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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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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합당한 예배

요한복음 4:23-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9-06

말씀내용
<합당한 예배>라는 제목은 합당하지 않은 예배가 있다는 것을 상정합니다. 합당한 예배는 복음의 영광을 반영하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설교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는 찬송의 가사들이 복음의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만도 아닙니다. 또 기도가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하나로써 복음을 반영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든 짜여진 순서들을 통해서 복음을 드러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상고하려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이 고민했던 것 가운데 중요한 주제는 어떻게 복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자신들에게 익숙해진 로마 카톨릭의 예배 형식은 결코 복음을 충만하게 드러내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와 함께 예배의 형식을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예배당의 가구 배치의 문제도 포함했습니다. 가령, 설교단이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이끌어간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성찬상이 회중석에서 볼 때 설교단의 뒤에 위치하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방식인데 사제가 회중과 성찬상의 사이에 서서 그것을 중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성찬상을 회중석과 강단 사이에 두었는데 이는 회중들이 사제의 중재 없이 성찬상에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가구들의 배치가 중요하다면, 하물며 예배의 순서와 구성 형식은 어떻겠습니까?

1.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Read the Bible, preach the Bible, pray the Bible, sing the Bible and see the Bible.”
먼저 우리가 오늘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이 말씀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배의 중요한 원리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신령과’라는 말을 생각해보지요. 헬라어를 직역하면 ‘영으로’ 혹은 ‘영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영’이 성령님을 가리키는가, 신자의 영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요한복음 3:6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했을 때, 뒤에 말씀한 영은 신자의 거듭난 영혼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말씀에 비추어서 보면 ‘신령과’라고 하신 말씀은 ‘너희의 영으로’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거듭난 신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온 마음으로 예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8을 보십시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주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신령으로 드리지 않은 예배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찬송을 불렀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했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배, 신령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역시 ‘진리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빠진 예배는 예배일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는 말만이 아닙니다. 예배의 시작부터 끝까지 신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가 예배의 전체를 지배해야 하고 끌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모든 형식과 구성 요소가 진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에 부합해야 합니다. 이점에서 저는 예배의 구조가 복음을 말해주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신약의 예배 규정을 이렇게 정리해서 말했습니다. “Read the Bible, preach the Bible, pray the Bible, sing the Bible and see the Bible.” 마지막에 see the Bible이라고 한 것은 성례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즉, 예배의 모든 순서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전하고, 성경을 토대로 기도하고, 성경을 노래하고, 성경의 진리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예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예배를 또한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9을 보십시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성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원리, 사람들의 기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그런 예배는 거짓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령과 진리로’라는 말이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조작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모든 예배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그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선포될 때, 그리고 진리가 예배를 주도할 때, 진리가 노래로 불려질 때, 예배자들의 마음은 고양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2. 예배의 구조: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들
이런 점에서 합당한 예배는 복음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무의미하고 무미 건조한 형식들로 예배가 구성된다면, 그리고 그런 인상을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복음을 진지하게 설교를 통해서 전한다고 할지라도 합당한 예배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점에서 예배는 교회의 전통이나 개인의 취향, 혹은 문화적 선택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습니다. 이제 예배의 구성 요소 하나 하나가 어떻게 복음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A. 예배의 부름과 송영: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정
우리는 예배의 부름이라는 형식으로 예배를 시작합니다. 그 형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하도록 부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맞아주실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보통 성경말씀을 읽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와 같은 본문입니다. 이외에도 시편 95:1~3 말씀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예배의 부름의 두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 즉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속성을 선언하고 예배자들을 그 하나님을 바르게 인정하고 인식함으로써 예배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송영으로 응답합니다. 송영은 성 삼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응답이고 반응입니다. “모든 영광이 성 삼위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라고 공동체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짓 예배 즉 우상 숭배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부적절한 인식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지니신 성품과 속성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의 염려나 고민 등이 물러나고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고, 그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인식을 하게 되고 마음으로, 영으로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있을 때, 예배의 모든 남은 순서들이 올바르게 물흐르듯이 진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B. 신앙고백
i. 진리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예배에 있어서 고백과 회개의 요소입니다. 먼저 고백이라는 요소를 생각해보지요. ‘고백’이라고 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연상하십니까? 아마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을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 고백이 예배 가운데 반드시 필요합니까? 왜 많은 교회가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합니까?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은 교회가 믿는 신앙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진리 안에서 하나임을 선포하고, 또 역사 속에 진리를 믿고 고백한 모든 교회와 하나가 되며, 같은 시대에 전세계에 퍼져 있는, 진리를 고백하는 모든 교회와의 연대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이방인의 많은 교회들과 시대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장엄한 예배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경험하게 될 예배를 맛보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참된 복음의 진리, 사도가 전했던 그 진리를 고백하는 교회들과 하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신앙고백 문서에 속하고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의 내용이라고 믿었던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된 것입니다.

ii.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기준
또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가장 두드러진 기준입니다. 만일 사도신경과 같은 교리적 진술을 신앙고백으로 할 때 이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기독교회일 수 없는 것이고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명목상으로는 사도신경을 자신들의 고백으로 가지고 있고 예배 시간에 여전히 읽고 있지만, 그 내용을 부인하는 교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 형벌로서의 죽음을 믿는 교회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는 신앙고백의 역사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발흥할 때마다 교회는 자신이 믿는 분명한 신앙의 내용을 기록된 문서의 형태로 만들어 고백함으로써 진리를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고백은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시대 시대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고백해야 했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안한 때의 고백은 쉽지만, 핍박과 박해의 때에도 이 신앙의 내용을 생명을 걸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iii. 자녀 세대와 세상을 향한 선포
신앙고백이 지니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자녀들의 세대에게 우리의 믿음을 추상적 형태로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하게 진술되고 기록된 형태로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신앙고백은 “자녀들아,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분명하게 고백한단다. 이것이 너희가 믿고 고백해야 할 신앙의 내용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서 교회가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한 형태로 선포합니다. 단지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그냥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라고 분명하게 우리의 믿음과 그 믿음의 내용을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iv. 신앙고백의 방식들
그러면 예배에서 어떻게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물론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형식적이 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경에 나오는 고백적 선포들을 그대로 교독을 하거나 합독을 함으로써 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고백은 신명기 6:4~5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시편이나 신약 성경의 서신서의 어느 구절들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역사적 신조와 고백들의 부분들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형식은 찬송을 통한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가 예배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가령, “이 몸의 소망 무언가”와 같은 찬송도 좋은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 그 위에 내가 서리라 /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묵상하며 찬송하게 될 뿐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는데에는 물론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단점은 찬양의 가사 가운데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를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기술한 것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부분적인 내용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장점은 곡조를 가진 찬송으로 부름으로써 더욱 마음의 감동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은 다른 말씀의 가르침으로 보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릴 때, 단순히 찬송을 따라 부른다는 태도에서 더 나아가 ‘아, 지금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이 찬송을 통해서 고백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아시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C. 죄의 고백: 본성에 대한 인정
예배의 부름에서 이어지는 중요한 예배의 순서는 죄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매우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우리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인식했다면 그 다음에는 그 앞에서 우리의 본성에 대한 인정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반응했던 것이 바로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을 본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토설하는 죄의 고백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순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의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의 반증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무가치함을 알게 될 때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고, 그 선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함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형식화될 위험은 있는데, 그 이유는 순서와 형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라,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그 선하심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D. 용서의 확증: 은혜에 대한 확증
죄의 용서를 구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용서의 확증입니다. 만일 용서의 확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복음이 선포될 수 있고 복음의 기쁨이 그 예배 가운데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단에서 숯불을 취하여 그의 입술에 대고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고 선포해주십니다(사 6:7). 일반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을 때, 우리는 성경에 주신 죄 용서의 약속의 구절들을 통해서 죄의 용서를 확증해 줄 수 있습니다. 가령,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는 요한일서 1:9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조심하게 됩니다. 마치 목사가 죄를 사해주는 것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죄를 고백하는 모든 자녀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기쁨과 회복의 마음과 분위기를 창출하게 됩니다. 죄 용서의 확증은 복음의 은혜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E. 감사와 헌상: 헌신의 표현
그 다음에는 어떤 형식, 어떤 순서가 와야할까요? 드디어 감사가 예배자의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나같은 죄인을 용납하시고 이런 죄를 용서하시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으시며 하나님의 사랑만을 받을 자격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게 됩니다. 감사함이 없는 예배는 예배일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의 삶의 형편이 지금 곤란함 가운데 처해 있고, 질병이 있으며, 이런 저런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전 존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은혜에 대한 죄인의 합당한 반응입니다. 일차적으로 그 감사는 찬송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헌상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죄 사함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헌신으로 자신의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배의 순서에서 우리의 감사를 헌금을 드림으로써 표현합니다. 이때 헌금이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이 용어는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단순히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헌상’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적합합니다. 헌상이라는 말은 위로 드린다, 즉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입니다. 영어로 offering이라고 할 때 이 단어 안에 돈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는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감사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표현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의 은혜, 죄인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복음의 은혜일 수 없을 것입니다.

F. 청원과 도고: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도우심을 바라는 소원
이제 무엇이 이어져야겠습니까?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이런 복음의 은혜를 주셨으니 이제 저희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교회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와 같은 복음의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아직 복음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기도인 도고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목회기도라는 형식으로 이것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목회기도는 목회자인 목사와 장로가 자신들이 책임을 맡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중요한 내용은 복음의 은혜를 받은 자들답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보통 감사에서 말씀으로 나아가게 하는 전환점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하여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을 포함하게 되는 것입니다.

G. 설교와 가르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지식의 습득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를 구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지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지식을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설교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13에서 바울 사도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말했듯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는 말씀대로, 읽어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 외에도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일정한 본문을 회중에게 읽어주는 것을 해왔던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주어집니다. 이점에서 설교는 목사의 연구 주제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보살피시고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시고 그들이 직면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든 도전들 앞에서 함께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혜와 힘을 더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적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H. 파송과 축복: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기
설교가 마치면 파송과 축복으로 예배는 마쳐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생략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으로 대표되는 성례입니다. 이것을 보통 지금까지 설명드린 말씀의 예전과 비교하여 다락방 예전이라고 부릅니다. 다락방 예전인 성례는 예배의 필수적인 순서로 포함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한 차례 별도로 설명을 드릴 생각입니다. 일단, 예배는 설교가 마치고나서 파송과 축도를 하게 됩니다. 파송이라는 말은, 신자의 삶으로서의 예배는 이제 시작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을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우리는 이 세상 속으로 파송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신자들의 선교지(mission field)입니다. 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도는 성 삼위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파송을 받는 자기 백성에게 신실하게 함께 계실 것임을 약속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 삼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이야기가 예배 전체를 통해서 들려지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3. 예배는 준비되어야 한다.
여러분, 합당한 예배는 복음을 드러낸다는 말을 조금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매 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복음을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단지 설교를 듣는 것,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교정해야 합니다. 단지 찬양을 부르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을 말합니다. 예배는 중간에 아무 때나 들어오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준비되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너무나 분주하게 예배 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해서 들어와 앉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집중할, 그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준비가 될 수 있을까요? 분주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집중하는 자연스러운 전환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만일 예배의 중간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이 복음의 진리가 이끄는 그리고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복음에 대한 진리에 의해서 일깨워진 영혼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는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받으시고 명하신 예배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없다면, 예배가 실패한다면, 여러분의 삶 전부가 살아갈 힘을 얻을 길이 없고,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일어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기타 모든 종교적 의무들을 다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산 제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삶은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예배를 가르치면서, 여러분이 예배를 준비해야 할 것을 권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배는 준비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예배가 하찮은 것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제일 먼저 여러분이 드리는 주일 예배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결코 율법적인 권면이 아닙니다. 1859년 웨일즈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은 주일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정오에 모여서 주일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구한대로 주일 예배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은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 없이 부어주시는 부흥으로써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토요일 밤을 잘 보내시도록 부탁드립니다. 주일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것을 기대하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주일 아침, 예배 시간 보다 30분 일찍 미리 예배당에 오셔서 기도하며 준비하도록 권면드립니다. 여러분은 결코 준비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전에 오셔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묵상하시고 오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이것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4. 매 주일 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감격을 기대하라.
주님께서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놀라울 정도로 중요한 참된 예배의 두 요소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마음과 머리, 감정과 생각을 포함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진리에 뿌리박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때 가장 놀랍게 타오를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의 심령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타오르게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된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감사와 찬송과 기쁨과 눈물과 환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갈망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내 영혼은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하는 고백을 가지고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음의 충만한 은혜로 내 영혼을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배의 부름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시작하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에 감격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히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런 예배로 우리를 주일마다 회복시키고 복음의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된 교회로 회복시키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