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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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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그리스도인의 표지

갈라디아서 6:1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0-28

말씀내용
1. 자랑에 매인 인생
뭔가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본성은 어른이 돼도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좀 노골적이지 않은 은근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뿐입니다.

A. 사람은 자랑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자랑은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인정받고 증명하고 싶은 인간 본성의 욕구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자랑하는가입니다. 무엇을 자랑하는가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시금석이 됩니다. 자랑하는 대상이 바로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이고 그 가치가 그 사람을 보여주는 창이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인간이 이 자랑이라는 본성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딜레마입니다.

B. 인간의 본성: 육체를 자랑함
사도는 본문의 앞 구절인 13절에서 ‘육체로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말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행위 안에 어떤 자랑거리를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할례였습니다. 13절과 14절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어떻게 거짓된 그리스도인과 다른지 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자랑하지만 거짓된 신자는 육체를 자랑합니다.

i. 육체?
여기서 육체가 의미하는 것은 포괄적입니다. 육체에 해당하는 것들을 나열해보면, 인기, 지식, 영향력, 외모, 수입, 직업적 성취, 영적 기록들, 교인 숫자, 예배 스타일, 경건의 습관, 사회적 신분, 신학적 정통성, 회심자의 숫자……입니다. 이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육체에 속한 것들입니다. 육체는 우리의 죄성을 가리킵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것은 단지 세속적인 영역들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령, 세상적 권력이나 학벌, 지식, 또는 재력 등을 과시하는 세속적 영역들만이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안에도 이런 성향들이 육체의 소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건 생활의 기록, 자기 교회에 대한 자랑, 교인 숫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 자기들의 독특한 예배 스타일을 자랑하는 것, 우리가 신학적으로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고 하는 태도, 전도하면서 회심자의 숫자를 세는 것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ii. 문제는 ‘십자가 + 육체’
이렇게 종교적 방식으로 자랑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갈라디아 교회가 당면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했고 십자가의 복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에 하나를 더했습니다. 할례였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플러스 경건의 행위, 십자가 플러스 성령의 은사......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 플러스 뒤에 오는 것이 바로 자기를 증명하려는 자랑의 욕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실로 중요하게 여긴 가치는 거기에 있습니다.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말고 뭐 하나를 더 얹어야 편하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십자가’, 혹은 ‘오직 믿음’을 말하면 외골수나 근본주의자 혹은 분리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언제나 편하게 가려면 십자가 플러스 무엇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막론하고 신앙의 좁은 길을 걸어가려는 참된 성도들이 경험했던 고난이었고 유혹이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대충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한(radical)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본성: 십자가를 자랑함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본문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랑한다’는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랑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신뢰하다, 기뻐하다, 열중하다, 마음껏 즐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쏠리게 하며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 사로잡는 것입니다. 아마 가장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사로잡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보통 사람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외적인 조건들을 다 거절하였습니다. 그가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입에도 올리기를 꺼려하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그가 자랑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십자가를 자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바울 사도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실 만큼 사랑하셨다는 메시지이며 그 증거이기 때문에 그가 자랑할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값이 다 치러졌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얻고 의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도 인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도 자랑의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이것이 세상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기 자랑의 늪에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는 14절 하반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그리스도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이 사울이라는 사람, 종교적 자랑의 노예였던 바울을 그 자랑에서 자유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사도가 자랑하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A. 하나님의 심판(마 27:46; 갈 3:13; 롬 3:25)
사도가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기도하셔야 했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버리신 것입니까? 영원토록 완전한 사랑과 기쁨과 행복의 관계에 계셨던 삼위 하나님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성경은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나 빌라도 혹은 로마 군인들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라고 기록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율법의 저주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모든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받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로마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3장 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화목제물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죄의 형벌 혹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거나 배상하는 차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화목제물이라는 용어는 진노를 풀어준다는 개념을 지닌 단어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것이며 그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분이 피를 흘리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형벌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냥 봐주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죄에 대한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B. 하나님의 구원(롬 5:8~9; 8:32)
이것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8~9절에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을 행하심으로써 의로움을 나타내셨을 뿐 아니라 또한 죄인들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를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는 그의 피, 곧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는가라고 사도는 또한 도전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믿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보면 신자는 거기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증명된 것을 봅니다.

C.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롬 6:6~7)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어떻게 우리 자신과 관련이 되며 우리의 운명과 신분을 영원히 바꾸는 사건이 되었는지 사도 바울은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6장 6~7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여기서 ‘옛 사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범죄한 아담과 연결되어있는 나, 범죄한 아담과 연합된 나,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인 나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담과 연합한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심판을 받았고 죽었습니다. 옛 사람인 나는 이제 없습니다. 이제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요, 새 사람입니다. 이제 심판은 지나갔고 영원한 하나님의 기업을 얻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의 한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옛 사람인 내가 거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인 나를 향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4. 자유하게 하는 복음(갈 5:1,13; 요 8:32)
이 복음이 사도 바울의 자랑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옛 사람에게 속한 존재를 치장하기 위해서 자랑거리들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대출의 예) 옛 사람에게 속한 자랑거리들이 다 죽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대하여 세상이 죽었고 세상에 대하여 사도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자랑거리들을 가지고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확인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종교적 의와 경건의 자부심, 학문이나 학벌, 가문은 그저 옛 사람을 치장해줄 뿐입니다. 그것은 시체 화장입니다. 이제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이 말은 그전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모든 육체의 자랑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자랑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13).” 주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8:32). 이 자유가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해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랑거리를 바꾸게 만듭니다. 한시도 그런 자랑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해서 한 순간 자랑하다가도 대부분의 시간을 그 자랑거리의 부재로 말미암아 한탄하며 보내야 하는 인생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그런 육체의 자랑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추구하던 모든 자랑거리들은 더 이상 우리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거나 부끄럽고 힘들게 하지도 못합니다. 세상의 자랑거리에 목을 매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있든지 없든지, 조건이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고 행복을 빼앗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빼앗길 수 없는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이 복된 자리로 오늘도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아멘

이 고백이 사도 바울과 함께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