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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그 여인의 믿음

마태복음 15:21-2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7-07

말씀내용
주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유일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칭찬하셨던 백부장도 있지만,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 여인 뿐입니다. 놀라운 것은 백부장도, 이 여인도 다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이즈나 양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더 중요한 핵심은 참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크다고 칭찬하셨을까요? 이 여인에게서 주님은 어떤 믿음의 본질을 보신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을 상고하는 우리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에게 되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믿음을 가졌는가? 나의 믿음은 이 여인이 보여준 믿음의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내는가?” 하는 질문들을 우리는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1. 문맥과 정황
본문의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본문이 위치하고 있는 전후 문맥과 정황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유대적인 복음서라고 알려져있는 마태복음은, 사실상 이방인에게 가장 열려 있는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족복에 나오는 이방 여인들, 동방박사들의 방문,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사건, 십자가 옆에서 신앙을 고백한 로마 백부장, 모든 민족을 제자삼으라는 대위임령 그리고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는 주님의 말씀은 마태복음이 이런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21절은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주무대는 유대와 갈릴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갈릴리의 게네사렛을 떠나(14:34) 북서쪽 해안의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게네사렛에서 두로까지는 55Km 정도 되고, 다시 두로에서 시돈까지는 40Km 정도 되는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페니키아)의 두 주요 도시로서, 전통적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오랜 대적으로 책망해왔던 지역들입니다(사 23:1~17; 겔 26~28). 그런데 주님께서 이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당신을 적대하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잠시 전략적으로 이곳으로 들어오셨지만, 본문의 의미는 단순히 그것 이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문은 이방인 선교라는 큰 주제로 독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메시야로 오신 주님의 사역은 유대 땅 유대인에게 국한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방 세계로 확장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자리하는 중요한 맥락입니다. 이제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스토리를 살펴보겠습니다.


2. 등장인물—가나안 여인
먼저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을 주목해보겠습니다. 그녀는 ‘가나안 여인’으로 소개됩니다. 가나안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원수로 대표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인근의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두지 말고 다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의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의 신앙적 순결을 무너뜨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이라고 할 때 가나안은 인종적 용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인종적으로는 마가복음의 설명대로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가나안 북쪽 수리아의 서쪽 연안에 사는 베니게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수리아의 베니게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들이 가나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도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어쨌든 강조점은 그녀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가나안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녀를 만난 지역도 두로와 시돈이었다는 언급은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 역사의 악명 높은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세벨이고 시돈 왕의 딸이었습니다(왕상 16:31).
이세벨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 중 하나인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아합 왕의 부인으로서 온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의 도가니로 만든 악녀입니다. 그녀는 심지어 동시대의 뛰어난 선지자였던 엘리야까지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또 그녀의 딸 아달랴도 남왕국 유다의 여호람 왕과 결혼하여 역시 유다 땅을 우상숭배의 황페한 땅으로 만들었던 바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세벨의 땅에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을 설명해주는 모든 점들을 생각할 때, 이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의 효력이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것이기에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그녀가 은혜를 입는다면, 민족적 혹은 사회적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3. 사건의 전말
본문의 사건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길을 걷고 계셨는지, 어느 집에 앉아 식사를 하고 계셨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 예수님께 나아와서 소리를 질러댐으로써 예수님의 일행을 방해했습니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는 말은 헬라어로 미완료시제인데 이 시제는, 그녀가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간절하게 소리질렀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충분히 방해가 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말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22).”
주님의 첫번째 반응은 무시였습니다. 주님은 이 시끄러운 방해를 듣지도 못하시는 듯 무시하신 채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23). 하지만 여인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결국 참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23).” 이 말은, 그녀를 엄히 명하여 떠나가게 하라는 말이라기 보다,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어 그녀를 떠나가게 하시라는 의미인 듯 싶습니다. ‘보내소서’라는 말이 헬라어로 ‘풀어주다’ 혹은 ‘해방시키다’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부르짖음을 무시하셨던 주님은 제자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 여자의 울부짖음을 철저히 무시하셨던 주님은 제자들의 말에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물론 주님의 대답은 당신의 선교가 아직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이 대답과 태도는 여인에게 두번째 모멸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직 이 여인만을 무시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이 여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다시 주님께 절하며 부르짖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그러자 드디어 주님께서 여인에게 대답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
이것은 결정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귀를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이 말씀을 직접 들은 여인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주님은 이 여인을 면전에서 개라고 부르신 겁니다. 세번째 모욕이고, 모욕의 절정입니다. 여기에는 당대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분법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방인은 개입니다. 개는 당시 이방인을 의도적으로 모욕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은유였습니다. 물론 주님은 주인 없이 돌아다니는 큰 개가 아닌, 집에서 기르는 작은 강아지를 가리키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아마 이것은 직접적으로 여인을 ‘개’라고 지칭하면서도, 여인이 지나친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순화된 표현을 쓰신 주님의 배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주님의 이 말씀은 여인에게는 세번째 모욕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이 사건의 절정은 27절에 기록된 여인의 대답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여인은 놀랍게도 주님의 말씀을 긍정했습니다. 자기가 개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께 무엇을 구할 수 있는 자격이나 권리를 가진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집에서 기르는 개라면, 주인의 상에서 다 먹고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을테니, 그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라면, 개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으신 주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이 크다”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유일하게 이 여인에게만 주어진 이례적 칭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없었고 제자들은 종종 ‘믿음이 작다’고 책망을 받았지만, 이 가나안 여인에게 주님은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간청대로, 딸을 흉악한 귀신으로부터 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입니다.


4. 참된 믿음의 본질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인의 믿음의 어떤 요소가 주님으로 하여금 그 믿음을 크다고 칭찬하게 한 것인가? 그녀의 믿음이 드러낸 참된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A. 바른 지식 위에 근거한 참된 믿음
먼저 그녀는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 근거하여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22절에서 그녀는 주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에 기초하여 가진 메시야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방인인 그녀가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다는 것은, 그녀가 단순히 주님께 예의를 표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녀의 이 고백은 이미 주님의 신분이 이방 지역에도 알려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그녀가 이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소식은 이방 지역에도 널리 퍼졌지만, 모든 이방인이 주님을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고 또 모두 그분께 나아온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 속에서,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이신 분에 대한 통찰력 혹은 바른 지식을 전제로 합니다. 이 지식이 없는 신앙은 바른 신앙, 구원 얻는 신앙일 수 없습니다. 그녀가 주님을 막연한 호칭이 아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그녀는 또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22절에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데 이어, 25절에서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부르짖었고, 다시 27절에서 “주여 옳소이다마는”이라고 모두 세 번 ‘주’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물론 이 호칭이 존경심을 갖추어 일반적인 남자를 부르는 말이었기에, 여인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적 수준에서 이 말을 사용했는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주여’라는 호칭이 약 20회 사용되는 가운데 한 두 번을 제외하면 대부분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께 사용된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렇게 볼 소지가 다분합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함으로써, 구약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담고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믿음이 단지 지적 동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었고 아는 바른 지식을 따라,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믿었습니다. 그녀가 주님으로부터 멸시를 당하면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녀의 믿음은 이런 테스트를 받으먼서도 물러서지 않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참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참된 신앙을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근거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기고 끝까지 지속되는 믿음입니다.
저는 그녀가 보여준 영적 통찰을 하나 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알았다고 볼 수는 없을지라도(창 12:1~3), 적어도 그녀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확장성에 대한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개로 여겨지던 땅의 모든 이방인들에게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이 말 속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참되고 큰 믿음은 아주 적은 지식일지라도 바른 지식 위에 세워진 믿음이었습니다.

B. 자기 의를 부정하는 겸손한 믿음
그러나 그녀의 믿음을 크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겸손입니다. 겸손은 참된 믿음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교만한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적어도 세 차례 그녀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셨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물러서지 않았다는 끈질김이 아니라, 그녀로 하여금 그 모욕감을 거듭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게 한 그녀의 겸손입니다. 물론 그녀의 상황—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게 잡혀 있다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물러서지 않고 끈기 있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에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주님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은혜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특정인에게 행하신 가장 극단적이고 모욕적인 언사와 태도들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여인에게 유독 거칠고 모욕을 느끼게 대하셨을까요? 주님께서 그녀의 믿음이 크다고 이례적으로 칭찬하신 것이 주님의 의도된 극적 표현들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여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인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신 참된 믿음은 자신의 자존심과 자기 의가 상처를 받고 무너지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주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걸려 넘어지고 포기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의 의와 자존심을 다 내어버려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죄인의 자기 의를 공격하고 무너뜨립니다. 이 복음 앞에서, 자기 의를 보호하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저항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주님의 거친 말씀에 비견될 만큼 강한 표현입니다. 인간이 가진 의는 아무리 훌륭하고 고상해도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칭송할 만 하고 대단하고 고상해 보이는 사람들의 의로움이나 고상함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에 불과합니다. ‘더러운 옷’이라는 이 말은 직역하면, 여성의 생리혈로 더럽혀진 천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의로움이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더러운 천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자기 의로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그분 앞에 서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거저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 설교자는 인간이 자기의 의를 걸레 조각으로 여기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다양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 하셨던 일입니다. 복음 설교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수준으로 이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복음을 듣는 죄인이 자연적으로 품을 수 있는 반응은 반감입니다.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이 반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것이지만, 종종 복음 설교자를 향한 반감으로 작동되게 됩니다.
자,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난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듣습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깊은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을 들으면서, 여러분 안에 받아들이기 힘든 반감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대로, 큰 은혜를 받고 회심을 한 죄인이 10년 후에는 바리새인이 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되었다는 말은 은혜가 더 이상 없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와 태도를 상정합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자격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처지와 상황이 외적으로 어떠하든지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 내면에서 자라나는 것은 자기 의이고 자존심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태도에 기분이 상하고 발끈합니다. 그때 이 여인의 믿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던 이 가나안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개’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말씀을 인정하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의 마음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적으로 자기 의를 의지하여 살아가기에 제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성공과 성취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예외없이 자기 의를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자기 의가 더러운 옷이라고 인정하하지 않습니다. 나름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대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대상이라고 여깁니다. 자연인은 교양과 도덕과 지식과 품위를 갖춘 자신을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자연인의 마음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저 영접기도를 따라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는 식으로 구원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참된 구원의 은혜를 받으려면, 그는 먼저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자신 안에 구원 받을 만한 의로움이 없되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참되고 큰 믿음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이것을 아십시오. 어떤 죄인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크나 큰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복음 앞에서 상하고 부서지는 자기 의를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복음 앞에서 부서지는 자기 의가 산산조각 날지라도, 자존심이 무너질지라도,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물러서지 마십시오. “도대체 어디까지 더 낮아지라는 거야?”라고 물으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이것은 회심할 때, 한 번 필요한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은혜로 거듭나고 회심한 영혼은 평생 이 은혜로 살아갑니다. 어느 새 다시 자기 의를 주워 모으는 인생으로 가지 않고, 그럴 때마다 다시 겸비함과 겸손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 겸손이야말로,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믿음의 본질적 요소인 것입니다.


5. 적용적 교훈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 적용하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A. 그 여인의 절박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나 가나안 여인이 가졌던 절박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어서 우리는 너무 점잖은 것이 아닙니까? 은혜를 구하되 절박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너무나 거룩해져서 이제는 은혜가 없어도, 아니면 조금의 은혜만 있어도 살 수 있다고 교만한 착각에 빠져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은혜를 받고 그 은혜 앞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살아가기를 구합시다. 일평생, 우리가 아무리 많이 수고했을지라도 이런 마음으로 주 앞에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그 여인 처럼 교회를 방해하라!
또 하나의 적용적 교훈은, 방해를 하시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 중에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분들,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이 계신 것과 여러분이 죄인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근거라는 것을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이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을 방해하십시오. 주님의 몸인 교회를 방해하십시오. 소리 질러 방해하십시오.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간절하게 소리 질러 방해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앞에서 절박하게 간절하게 교회를 방해하십시오. 목사를 방해하십시오. 믿는 성도들을 방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얌전하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럴 수 있을 만큼 여유롭거나 한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C. 당신이 무시하는 이방인?
끝으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오랜 원수인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셔서 그곳에 사는 가나안 여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상적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쇼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믿는 우리도 언제든지 이런 유대인들의 자리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실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판단하고 있는 대상은 없을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세리와 창기,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과 이방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주님은 유대인들의 원수가 되셨습니다. 탕자의 형이 탕자에게 베풀어진 아버지의 은혜 때문에 화가 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은혜가 여러분을 화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세리와 창기, 사마리아 사람과 이방인들 혹은 은혜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탕자는 정말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여러분이 무시하는 대상은 없습니까? “네가 무슨 은혜를 입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나처럼 경건 생활에 힘쓰지 않고, 나처럼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고 또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스스로 내 믿음이 괜찮다고 여기는 위험을 주의하고 각성하십시오. 사람들을 판단하는 유대인의 자리가 아니라, 가나안 여인처럼 절박하게 은혜를 구하는 그 자리에서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