 어느 교회나 다 두기고나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이런 진실한 인물들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교사님들이 복음 사역의 부르심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도 나와야 합니다. 그는 근시안적인 시야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자기 동네 밖에 모르는 사람도 아닙니다. 세상을 알고, 다른 민족들을 알며 선교사님들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맡겨준 일을 그리스도의 일로 여겨 자기 목숨도 돌아보지 않는 충성된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선교사님들의 입장에서는 교회와 연락을 하려고 할 때, 교회 안에 제대로 연락을 담당할 사람 조차 없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선교사만 많이 파송하는게 다가 아닙니다.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낳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여름에 멕시코에 단기선교여행을 갑니다. 이 여행이 우리 교회 장래의 에바브로디도들을 낳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많은 에바브로디도들을 낳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해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의 현장을 눈으로 보아서 눈이 열리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을 품게 되면서(이것은 우리가 제공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불러내실 것입니다.

B. 기독교 가정의 에바브로디도들: 가정은 왜 존재하는가?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기독교 가정의 에바브로디도들입니다. 가정은 교회의 최소단위입니다. 기독교 가정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소위 기독교 가정이라고 하는 가정들은 자신의 가정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 가정의 존재 이유는 교회의 존재 이유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기독교 가정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습니까? 오늘날 우리 가정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특히나 미국과 같은 세계 최강의 부유한 나라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면서 배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은 다 이럴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자라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의 주인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인 교회나 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합니다. 로널드 사이더(Ron Sider)의 지적대로, 오늘날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가난한 시대에 살아가는 부유한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의 부유함은 우리들의 것이니까 우리가 즐기고 살면 그만이라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철학이며, 여러분은 그런 철학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이번 여름 단기선교여행이 몇몇 가능한 가정들에게는 생애 최고의 가족휴가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집니다. 휴가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비용은 아깝지 않아도 왠지 단기선교여행에서 사용하는 비용은 아깝다고 생각이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가정이라면, 부모님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기독교 가정입니다. 기독교 가정은 교회를 나오는 가정이 아니라, 복음의 원리가 그 가정의 기초요, 철학이 된 가정입니다. 자녀들과 부모들이 선교현지에서 한 저녁에 함께 앉아서 우리 가정은 어떤 기독교 가정이 되면 좋을지를 함께 말하고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5.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교회, 이제 시작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단 하나, 영원 전부터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을 전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오직 교회에게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교회를 하나로 만드셔서 죠이선교교회를 새롭게 만들어주신 것은 바로 이 사명을 보다 잘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압니다. 죠이선교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기독교 가정이라면 여러분의 가정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에바브로디도들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장래의 에바브로디도들을 위하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했듯이 우리는 다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길을 예비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우리 기독교 가정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는 이 길에 복된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