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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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설교 - 불편한 진실, 하지만 좋은 소식

로마서 3:21-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4-10

말씀내용
1. 복음이 가져오는 두 가지 극단적 반응
여러분에게 복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여러분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복음이 미친 영향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복음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복음의 본질과 관련해서 물을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대답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인류의 역사에서 너무나도 놀랍게 극단적으로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내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은 생명, 아니 육신의 생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대적 가치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서 살았고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아니고는 설명이 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영원한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또 다른 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냥 싫어하지 않고 거의 삶을 바쳐서 복음을 싫어했고 복음을 없애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또는 개인적으로 그 복음에 대해서 경멸하는 태도를 가졌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 때문에 어떤 사람들을 향한 미움과 경멸의 태도를 가지기도 합니다. 저는 과연 인류 역사에 어떤 것이 이렇게 인류 전체를 둘로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때론 정치적 주장이나 인물에 대한 지지 여부에 따라서 사람들이 나뉘어서 싸우기도 하는 것을 보지만, 그것도 그저 인물이나 시대가 지나고 나면 시들해지곤 하는 것이고 한 지역이나 국가에 속한 일부 사람들에게나 영향을 미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짧게는 지난 2000 여년 동안 쉼없이 이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적어도 이 복음이 들려지는 곳에서는 극단적인 환영과 적대를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복음도 정치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냉담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일 인간이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듣게 된다면 그는 결코 감격과 감사와 환희의 반응 아니면 불쾌감과 적대감의 반응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그런 극단적이라고 할만한 감정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건대 그것도 역시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본질상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련된 말이라기 보다는 거친 말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그것은 최종판결을 기다리는 최고재판정에서의 사형선고문 또는 무죄선고문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기분 나쁜 말이 될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서 최고의 좋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가령, 그 재판정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판결문은 결코 피고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돌려 표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직선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사형을 선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복음을 ‘불편한 진실, 하지만 좋은 소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좀 더 직선적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진실 하지만 믿어지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이라고 좀 더 길게 표현했으면 합니다. 복음은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 반응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불쾌한 것을 찾자면 복음 보다 더 불쾌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자고 하면 이보다 좋은 소식은 결코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우리가 진실이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들
하나님이란 존재는 인간에게 그 자체로 불편합니다. 뭔가 책임져야 할 어떤 대상, 내 위에 존재하는 어떤 신을 생각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설상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있어도 요구하지 않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없어도 안심하고 무시할 수 있고 실수하는 인간의 연약을 너무 잘 이해해주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매우 사랑이 넘치는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실 테니 내 잘못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넘겨주실 것이라고 그림을 그리곤 합니다. 설령,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지옥으로 가야할만큼 잘못된 존재라는 생각은 여간해서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론 하나님, 천국, 지옥 같은 개념들이 자신을 괴롭힐 때도 있지만, 그냥 넘겨버리면서 확률상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진실과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복음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 짚어도 대단히 잘못 짚은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을 짓밟기 시작합니다.

3. 성경이 말하는 불쾌하고 불편한 진실들
성경이 말하는 요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진실이고 하나는 인간에 관한 진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진실들입니다.

A. 하나님에 관한 불편한 진실들
먼저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i.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창 1~2).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모든 우주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책임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왕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은 그리 유쾌한 소식은 아닙니다.

ii.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롬 2:12,16; 14:10; 고후 5:10; 딤후 4:1).
성경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되 모든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딤후 4:1). 이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 소환장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전체를 다루시는 법정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법정에 소환된다는 것 자체가 그리 유쾌한 소식일 수 없는데,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이 하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은 좋은 소식일 수 없습니다.

iii.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출 34:6~7).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부여하고 싶어하는 성질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무서운 결과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비록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셔서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형벌 받을 자를 결단코 면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수 없으십니다. 공의로우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에 우리의 마음의 모든 숨은 동기를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모든 인간에게 좋은 소식일 수는 없습니다.

B. 인간에 관한 불편한 진실들
하나님에 대한 불편한 진실들은 인간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과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복음을 극도로 싫어하고 하나님을 증오하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에 관한 불편한 진실들은 실로 그것을 듣는 인간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i. 인간은 죄인이고 인간의 의로움이란 더러운 누더기다(롬 1:32; 3:23; 사 64:6).
첫째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관한 불편한 진실은 인간이 죄인이며 인간의 의로움이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도, 우리가 깨끗하게 살면 그만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23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여 지옥으로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가 아닌 사형 선고를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로마서 1장은 말합니다(롬 1:32). 그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자기 사정을 말할 수 있을 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서게 되면 인간은 직감적으로 자기 인생의 그 알량한 의로움이라는 것들 것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대로 ‘더러워서 걸치고 있을 수도 없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64:6). 여기 말하는 인간의 의란 것은 이 세상을 살았던 가장 깨끗한 어떤 인간의 의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선행과 교양과 모든 자존심과 잘난 모든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성경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불쾌하게 만드는 진실입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혹은 도덕적으로 잘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모험입니다. 침뱉음을 당하거나 욕을 먹을 수 있는 말입니다.

ii. 인간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있다(롬 1:18; 3:19; 엡 2:3).
두번째로 인간에 관한 불편한 성경의 진실은 인간이 죄인이기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인류 위에 머물러 있어서 그 진노가 그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이 스스로 풀려날 수 없는 율법의 저주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 아니면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다 범하였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운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예외가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인간의 양심에 새겨놓으신 율법이 이미 창조때부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입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물어질 것이고,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처할 것입니다. 사도는 또한 에베소서에서 인간은 본질상 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진노를 받을 대상들)라고 선언합니다(엡 2:3).

iii. 지옥은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은 죄인의 마지막 운명이다(막 9:43, 48).
인간에 관한 불편한 진실 세번째는 회개하고 믿지 않은 죄인의 마지막 운명은 영원한 지옥이라는 사실입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도 유쾌할 수 없는데, 만일 내가 지옥으로 가야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저주의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것을 말합니다. 교양있는 사람에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그 누구에게라도 그가 만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에서 보내게 될 것을 성경은 주저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주를 듣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4. 성경이 말하는 믿어지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 살 길이 있다!
여기까지가 복음, 좋은 소식이 주어지기 전의 나쁜 소식입니다. 불쾌할지라도 이 나쁜 소식이 없다면 그에게 복음은 결코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다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고 제게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지옥가는게 두려워서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복음이 좋은 소식으로 들려질 수 있는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여전히 이 불쾌하고 기분 나쁜 이야기가 마음을 상하게도 하지 않고,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는 식으로 넘기는 사람이야말로 복음을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복음의 은혜를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분이 지금 어떠십니까? 그리스도가 없다면 조금 전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다 하나같이 여러분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예외가 없습니다. 이 불쾌하고 기분 상하는 저주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성경은 좋은 소식을 들려줍니다. 그것은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지옥을 면할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완전 무죄로, 완전히 의로운 자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1절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합니다. 본래 이 구절은 헬라어로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시작됩니다. 이것은 이전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 전환점입니다.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 도덕적 수준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 다른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롭다는 판단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나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열쇠는 믿음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얻으신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길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A. 하나님께서 구주로 오셨다(눅 1:34,35; 히 4:15; 요 1:14): 신인(God-man).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로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몸을 입고 나셨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분은 온전히 아담의 자손으로 죄인으로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없으신 인간, 즉 완전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이 연약을 체험하셨고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신 분입니다(히 4:15).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요 1:14). 그는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예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신인으로 말입니다.

B. 대속: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남김없이 받으셨다(마 1:21; 막 10:45; 마 26:27~28; 요 10:15; 갈 3:13).
그분이 오셔서 하신 일의 중심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있습니다. 그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나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남김없이 받으신 죽음이었습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사도 바울은 설명합니다(갈 3:13).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것은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와 진노를 받아 끊어져야 했던 것을 주님께서 대신 조금도 감함이 없이 다 당하신 것을 보여주는 절규입니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도록 주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로 여기셨습니다(고후 5:21).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교리를 미워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피흘림의 제사들, 하나님께서 공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면서도 당신의 의로우심을 조금도 양보하거나 훼손하지 않으시는 방법이 바로 이 대속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형벌은 의롭게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24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 곧 복음입니다. 우리가 들은 모든 불쾌하고 기분 상하는 이야기를 뒤집어놓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좋은 소식입니다. 아니, 그 불쾌한 진실 덕분에 더 좋은 소식이 되는 복음입니다.

5. 반응: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나님께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있는 모든 것,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다 공급해주셨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대속 사역을 완전히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남았습니다.

A. 믿을 때 일어나는 일: 위대한 교환-그리스도와의 연합(벧전 3:18)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길로는 의롭게 될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기 선행이나 자기 의의 모든 시도를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부딪히고 나아가 그분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그리스도를 믿을 때, 위대한 일이 일어난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교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되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의 죄와 죄에 대한 형벌을 다 그리스도께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치 흠 없으시고 온전하시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듯이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 조차 없는 사람을 보시는 것과 같이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B. 진정한 회개는 죄에 대한 마음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갈 5:17).
그러나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회개하면 죄가 떠나가고 유혹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죄와 편안하게 동거하지 않고 죄와 싸운다는 것을 뜻합니다(갈 5:17). 이것은 신자가 사는 날 동안에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참 회개는 죄에 대한 마음의 태도의 문제이지 행동의 변화가 우선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고 싸우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참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되면 그에게 영적 생명이 주어집니다(엡 2:1,4~5).이때 변화가 즉각적으로, 빠르게, 반드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삶은 반드시 변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변화의 시작은 성령께서 허락하신 새 마음, 거듭난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C. 믿음은 신뢰다.
회개와 함께 복음을 믿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입니다. 죄에서 구원하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그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내시고 확증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죄인을 향하신 사랑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세울 것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고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사실을 붙잡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사 제가 받은 죄의 모든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남김없이 다 받으셨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형벌이 그리스도께 완전히 의롭게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복음이 이미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까? 믿어지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저를 잡아주지 않으시면 저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십니까? 여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해주셨기에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회개하고 돌이켜 이 복음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