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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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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경건한 어른이 있는 교회

누가복음 15:11-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10-25

말씀내용
1. 경건한 어른이 누구인가?
여러분은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혹은 신앙의 고민을 가지고 있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어른이 있습니까?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는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입니다.

2. 경건한 어른이 있는 교회
이런 경건한 어른이 있는 교회는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교회를 경영하듯이 자기 분야의 전문성으로 일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경건한 어른들과 그 제자들로 구성된, 경건한 관계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경건한 어른은 직책이나 분주함 또는 자기가 가진 전문성으로 영향을 미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는 경건한 성품과 영적인 지혜가 학위나 기술, 어떤 분야에서의 성취나 전문 지식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교회입니다. 제게는 경건한 어른들에 대한 그치지 않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어른들이 계시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믿음과 삶에서 모범이 되는 경건한 어른들이 있는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는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설교는 성령의 능력 외에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들의 존재는 목사의 설교의 실증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저 설교대로 살 수 있겠어? 목사나 되야 저렇게 살 수 있지.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살아? 목사도 저대로는 못 살걸!”하는 말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완전한 사람은 없고 죽음 이전에 우리의 성화가 끝나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는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신앙의 본이 되어주고 한 발 앞서서 우리를 이끌어줄 경건한 어른의 존재는 분명히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갓난 아이를 포함해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스물 쯤 되는데 부모는 늘 바깥 일로 바쁜 가정이 있습니다. 그 집은 얼마나 정신 없는 집이겠습니까? 저는 오늘날 교회가 혹시 이런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저는 정말 경건한 어른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경건한 어른들이 계신 교회를 그리워합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왜곡된 시각이 교정되어야 한다.
왜 경건한 어른들이 적을까요? 왜 오랜 세월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 안에서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일까요? 신앙의 성숙은 세월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인정하며 회개와 믿음의 순종이라는 반복되는 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빚어가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한 마디로 경건한 어른들이 적은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는 삶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에 따라서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서는 참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영 신학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는 하나님이고 내가 부자가 되고 건강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라고 진실하게 믿는다고 해도 그는 경건한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만년 어린 아이일 뿐,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어른이 되어 가는 사람은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선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이다. 평생에 걸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왜곡된 시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정되고 또 교정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왜곡된 시각을 교정해 주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그 중 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4.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
누가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세 사람, 아버지와 두 아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둘째 아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해석합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물론 주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 아버지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집에 있는 아들이고 또 하나는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이다. 이 두 아들은 우리 모두를 대표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떠난 적이 없이 살아왔기에 은혜의 감격도,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감사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아들은 자기가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니라 마땅히 누릴 권리라고 여기게 됩니다. 맏아들의 모습입니다. 한편 나눠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났다가 인생의 파산을 경험한 후에야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이 있습니다. 그는 은혜를 알았고 아버지의 선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감격과 감사와 눈물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이 두 아들 모두를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입니다.

A. 둘째 아들: 사람은 쥐엄 열매를 먹어야만 회개하는가?
이 이야기에서 제일 먼저 말하는 사람은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눅 15:12).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청구하여 받아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못된 일입니다. 물론 당시 유대법에는 유언을 쓴 사람이 죽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자기가 한 유언의 내용을 고칠 수 없도록 공증하는 행정 절차가 있었는데 그것을 mattenat bari 라고 불렀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이 절차를 해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변경이 불가능하므로 아버지의 생사와 무관하게 이미 확정이 된 것과 다름없고 자기의 몫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확보한 자기 몫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미숙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다 날려버리는 것도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는 먼 나라로 갔고 거기서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 그 나라는 큰 기근으로 경제적 위기를 맞았고 무일푼 거지가 된 이 아들의 주변에서는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다 떠나가고 손 벌릴 곳 조차 없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아들의 비참한 상태를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돼지와 쥐엄 열매입니다. 이 두 단어는 그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만큼 내려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근으로 일자리도 줄어들었고 그는 가까스로 들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가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모욕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된 품삯을 받는 조건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하나 그나마 주는 이가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쥐엄 열매는 유대인들이 제일 배고플 때 죽지 않으려고 먹는 식량이었습니다. 아람이 북왕국 요람 왕 때,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했는데 그때 성 중에 음식이 없어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이고,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5세겔’이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왕하 6:25). 나귀는 부정한 짐승이라 먹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머리 가격이 80세겔이나 했으니 그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한 세겔은 당시 어른 일개월의 급료였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똥은 아마 콩과의 쥐엄 열매를 가리키는 말일 텐데, 이것마저도 다섯 세겔이나 되었습니다. 갑은 1.2리터 정도 되는 단위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서인 미드라쉬에는 “어떤 유대인이 오직 쥐엄 열매를 먹을 정도로 궁핍한 상황과 고난을 겪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쥐엄 열매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말해주는 상징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서 더 이상 비참해질래야 비참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돼지 틈에서 굶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잣말을 되뇌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유대 사회에서 품꾼은 매일의 양식을 보장받고 심지어 가족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는 ‘종’보다는 못한 존재로서 거의 일용직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들은 비참한 상태에서 자기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은혜는 언제나 그치지 않고 있어왔지만 그가 경험하게 되는 은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아들은 자기가 마땅한 권리라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다 자기 손에서 벗어나버렸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마음이 움직였고,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기로 결정을 합니다. 가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8~19).” 사람이 이렇게 쥐엄 열매를 먹어야만 회개하는 것일까요?

B. 아버지의 은혜: “너는 언제나 내 아들이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거지 행색을 하고 집으로 걸어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본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눅 15:20).” 아버지는 어쩌면 이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매일 그렇게 동구 밖에서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늙은 아버지가 멀리서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출 수가 있었겠습니까?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하려고 생각했던 대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런데 아버지는 그의 말을 거의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개역개정역에는 생략되었지만, 아버지는 ‘속히’ 행하라고 종들을 재촉합니다. 옷과 가락지, 그리고 신발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아들은 품꾼의 하나가 아니라 원래의 아들의 지위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집에서 가장 좋은 짐승인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합니다. 둘째 아들은 인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더 놀랍게 아버지의 은혜와 아버지의 선함을 가슴 깊이 경험합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얘야, 너는 언제나 내 아들이란다. 한 번도 내 가슴 속에서 네가 아들이 아니었던 적은 없단다.”

C. 맏아들: 아들인가, 머슴인가?
맏아들은 이 날도 어김없이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해질 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게으르지 않았고 방탕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탕자인 둘째 아들과 비교되어 동네 안팎에서 모범적인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던” 아들입니다(눅 15: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맏아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서 기쁨은 짧았고 분노는 길었습니다. 의무감은 기쁨을 질식시켰습니다. 명을 어기지 않고 아버지를 섬겼다는 그의 말에서는 자부심 대신 섭섭함이 느껴집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분노가 쌓여갔습니다. 그를 너무 심하게 비난하는 것일까요? 결국 그 기쁜 날, 그는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 볼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속에는 아무런 기쁨도 없고 의무감과 더불어 섭섭함과 분노만 쌓여간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 보여도, 아무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맏아들이 가진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아버지와 흥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장부를 쓰는 삶입니다. “내가 이만큼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이 순종을 하였는데, 아버지는 내게 이 정도의 보상은 해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하는 계산적 태도가 맏아들의 말에서 묻어납니다. 그는 많은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아버지께 한 것은 명을 어김이 없는 순종이었는데, 아버지는 자기와 친구들이 즐기도록 값싼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잔치를 열어 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장부를 쓰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장부만 쓰지 않습니다. 그는 동생의 장부도 쓰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볼 때 동생은 아버지에게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들과 함께 날려버림으로써 아버지에게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동생에게 배상을 요구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이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화가 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는 뭔가를 혹은 어느 정도를 해왔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장부에 쓸 것이 꽤 많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하나님께 빚을 얹어놓으면서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빚을 갚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는 말씀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대합니다. 기도하고, 봉사하고, 성경 읽고, 교회 나오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누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자신의 공로로 장부에 기록됩니다. 이런 계산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억울함, 섭섭함,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세월과 함께 겹겹이 쌓여가게 됩니다. 감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밑지는 장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갚아야 할 빚을 갚은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맏아들이 섭섭함과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자기만의 계산법으로 계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생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탓으로 돌립니다. 자기 삶이 원대로 되지 않는 것이나, 배우자나 자녀들에 대한 불만족과 원망 등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기를 돌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탓이 되고, 그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선함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는 이 맏아들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기쁨이나 은혜가 아니라 오직 의무감입니다. 그것도 최소한의 의무감이다. 남은 기대가 있다면 언젠가 아버지가 자기에게 빚을 갚아주실지도 모른다는, 비신앙적이고 합당하지도 않은 생각입니다. 이런 흥정이나 계산의 구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한 그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장부를 찢어버려야 합니다.

5. 두 아들의 문제: 받은 구원의 가치와 감격을 잊어버리는 위험!
누구나 이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쉽습니다. 이것은 한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서서히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이런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예외 없이 우리가 받은 그 큰 구원을 잊어버리고 그 감격이 사라지는 데서 시작합니다. 맏아들의 계산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무슨 말입니까? 이미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떼어줄 때, 맏아들에게도 유대 상속법에 따라 둘째 아들의 몫의 배에 해당하는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12절을 다시 보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둘째에게만 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은 빈 말이 아니라 법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유산은 권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아들들은 빚을 돌려받는 채권자가 아니라 은혜를 받는 수혜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아버지 재산의 2/3를 장부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지 못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받아내야 할 빚으로 계산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맏아들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와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했을지라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 둘째 아들도 얼마든지 맏아들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올 때 가졌던 마음,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는 마음을 견지하는 한 결코 흥정과 계산의 관계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와 진노를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의 선물은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우리가 이 구원의 선물이 자기가 하나님께 행한 수고와 공로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섭섭함, 억울함, 부당하다는 느낌, 분노의 쓴 뿌리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감사와 감격, 기쁨과 은혜는 질식 당하고 맙니다. 이런 일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니, 우리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죄악들 아래 있는 죄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의 결핍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아들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본 적이 없는 이들도 있겠지만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들도 이런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6. 선하신 아버지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행복의 조건이고 인간 사용 설명서라는 것을 지난 주에 상고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를 맺으면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라고 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의 섬김은 계속 맏아들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잔치자리에 들어가기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마지막 심판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고를 받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마 7:23)? 이제 이야기의 아버지에게 주목해 보십시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건방진 요구를 수용하는 아픔을 짊어지면서 그 아들이 참된 은혜의 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강요와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속박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음으로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아버지의 눈은 멀리 집 나간 아들이 자기 시야에서 벗어난 그 자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자기 식으로 계산하면서 분노하는 맏아들에게는 어떻습니까? 아버지는 친히 잔치 자리에서 밖으로 나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자”고 맏아들을 설득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맏아들이 놓치고 있는 은혜를 상기시켜 줍니다. “너는 머슴이 아니잖아, 내 아들이잖아! 언제나 그리고 지금도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비참함에 빠져 고생을 했던 동생을 생각할 때,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형은 알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 즉 그렇게도 부정적인 비아냥의 중심 단어가 되어버린 소위 모태신앙이라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그 사실을 감사했던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둘째 아들처럼 쥐엄 열매를 먹어야만 회개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아버지는 맏아들의 분노를 받아줍니다. 그에게 마땅히 책망하고 진노할 수 있음에도 아버지는 그를 참아줍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말로 그를 권하고 타이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영원한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은혜입니다. 누가 이런 아버지에게 분노할 자격이 있습니까? 이 아버지는 모든 아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너무나 합당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이처럼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7. 경건한 어른이 되는 길
오늘날의 교회에는 아들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아버지가 없습니다. 이 아버지를 닮은 어른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아버지를 닮은 경건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이런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경건한 어른이 되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시 34:8). 그것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길입니다(벧전 2:3). 아들이 아버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진정으로 맛보기 전에는 그들은 언제나 아들들일 뿐입니다. 이 아들들이 아버지가 되는 길이 시작되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들의 선하신 아버지를 경험하는 순간 그들은 아버지를 닮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 어른이 되는 길목에 접어들게 됩니다. 분노하는 죄인, 자기 의에 가득 차 있는 인간, 불평과 원망 밖에는 튀어나올 것이 없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만이 사람을 속에서부터 변화시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은혜가 죄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빵 하나를 훔친 죄로 시작해서 19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장발장의 내면은 분노로 가득합니다. 무엇이 그 사내 장발장을 변화시킵니까? 그것은 마리엘 주교를 통해서 경험한 은혜였습니다. 죄를 묻지 않고, 선을 악으로 갚는 장발장에게 계속해서 선을 베풀어주는 마리엘 주교의 은혜는 장발장의 내면에 있는 악을 이겼습니다. 이 순간부터 장발장은 사회에 대해서 분노하는 아들이 아니라, 사회를 치유하고 은혜를 베푸는 어른이 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경험했던 그 시간부터 어른이 되는 길, 아버지가 되는 길에 접어듭니다. 죄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죄책감이나 지옥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죄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이긴다는 사실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치지 않고, 기쁨으로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주시기를 그치지 않겠다고 영원한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렘 32:39~41).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안에서 이것을 증명해주셨습니다.

8. 어떻게 은혜를 경험하는가?
아들은 어떻게 은혜를 경험하는가? 주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 두 아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은혜를 경험하고 하지 못하는 차이는 어디서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 차이는 회개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깊이 경험합니다. 저는 왜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의 신학 논제를 써 붙일 때, 그 첫 번째 항목으로 회개를 다루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단지 중세 교회의 회개에 대한 오해와 타락 현상을 고치려는 것만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왜 이것이 그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틴 루터는 회개가 일회성 의식이 아니라, 신자의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믿음이 단회성 믿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신자의 삶에서 지속되는 믿음이듯이, 회개도 처음에 하나님께 나아올 때 한 번 하고 마는 행위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회개가 멈추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일도 그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일이 그치면 그때부터 그는 벌써 맏아들의 자리로 가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놀라운 수단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회개의 끝은 달콤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결심과 행동은 힘들었을지라도 일단 회개한 후에 그에게 주어지는 아버지의 은혜는 언제나 회개하는 아들을 달콤함으로 가득 채웁니다.

A. 율법적 회개가 아닌 복음적 회개만이 은혜를 맛보게 한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죄인은 이 (율법적) 회개에 의해서 죄의 가책으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떨며 그 불안한 상태에 붙잡힌 채 빠져 나오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복음적(복음의) 회개라고 한다.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인은 큰 고통을 받지만 고통을 이기고 일어서며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자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과 공포심에 대한 위로와 불행에 대한 피난처로 삼는다.” 복음적 회개만이 아버지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복음적 회개는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하게 해주고 그 은혜의 경험은 평생을 계속해서 회개하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아버지가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일이 없이 어떻게 자신의 죄악과 결점들을 가지고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B. 복음적 회개는 관계적이다.
이 이야기 안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것은 어떤 회개입니까? 율법적 회개의 관점에서 그는 별로 회개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가 전부입니다. 이 아들이 저지른 죄에 비하면 회개가 좀 약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이것은 진짜 회개, 복음적 회개입니다. 그는 옛 삶을 떠났고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더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존귀한 아들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잔치를 베풀었고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관계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회개는 내가 하나님께 잘못했거나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행위를 눈감고 입으로 고백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가책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서아입니까? 아니면 이런 죄를 그냥 가지고 가면 지옥에 가게 될까 봐 두려워서입니까? 둘째 아들은 자기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잘못 행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잘못 행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자기의 죄가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 지를 그는 생각합니다. 죄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망가뜨렸고 죄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인정할 때 회개가 일어납니다. 죄악 된 행위 자체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갖다 탕진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철이 난 아들이 어느 날 자신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부모에게 회개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자기가 한 행동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일이 가슴 아프게 느껴질 때 자식은 부모에게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회개는 이렇게 관계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선하신 은혜를 알게 될 때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촉진하는 동력이 됩니다.

9.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라는 소명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라는 소명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신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도 반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무서운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덕스러운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영광스러운 성품을 선하심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출 33:18~19).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모세의 얼굴에서는 그 영광의 빛이 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그 영광의 빛이 반사되는 것을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하는 삶으로 변화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그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사역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라는 소명을 가지고 사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하는 변화,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변화를 경험하면서 사십니까?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람들, 하나님을 닮은 경건한 어른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로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앎으로써 우리는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라는 소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들, 경건한 어른들로 하나님의 교회가 가득히 채워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