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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성도의 영광

시편 73:23-2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4-02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이 잘 알려진 시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맛보고자 합니다. 이 시에는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아삽은 다윗이 임명한 세 명의 레위 지파 성가대의 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대상 25:1).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1~16)
시인은 자신이 2절에서 고백하듯이 시험에 들어서 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불평으로 시작합니다. “왜 악인이 형통하며, 오만한 자는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없는가?”하는 불평이고(3~5),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난다”는 불만입니다(12). 정작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처럼 느낍니다(14).” 이런 현실은 시인에게 심한 고통이 되었습니다(16). 시인의 이런 불평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도 경험하고 살아가는 현실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것이 맞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도 시인처럼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깨달음(17~22)
이러던 시인이 새로운 각성,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라는 구절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말 그대로, 시인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했던 순간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과 같은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해서 해석한다면,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임종의 뒤에서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많은 불평거리들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자신과 비슷한 문제로 힘들어하는 성도들에게 주는 위로입니다. 두 해석은 모두 합당하다고 할 수 있고,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두 가지 해석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인의 종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17b). 그들의 종말은, 그들이 파멸에 이르고 갑자기 황폐해지며 전멸되는 것입니다(18~19). 시인이 지금까지 불평하고 원망하던 현실은 마치 잠자는 사람이 꾸는 꿈처럼, 잠이 깬 후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장춘몽에 불과한데, 이는 하나님께서 깨신 후에 그들의 형상을 멸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0). 여기서 ‘주께서 깨신 후에는’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무신다는 말이 아니라 시인의 상황이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부르짖어 기도하지만, 마치 하나님은 들으시는 것 같지 않고 움직이시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 사실을 깨닫자, 다시 괴로와 합니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21).” 이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내뱉은 모든 불평과 원망에 대한 회한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불평과 원망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시인이 17절에서 말한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깨닫자 회개합니다. 회개의 결과는 한 없이 달콤할지라도, 그 과정은 쓰디 쓴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의 고백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23~26)
시인의 회개는 이제 시인으로 하여금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을 하게 합니다. 그 고백이 우리가 읽은 본문 23~26절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성도의 고백 가운데 성도의 경건을 드러내주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고백 중 하나입니다.
23절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시작하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후에는 영광으로 자신을 영접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고백합니다. 지금은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교훈으로 인도하십니다(24). 교훈은 지금 당장 실현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궁극은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성도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25절을 고백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아삽이 레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레위 지파에게 하나님은 기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바랄 것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단지 레위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모든 주의 백성에게 이 고백은 확장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 고백을 할 수 없고, 할 의향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시인이 빠졌던 그 시험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찬송가 488장의 가사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 /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세상에 믿던 모든 것이 끊어질 날이 옵니다. 이 찬송시는 성도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시인이 25절에서 한 고백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찬송시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믿고 살아가는 것에 소망을 둔다면, 그것들이 우리의 손에 다 사라져가는 임종의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26절은 23~26절의 고백의 절정입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아마 시인은 점점 늙어가고 쇠약해져가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많은 정성으로 자기 몸을 가꾸어도 자신의 늙어감과 쇠약해져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 자기 아름다움을 관리해도 주름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해져 간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진시황처럼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해서 불로초를 구해서 늙어감에 저항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하겠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마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육체에 둘러싸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이 고백은 “저는 하나님의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와 마음이 쇠잔해진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원한 기업이 되시니까요.”라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도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 (27~28)
시인은 한없이 초라해보이고 비참해보이던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그가 자신을 초라하게 보게 만들었던 것은, 악인들이 누리는 복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가진 복을 압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28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 복이 자신이 성도로서 누리는 최고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그는 세상을 사는 동안, 시인이 빠져들어갔던 그런 류의 시험에서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에 주눅이 들거나 그런 잣대로 사람들을 얕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가 누리는 이 영광과 복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시인이 처음에 시작했던 불평과 원망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시인이 깨달았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는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갑니까? 성소에 계시는 영원 무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배웠습니까?
그 교훈을 배운 시인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축복을 안다는 말은, 역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저주스러운 인생이 무엇인지 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7절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여기서 ‘음녀 같이 주를 떠났다’는 표현은 말그대로 간음을 행한다는 의미이고 비유적으로는 우상숭배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삶,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성공,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부유함,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명예,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행복은 다 망하는 길이고 멸망 당하는 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하나님 임재 없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이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뒤로 한 채, 성공과 부와 명예와 행복을 추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자신을 구하십니까, 아니면 성공이나 부를 추구하고 사십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성도가 누리는 영광이고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이제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겠다고 선언합니다(28b). 이것은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당연한 선언입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시인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모든 행적을 전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전임사역자가 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의 목소리로, 그리고 자기 얼굴과 태도로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반영하고 전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도는 힘이 있습니다.

성도의 일생이 그러하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적용적 교훈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시인은 처음에 불평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불평을 지나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훈은 다시 시인을 회개로 인도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얻은 교훈은 죽은 교훈이 아니었음을 반증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회개에서 다시 영광스러운 성도의 고백을 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 고백이 23~26절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중요한 축복과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자리에 머물러 계십니까? 아니면 거기서 떨쳐 일어나 깨달음 곧 하나님의 교훈을 얻습니까?
그리고 이 교훈이 여러분을 과연 회개의 고통스러운 자리로 인도하여 사죄의 기쁨을 누리는데까지 인도합니까? 그리고 영광의 고백으로 나아가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원망의 자리에 오래 두지 않으시고 이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성도의 일생을 봅니다. 성도는 젊을 때 이 시인이 빠졌던 시험에 종종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면서 그리고 하늘 성소에 들어갈 날이 가까워올수록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런 평생의 과정을 거쳐 점점 더 순수하고 정제된 고백을 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달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아, 내가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성공, 아름다움, 부유함, 명예나 행복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구나!”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릴 축복이나 영광은 있다가 없어져버릴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점점 더 영광스러움을 경험하고 누리게 될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도가 누릴 최고의 영광과 최고의 축복이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까? 이것을 아는 성도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갈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 단 하루만을 남겨놓았다고 할지라도 은혜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를 짐승 같은 수준의 본능적 불평과 원망에서 우리를 건져줄 것이기 때문입니다(22). 여러분은 아십니까? 성도가 누릴 최고의 영광과 축복이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로부터 다 떠나갈 때, 우리가 평생 붙잡고 있던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이를 때, 우리는 알 것입니다. “아, 이 미천한 존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만이 영원하구나!”
수많은 찬송시를 썼던 찰스 웨슬리가 임종의 침상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영감이 떠오르자 그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불러주는 것을 쓰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찬송시가 되었습니다.

이토록 노쇠한
벌레같은 죄인이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나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
오, 제가 당신의 미소를 보며
영원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In an age and feebleness extreme,
What shall a sinful worm redeem?
Jesus, my only hope thou art,
O, could I catch a smile from thee,
And drop into eternity.

이 시는 찰스 웨슬리가 평생 구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었고 주님의 미소였습니다. 주님의 미소를 보면서 영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 그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의 영광이고 최고의 축복입니다. 찰스 웨슬리는 자신의 임종의 순간에 그것을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아삽이나 웨슬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미소를 보며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은혜는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분복인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벧샬롬의 모든 권속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