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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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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그리스도를 아십시요

빌립보서 3:7-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8-07

말씀내용
1. 교회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아니 오늘 이 시대만이 아니라 교회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교회가 필요로 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겠습니까? 오늘 벧샬롬 교회는 어떤 사람을 절실하게 필요로 할까요? 그는 재력이나 학력이나 권력으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을 잘 알고 잘 가르치는 사람도 아니고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도 아닙니다.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들을 잘 품어주는 사람도 아닙니다. 전문적인 카운셀러도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전도자를 가장 필요로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복음전도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말하는 일차적 의미는 아닙니다. 복음전도자의 최고의 자질이 무엇일까요? 복음전도자는 전도폭발 훈련의 모든 단계 훈련을 마친 사람입니까? 어떤 특정한 전도훈련과정을 이수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탁월한 친화력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전도자는 실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분명한 말로써, 전도의 방식으로써 전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전도 훈련을 필요로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자여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복음전도자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말하고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복음전도자를 가장 필요로 한다고 한 말은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 잘 아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열심이 교회를 세우는게 아닙니다. 지식 없는 열심은 교회를 허물게 됩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더 온전하게 말하면 성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그리스도를 아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왜 성 삼위 하나님을 알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알라고 한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성 삼위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하신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방법을 모르는 것이 현대 교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도의 다양한 훈련이 부족한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전도훈련방법이 아니라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을 알고 향유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처한 심각한 위기의 본질입니다.

2.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의 기대에 근접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역사는 이 일에 있어서 그만한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누군가 사도 바울을 인터뷰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묻습니다.
Q: 이제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선생님께서 평생을 사시면서 추구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내심, 질문자는 세계의 복음화와 같은 것을 생각했다)
A: (바울 사도의 대답은 너무나도 의외였다.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대답이었고, 너무나도 개인적인 수준의 답변이었다.) 네, 저에게는 다메섹의 회심 사건이 있은 후, 지금까지 주님을 섬겨오면서 불변하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더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제가 버리지 못할 것, 희생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까지 저의 선교의 동기가 되었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지 않고서는 결코 복음전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2000년의 교회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을 흠모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인생에는 공통된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20세기의 순교자, 짐 엘리옷은 대학시절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습니다. “Lord make my way prosperous, not that I achieve high station, but that my life may be an exhibit to the value of knowing God.” (주님, 제가 가는 길을 성공하게 하옵소서. 제가 어떤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아니라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드러낼 수 있는 전시관이 되도록 제 길을 성공하게 하옵소서.)
엘리옷의 삶은 그것을 보여준 너무나도 탁월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29년의 짧은 삶은 마치 전시관처럼 드러나, 그의 글과 전기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주 그리스도를 알고싶은 욕망을 품지 않을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3.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이제 저는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학생일수도, 젊고 평범한 직장인일수도, 어떤 영역의 전문인일수도,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이거나 경영인일수도, 평범한 주부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을 누군가 인터뷰한다면 그리고 바울 사도에게 물었던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바울 사도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어떤 대단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소유하는 특별한 가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가치입니다. 비록 많은 점에서 부족함을 심히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
본문은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이나 비결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강의가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A. 포기(우선순위)
그 첫 번째는 포기입니다. 이것은 삶의 우선순위와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선순위가 분명한 삶입니다. 이 고백은 말이 아니라 삶이었습니다.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인 사람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가 분명치 않아서 언제나 삶이 뒤죽박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분명한 삶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잡아야 할지 분명히 아는 삶입니다.
우리의 한정된 시간, 한정된 육체의 에너지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겠습니까? 하루의 시간 중 우리가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심혈을 기울여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커서 나를 압도하고 나의 시간을 다 차지해도 부족하다고 느낄 만큼 그리스도를 추구한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저 최소한의 기독교적 의무를 행하면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가 하는 가치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디에 돈을 사용하는가가 우리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정직하게 드러내줍니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늘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말로만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제가 이런 헛된 내용 없는 말들의 향연이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어떤 정상적인 것들을 무익한 것으로 혹은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삶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이었는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에 시간과 마음을 드리지 못하게 하는 그 일은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그 일은 죄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삶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 여러분의 시간과 마음과 심지어 물질을 빼앗아감으로써 여러분이 여분의 것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무턱대고 교회 활동에 헌신해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B. 순종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순종입니다. 10절을 보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말합니다. 또 17절에도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순종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냥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들이 제자로 예수님을 따라온 한참 후의 일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순종,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음으로서만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그저 책상 위에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순종으로 반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 생활을 했다고 해도 그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이 일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예수를 믿어도 예수를 잘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치명적인 이유는 예수님을 순종하여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순종은 철저한 자기 부인이며 십자가 짐입니다. 우리 인생은 수없이 많은 갈림길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갈등합니다. 여기서 그리고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기의 욕심과 의지를 죽이는 것을 배웁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서 그런 갈림길을 우리가 만나는데 그것이 크건 작건 우리의 전 인생에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갈림길에서의 순종이 한 번 접히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더 쉽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접어두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샛길을 걸어왔다면 원래 처음에 잘못 들어갔던 그 길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가련하게 인정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왔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 이보다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삶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중요합니다. 순종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요구하고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복음은 쉼 없이 우리의 자아를 깨부숩니다. 이 일이 우리의 삶의 일상에서 일어나야 순종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까?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그것을 위해 모든 유익한 것을 해로 여기는 결정을 내릴 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아갑니다.

C. 목적?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세 번째로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목적과 관련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7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말합니다. 그의 목적은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이나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는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 된 삶이 되기를 소원하고 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날마다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5:31).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만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전에는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입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선교사 헨리 마틴은 ‘하나님으로 사는 법’을 간절히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바랬던 하나님으로 사는 삶(living on God)은 자기 성공에 취하여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분의 성품 속에서 영감을 얻고 사는 삶이었습니다. 헨리 마틴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 전부를 통해서 그는 '그것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나의 몫-분복-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은 실로 그에게 한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었고 그리스도였습니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한 그는 이렇게 일기에 적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보낸 시간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낭비되지 않은 값진 시간이었다.” 여러분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께 더욱 붙잡힌 바 된 삶을 사는 것입니까? 목적이 다르면 택하는 길도 다른 것입니다.

D.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복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함?최고의 장애물: 자기 의와 교만
네 번째로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복음, 오직 은혜의 복음, 즉 종교개혁자들이 밝혔던 바로 그 복음의 본질을 날마다 확인하고 그 복음 안에서 자유함과 확신을 얻는 삶입니다. 9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 행위에 의해서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을 통해서 믿는 자에게 전가된 불변의 의 안에서 확신을 얻고 기뻐하는 삶을 말합니다. 여기에 이신칭의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루터가 말한대로 이신칭의는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입니다. 교회 역사는 언제나 이신칭의의 교리를 공격하는 세력과 싸우는 진리의 전쟁이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율법에서 난 의 즉 행위로 말미암은 의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의 사이의 대결입니다. 사도는 4~6절에서 자기가 과거에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신뢰하며 또 자기를 신뢰할 조건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였는지를 말합니다(빌 3:4~6). 이것이 자기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주적(主敵)입니다. 사도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는 과거에 신뢰하던 그 조건들,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의 조건들이 해로운 것, 배설물과 같이 여겨졌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7절에 ‘그러나’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그러나’가 여러분의 삶에서는 일어났습니까? 이 ‘그러나’가 어떻게 우리 인생에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만나는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영접기도를 따라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존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과 회심(회개와 믿음)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는 어떤 결심이나 행동이기 전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신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기 전에는 어떤 영적 변화도 우리 안에서 우리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고 일어날 수 없습니다. 거듭나기 전의 인생은 공통적으로 자기를 신뢰하는 특징을 가집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는 결심과 의지로 죽일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의를 철저하게 깨뜨립니다. 중생과 회심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자기 의가 깨진 성도의 마음은 가난한 심령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약 5:5-6).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복음 안에서 새로워진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싶어하는 자기 의이며 교만입니다.

E. 그리스도를 아는 환경?교회 공동체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환경(컨텍스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나홀로’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용서하고 오래 참으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경험하는 삶입니다(갈 5:6). 영생은 혼자서 구원받아 영원히 사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함께 교제 속에서 누리는 생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씁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2~3).”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의 백성이 더불어 누리는 삶이 영생이고,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골로새 교회에 썼습니다(골 2:3). 그리고 그는 늘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엡 1:18; 3:18; 빌 1:9; 골 1:9~10).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실로 그는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 되기를 사모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바울 사도의 인생에 가장 큰 소원이었고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성취할 선교사역을 넘어서는 비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라도 그는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그가 알았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으십니까? 일평생 사는 동안, 이 복된 고백을 가지고 벧샬롬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 함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