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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우리 안의 거짓 신들 죽이기

요나 3:10-4: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6-30

말씀내용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의 첫번째와 두번째 계명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들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명들은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이 계명들이 과연 여러분의 삶에서 중요하기는 합니까? 여러분은 이 계명을 의식하고 살아가십니까?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고질적 문제는 부모 공경이나 도둑질, 간음, 살인, 거짓 증거와 같은 계명을 범하는 문제였다기 보다 거의 모두 일계명과 이 계명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적은 없었지만, 거의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신 것은 이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들이 우상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자신 안에 있는 우상, 즉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영적 분별이 없다면, 결코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우리 안의 거짓 신들 분별하기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의 본성 자체가 영구한 우상의 제조 공장이라고 말했습니다(1.11.8). 그의 말이 맞다면, 신앙생활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않는 끊임 없는 영적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신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자신의 죄성의 깊이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우상을 저는 오늘 거짓 신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A. 거짓 신(우상) = 행복, 인생의 의미, 정체성에 있어 하나님 보다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거짓 신들을 분별하려면, 우선 거짓 신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어서 그 판별 기준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거짓 신은 자신의 행복, 인생의 의미, 정체성에 있어 하나님 보다 더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를 경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옳게 말했습니다. 이점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자기 행복과 인생의 의미 또는 정체성을 결정해주는 무엇인가를 숭배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 신의 존재가 무조건 나쁜 것일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의 거짓 신을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기만적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 안의 거짓 신은 ‘좋은 것’을 과도하게 원하는 욕망입니다. 가령, 직장 경력, 사랑하는 가족, 업적, 자립심, 정치적 이상, 소유물, 권력, 영향력, 매력적 외모, 인지도, 경제적 안정, 지위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나쁘고 악한 것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요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정체성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될 때, 우리 안의 거짓 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B. 거짓 신(우상) 분별 법
이런 것이 거짓 신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안의 거짓 신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에 이것만 있으면 더 이상 원이 없겠다”고 느끼는 그것, “만일 내 인생에서 이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더 이상 나는 살 가치가 없고 인생에 의미도 없다”고 느끼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 안의 거짓 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 안의 거짓 신들의 존재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는 언제나 이런 질문들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전제와 관점을 가지고 요나서를 살펴보겠습니다.


2. 요나가 섬겼던 거짓 신들
요나서는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익숙한 이야기를 담은 성경입니다. 이런 익숙함은 때로는 본문의 메시지를 보지 못하게 하는데, 요나서가 그런 성경입니다. 요나서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선지자 요나 안의 거짓 신과의 싸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도 거짓 신의 문제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 안의 거짓 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요나는 왜 니느웨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까? 무엇이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게 만든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4장에서 보는 바, 요나는 왜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심판을 내리지 않기로 하신 결정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입니까? 무엇이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과 행하심에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까? 심지어 죽어야 한다고 느낄 만큼 말입니다.

A. 요나의 전력 (왕하 14:25)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요나서가 시작하기 전의 선지자 요나의 이력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는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 때 예언을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정치 군사적으로 강성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인근 적대국 다메섹(아람)이 앗수르의 침입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그들에게 빼앗겼던(왕하10:32-33; 12:17) 국토를 회복하고 전례 없는 경제 부흥을 일으켜 민족적 자부심을 크게 고양시켰습니다(암6:1). 이같은 국가적 번영에 도취된 이스라엘은 그들의 부패와 영적 타락에 눈을 감았고, 하나님께서 곧 이방 제국을 뒤엎고 이스라엘을 열국 위에 드높이실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암5:18-20). 이때 요나는 여로보암 2세가 아람으로부터 국토를 회복하게 될 것을 예언했었고 그것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왕하14:25). 요나는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이 선망하고 바라던 것을 예언했고,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으며, 이로써 요나는 의심할 바 없이 일약 국민 선지자 정도로 추앙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 최고의 설교자로 인정과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한 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이 더 큰 성공과 강성함을 누리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B. 요나의 불순종의 이유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 1:2).” 니느웨는 잔인하고 난폭하기로 소문난 제국 앗수르의 수도였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현실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외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요나는 결국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회개하는 백성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하십니다. 이에 화가 난 요나의 말을 들어보면, 요나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요나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듣고 혹시라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 싫었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스로 도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요나의 모습이 어떻게 요나 안의 거짓 신의 존재와 연결되는 것입니까? 팀 켈러는 『방탕한 선지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원한 것은 스스로 만들어 낸 신이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처럼 사악하고 못된 민족은 벌을 받기 원했다. 그리고 요나와 자신의 민족과 같은 착한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는 신을 원한다. 그런데 요나의 가짜 신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자꾸만 나타나시자 그는 분노하거나 절망한다.”
요나의 우상, 요나 안의 거짓 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에 내리겠다고 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신 결정에 대하여 요나가 분노하는 대목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이 매우 싫었고 이에 분노했습니다(욘 4:1). 이것만이 아닙니다. 요나서 4장은 요나의 태도를 통하여 요나 안의 거짓 신의 존재를 폭로합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이 망하지 않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할 만큼이나 화가 났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예비해 주신 박넝쿨이 시들자 또 다시 화를 내며 말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 여기서 우리는 요나 안의 거짓 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박넝쿨입니다. 하나님께서 화내는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9).” 그는 박넝쿨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박넝쿨 조차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것임에도 말입니다. 그러자 요나는 여전히 성난 태도로 대꾸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9).” 팀 켈러가 말하듯이, “요나의 폭발적인 분노는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다버릴 의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C. 요나의 거짓 신들
요나 안의 신들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애국이라는 거짓 신이었습니다. 자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가치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보다 자기 나라의 번영과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애국이라는 거짓 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국이라는 정당한 사랑이 지나치게 커져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적 사례가 많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옳게 바라볼 수 없었던 소수의 일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나찌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게 커져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독일의 번영을 구함으로써 다른 민족과 나라를 멸하는 일에 참여하여 나찌에 부역한 부패한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요나가 빠진 거짓 신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호를 사용하여 비뚤어진 방식으로 애국을 말하는 사람들, 또는 하나의 이념을 추구하되 지나치게 추구하여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 보다 우선이 되어버린 것은 거짓 신을 섬기는 일일 뿐입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자신이 추종하는 정치적 이념을 복음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보다 앞선 것이 바로 요나 안의 거짓 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요나에게는 두번째 거짓 신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시자, 요나는 화가 나서 성 밖으로 나가 중동의 태양 아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 보겠다고 그늘을 찾아 앉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박넝쿨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니느웨가 망하지 않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던 요나는 이 박넝쿨 때문에 크게 기뻐합니다(6).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튿날 새벽 요나에게서 그 박넝쿨을 거두어가시자, 다시 요나는 분노하여 외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 놀랍지 않습니까? 그는 왜 이렇게 쉽게 목숨을 거는 것일까요?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박넝쿨이 그의 거짓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보편적 거짓 신입니다. 바로 편안함, 안락함의 거짓 신입니다. 종종 선교라는 주제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부담스러운 주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다면’ 이라는 가정은 부담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말이 통하고 관습이 익숙한 내 나라를 떠나 살아간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절제된 검소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초래하는 불편함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요나 안의 거짓 신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나서는 요나 자신 안에 있는, 전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거짓 신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담은 책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섬길지, 네 안의 거짓 신들을 섬길지 결정하라는 도전입니다. 거짓 신을 섬기는 동시에 참되신 하나님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를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3. 우리 안의 거짓 신들의 정체

A. 신앙생활은 우리 안의 거짓 신들을 분별하고 죽이는 영적 싸움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신앙 생활은 우리 안에 있는 우상들, 거짓 신들의 정체를 분별하고 그것을 죽이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사는 동안 내내 지속되는 싸움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서는 이런 대결이 언제나 일어나고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에 십계명의 일계명과 이계명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거짓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짓 신의 기만성은 거짓 신을 인식하는 것을 쉽지 않게 합니다. 모든 우상은 거짓 신이며, 사탄은 주님의 말씀대로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요 8:44).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거부한 것은, 그가 섬기는 거짓 신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과연 안녕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어떻게 반응을 하면서 살아가십니까? 혹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도 하등의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상태라면, 여러분은 자신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전혀 혹은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거의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정녕 거듭났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권고합니다. 벧샬롬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이 여러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듭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의 거짓 신들의 정체를 분별하십시오.

B. 자아 사랑의 거짓 신
요나의 거짓 신은 자기 민족과 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서 ‘지나친’ 이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나는 자기 민족, 조국을 사랑했기 때문에, 앗수르가 멸망 받기를 바랬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지나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이웃을 이웃으로 볼 수 없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할 수 없게 할 만큼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사랑할 때, 그것이 지나친 것입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도와줄 마음을 막을 만큼 우리가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사랑할 때, 그것이 지나친 자기 사랑이며, 우리 안의 거짓 신입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외국인에 대한 증오, 내지는 외국인을 사랑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난민 신청을 한 외국인들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의 일본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에 대한 추종이 지나쳐서 다른 이념에 서있는 사람들을 거부하고 증오하는 태도로 나타난다면, 이 또한 거짓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열정과 비할 수 없는 열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의 포로가 되어 입만 열면 복음이 아닌 이념을 말하는 것은 심각한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속상하고 화가 나고 마음이 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 청년들과 몽골 비전트립을 다녀오면서 깨달은 것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몽골선교사자녀학교는 오래전 버려진 러시아군의 막사를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오후에 비전트립 보고를 통해서 사진을 보시겠지만,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산간벽지의 분교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허름한 건물에서 어린이집부터 유치원 그리고 초중고 교육을 선교사로 오신 여러 선생님들이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그 시설은 몽골교육부의 학교시설 기준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여 교육시설 인가를 받을 때마다 곤혹을 치러 왔다고 합니다. “너희는 잘 사는 나라인데 왜 이런 교육시설에서 교육을 하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과거에 비해 어렵다고는 합니다마는, 선교사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 않는 것이 한국 부모들입니다. 자녀 교육을 이유로 가족이 멀리 떨어져서 지내기까지 합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8년도 우리나라 초중고학생들에 대한 사교육비 지출 총액은 19조 5천억원입니다. 우리는 적지 않은 돈을 아이들의 사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출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은 누가 감당해야 합니까? 선교사들을 파송한 한국교회가 감당해야할 몫이 아닙니까? 선교사들이 사역을 마음 놓고 감당하게 하려면, 자녀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선교 인프라(기반시설)가 필요합니다. 지난 해 9월 교장으로 부임한 양종태 선교사님은 기존의 학교건축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산이 총 17억입니다. 과거 이런 선교 프로젝트는 대형교회들이 목돈을 내서 감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돈을 낸 교회가 학교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당 이전을 위하여 작정 헌금을 드리는 중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식을 기르는 심정으로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을 섬기는 것입니다. 많은 작은 교회들이 참여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도울 수 없을 만큼 우리 마음이 닫혀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다른 거짓 신을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C. 안락함의 거짓 신
요나에게는 조국에 대한 지나친 사랑 외에 또 하나의 거짓 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락함의 거짓 신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안락한 삶을 원합니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안락함을 대표하는 박넝쿨 때문에 기뻐했고 또 분노했습니다. 물론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는 안락함이라는 그늘이 필요했고 그것을 하루 동안 즐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튿날 새벽 그것을 거두어가시자 차리리 죽는게 낫겟다고 분노합니다. 이것은 이런 문제들로 기뻐하고 분노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저는 반농담이기는 했으나, 몽골에 함께 간 청년들에게 누가 좀 남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한 주간 선교지를 체험하는 것은 쉽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로 일평생 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자신의 안락함이라는 거짓 신을 내려놓을 것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렇게 도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10–11).”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십이만여 명의 니느웨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요나가 아낀 안락함이라는 박넝쿨입니까? 여러분의 박넝쿨은 무엇입니까?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박넝쿨은 여러분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가져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재물만이 아닙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권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그것, 하룻밤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그 박넝쿨 때문에, 정말 소중하고 귀히 여겨야 할 가치,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그 중한 것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이것이 우리 안의 거짓 신이 언제나 하는 일입니다. 우리 안의 거짓 신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 것인지,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듭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안의 거짓 신들로 인하여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참된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헛된 것에 우리 인생을 허비하는 것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요나서의 마지막 말씀을 읽을 때마다, 1956년 에쿠아돌에서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다가 그들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한 5명의 젊은이 중 한 사람, 짐 엘리엇(Jim Elliot, 1927~1956)의 일기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여러분이 지킬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재산, 여러분의 지적 능력과 지식, 여러분의 소중한 자녀들, 여러분이 지금 누리는 안락함, 여러분의 건강, 여러분의 시간, 그 어느 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잃어버릴 수 없는 것,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정체성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며 영생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거짓 신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살아가시겠습니까?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안락함의 거짓 신을 죽일 때, 우리가 보게될 너무나 영광스럽고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무한히 자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모든 선하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평생에 아니 우리의 영원에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을 위해서 지킬 수 없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하게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 그 선하심을 신뢰할 때, 우리는 기쁨과 감격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바라기는,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청년들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선교사로 자신의 안락함을 내려놓을 줄 아는 청년들이 일어나는 날을 기대합니다. 이런 복된 은혜가 벧샬롬의 모든 식구들, 가정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