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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마가복음 10:17-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6-09

말씀내용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사실 이 정의 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 사람이 주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은 질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문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말(17,30)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23,24,25), ‘구원을 얻는다’는 말(26)과 동의어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우리 인생에서 이 질문 보다 더 심각한 질문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라는 정의를 내린 뒤에는, 그 정의와 우리 자신을 연결짓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의 정의,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 슬픈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 (17~22)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개의 내용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 나아와 영생에 대하여 물었던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17~22). 그리고 그 사람이 주님을 떠난 뒤에,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시는 이야기가 두번째 내용입니다(23~31).
먼저 우리는 첫번째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주님의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습니다.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마 19:16~30)과 누가복음(눅 18:18~30)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이 사람에 대한 조금의 힌트를 좀 더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사람은 청년이라고 묘사되고(마 19:20,22) 누가복음에서는 ‘관리’(눅 18:18)라고 묘사되고 있기에, 보통 이 사람을 가리켜 ‘부자 청년 관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관리라는 말은 그가 바리새인의 지도자였거나 회당장 혹은 유대 정치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젊은 나이에 상당한 성취를 이룬 사람입니다. 어쩌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을 마가복음의 본문이 묘사하는 것은 매우 특이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17). 1세기의 유대사회와 같은 고대세계에서 진지한 사람들은 보통 뛰지 않았습니다. 뛰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뛰지 않았습니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조선시대 양반은, “느리게 걸으면서 신뒤축을 끌어야 한다”고 묘사됩니다. 고대 유대사회와 우리 조선사회의 비슷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젊은 부자 관리는 예수님께 달려왔을 뿐 아니라, 예수님 앞에 꿇어 앉았습니다. 보통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앉거나 엎드리는 존재는 주로 절박하게 치유를 필요로 하는 병자들이거나(막 1:40) 귀신들(귀신들린 사람들)이었습니다(막 3:11).
이 부자 청년 관리가 보여주는 태도는 그 내면에 있는 절박함, 혹은 갈망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젊은 부자 관리를 억지로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21절에서 주님은 이 사람을 “보시고 사랑하사”라는 했습니다. 이 표현은 매우 특별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주님께서 이렇게 사랑하혔다는 표현이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단 한 사람, 이 부자 청년 관리를 향해서 주님이 ‘사랑하셨다’고 기록했다는 점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꿇어 않아 물은 것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17). 이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행하는 모든 율법 준수와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통해서도 얻어질 수 없었던 확신의 문제로 고민을 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 사람의 서두름과 굴복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유대 문헌에는 어떤 랍비를 향해서도 ‘선한’이라는 호칭을 붙인 경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말을 대단한 아첨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부자 청년 관리가 주님께 매우 이례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실 이 사람의 질문에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호칭부터 바로잡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 많은 성경주석가들이 주님의 이 대답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퉁명스런 대답을 하신 것은 그가 그저 립서비스 차원의 아첨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에도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알지 못하는 이 사람의 주의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절대적 요구에 집중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의 질문은 그 어떤 제자도 주님께 묻지 않았던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기회에 당신의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를 얻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가져오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십계명의 두번째 부분을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19).”
주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청년은 “이것은 내가 여러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20). 이 대답은 그가 율법 준수에 있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바리새인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증해줍니다. 보통 이런 대답을 들으면 “그래 당신 참 잘났소”라고 하고 싶을 텐데, 주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말씀하십니다(21). 여기 ‘보신다’는 말은 골똘히 바라보거나 천천히 살펴서 본다는 뜻으로 주님께서 이 사람의 속내를 보고 계신다는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을 내치신 게 아니고 오히려 이 사람에게 사랑 어린 권면을 주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
이 부자 청년 관리는 주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만큼 절박함과 갈망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 안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자부심, 자기의가 함께 있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무엇이 이 청년의 정직한 갈망을 방해하고 있는지, 그 갈망을 질식시키고 있는지를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한 가지 부족한 것’이었고, 곧 그가 가진 재물로 대변되는 것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청년이 스스로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한 십계명의 두번째 부분에 대한 순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대신, 첫번째 부분—하나님께 대한 계명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청년이 가진 많은 재물은 그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할만한 신적 존재였습니다. 그는 그 재물 안에서 만족과 평안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재물은 그에게 신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당시 유대사회가 가진 부와 재물에 대한 이해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난이나 곤경을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부와 재물은 종종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와 표시로 여겼습니다(신 28:1~14; 욥 1:10; 42:10; 잠 10:22). 부는 율법 준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졌기에, 부자는 곧 율법 준수자라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 역시 이런 인식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제자들 또한 이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어린 권면은 “네 우상인 재물을 내려놓고 나를 따라오면, 하늘에서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청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데, 이 대답은 “네가 영생을 얻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라”는 말씀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장애물은 바로 청년이 자신의 율법 준수로 말미암아 누린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인 재물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앞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어린 아이들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는데(막 10:13~16) 주님은 모든 것을 가진 이 청년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가 가진 전부를 팔아 가난해져야만, 즉 연약한 어린 아이들처럼 되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윤리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기 보다, 일차적으로 구원론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재물은 이 청년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축복으로 여겨지는 이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청년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주님의 ‘이 말씀’은 이 청년이 듣기를 기대했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는 대신 자기 길을 가게 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재물이 많은 고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축복인 재물로 대변되는 자부심과 자기의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추고 이것이 내 이야기는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 부자도 할 수 없는 일 (23~27)
청년이 떠난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23).”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놀라자, 주님은 다시 한 번 확정적으로 그리고 매우 극적인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25).” 이 말씀에 제자들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랍니다(26). 이런 제자들의 반응은, 주님을 떠난 그 청년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보였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자들 역시 당시 율법준수와 부의 상관관계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해를 공유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적지 않은 성경학자들이 주님의 이 말씀에 당혹스러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타(kamelon)를 밧줄(kamilon)을 잘못 읽은 것으로 축소하려고 하거나, 바늘귀를 예루살렘의 한 작은 문(낙타가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문)의 이름으로 확대하려고 시도했지만, 두 경우 모두 사본상의 그리고 고고학상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극단적으로 들리는 이 비유로 말씀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너무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 사실, 제자들의 말은 그 청년이 주님께 물었던 질문,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당신의 의도를 밝히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
주님께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리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신 말씀은, 결국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긴 당시 유대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주님의 이 말씀은 구원 얻을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말이며,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청년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물었지만, 주님은 인간이 무엇을 해도 자기 힘과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하여 받은 하나님의 축복인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말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연약함과 불충분함을 보게 하고, 그들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3. 최고의 강점이 구원의 장애물이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교훈은 무엇입니까? 부자 청년이 보여주었듯이, 우리가 가진 최고의 강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럼으로써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강점이 대단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사람들이 알아주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자기가 자랑할만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자신도 그것을 깊이 의지하게 되는 법입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자기가 의지하고 기대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청년에게 그것은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은 그에게는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자기의 율법 준수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고 축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청년은 그것으로 완전한 확신에 이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가 믿던 그것을 버릴 수 없어서 다시 주님 곁을 떠나가야 했습니다.
자신을 이만 하면 훌륭하다고 여기게 만든 그것이 구원의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종교적으로 선한 삶을 살았고, 부를 얻었으며 권력과 명예도 얻었습니다. 소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자부심이 되었고 자기의의 근거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뭔가 결정적인 하나를 더해야 할 것이 있을지를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가진 전부를 다 내어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가졌다는 사실. 그것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자부심의 근거, 자기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4. 그리스도인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는 말씀을 인정한 사람이다.
우리는 이제 처음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을 정의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먼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인간의 철저한 불가능성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믿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자존심, 야망, 명예욕, 인기 등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의지하지도, 그것들에 뭔가를 더함으로써 구원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는 말씀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그래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5. 패자를 위한 복음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철저하게 인식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불가능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사람을 세상은 패자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홍보하고 드러내서 자신의 가능성, 자신의 훌륭함을 드러내는 승자들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을 대우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직 패자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자신의 불가능성을 철저하게 인정한 사람에게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만한 자들에게 복음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토록 저항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너무나 높은 기준을 제시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제시한다고 느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 관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꼈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하나의 소망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파산했고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힘으로도 자신들의 실패한 인생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걸림돌이거나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이것을 인정하는 패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여러분이 의지하는 그것을 다 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강점, 여러분을 우쭐하게 만들어주는 그것, 여전히 여러분 자신에게 희망을 걸게 만드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서 여러분이 의지하던 어떤 것들을 가져가실 때, 여러분은 그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 부족한 것을 바로잡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진정한 패자임을 고백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 청년처럼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데 만족하면서 교회 생활을 지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갈망을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갈망 자체가 곧 구원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얼마든지 갈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처럼 결국 주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은 혹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순종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가운데 교회 생활을 해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상태로 교회에 오래 머물러 있다는 것이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순종할 수 있는 은혜 아니, 그것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비참하고 무력한 자신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자신의 신앙생활에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 자부심과 자기의을 분출해내는 근원이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 자신의 신앙 생활에서 자부심과 자기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앙 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이며 여러분은 위험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사랑 어린 말씀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돌이켜 자비하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복된 은혜를 주께서 베푸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