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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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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과분한 은혜

시편 23:5-6, 고린도후서 12:9-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1-27

말씀내용
과분한 은혜 (시 23:1~6)

1. 은혜—기독교의 본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표현은 참으로 멋진 표현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이 풍성한 표현은 다윗이 남긴 고백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의 어떤 시기에 이 시를 썼는지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년에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23편은 많은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데, 이 시의 내용이 젊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고백은 아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난 뒤에, 초원도 거닐어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나본 사람의 고백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원수들도 만났던 사람의 고백입니다. 결국 그의 고백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이렇게 고백을 하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것이 꼭 인생의 마지막 시기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삶이겠습니까? 5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극진하게 대우해주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 이것은 특별한 손님에 대한 매우 특별하고도 영예로운 대접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잔에 포도주를 부어주시는데 흘러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여기에서는 가슴을 가득 채워주는 만족감이 느껴집니다. 이것도 자신의 인생의 원수 앞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대접해주시는 것이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자기 인생의 만족의 이유를 6절에서 조금 더 설명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따르리니’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추격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을 추격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추격하시는데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추격하십니다. 경찰차의 추격을 받기 시작하면 기필코 잡힐 수 밖에 없듯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게 붙잡힐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추격하신다는 것이 달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진노와 심판의 형벌로 추격하신다고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형벌을 다 받으셨으니 더 이상 우리가 받을 형벌과 저주와 진노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외에는 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의 이런 깊은 확신을 6절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평생을 도망다녔어도,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붙잡히고야 말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붙잡힌 인생은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우리 인생에 별의 별일이 다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별의 별일은 하나님께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붙잡으려고 추격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께 붙잡히지 않고 내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인생을 붙잡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별의 별일이 다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 조차도 은혜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다윗의 인생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다윗의 이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돈이 많은 것이 부러운 게 아닙니다. 세상적 성공과 성취를 이룬 게 부러운 것도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부러운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닙니까? 이런 은혜를 언제나 누리고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런 은혜를 늘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2. 과분한 은혜를 누리고 산 사람들(고후 12:9~10; 욥 1:20~21; 42:5~6)
성경에서,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우리는 이런 과분한 은혜를 누리고 고백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압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생각나십니까? 저는 제일 먼저 바울 사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체에 가시를 제거해주시기를 하나님께 세 차례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바울 사도를 평생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던 유대인들이거나, 지금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바울 사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고린도 교인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바울 사도가 가진 안질이거나 간질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어떻든, 바울 사도는 그것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겪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세 차례나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 사도가 원한대로 제거해 주시는 대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 12:9).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b~10).”
바로 이것이 과분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여전히 원치 않는 약한 것들이 내 안에 있지만,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게 됨을 깨달은 사람이, “아, 이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구나”하고 도리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어떻습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들이 하루 아침에 욥의 인생에 들이닥쳤습니다. 이때 욥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0~21).”
극심한 재난 속에서도 과분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태도와 고백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저 행복하거나 만족스러운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이런 재난 속에서도 그 재난에 파묻히거나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욥 자신이 친히 겪어야 하는 극심한 고난을 맞닥드리게 됩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작 나타나셔서, 욥에게 내 앞에서 네가 누구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잘못하신게 아니냐고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욥은 도리어 이제야 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자신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고 지금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교만함과 건방짐을 회개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따져 물어서 이유를 알아야하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할 수 있는 양, 하나님 앞에서 쏟아냈던 말들을 생각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사람들은 시편 기자와 함께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시 119:68).”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한에서가 아닙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당신의 모든 기쁘신 뜻대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인생이 이끌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과분한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3. 과분한 은혜를 누리는 길
하지만, 여러분 중에서는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게 무슨 은혜냐고 말입니다. 그런 은혜는 그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다윗이나 바울, 혹은 욥은 어떻게 이 과분한 은혜를 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A. 자기 부인(눅 18:11~12; 사 64:6; 마 16:24; 마 5:3; 욥 42:5)
첫째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에 매여 자아를 높이는 것은 죄인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특성은 더 이상 겸양이 덕이 되지 않고 자기 과시만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기도 조차 자아로 충만합니다. “내게”, “내가”, “나를”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바리새인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1~12).”
바리새인의 이 기도는 전형적인 자기 긍정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로 충만한 기도입니다. 여기에 자기 부인은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많은 수고와 헌신과 봉사를 나열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도 너무나 합당한 존재입니다.
결국 이런 태도가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자신이 이런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죄인의 본성 안에는 이런 태도와 의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의식과 태도를 가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선지자는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도덕, 선행, 교양 등 모든 것이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의 경우, 그의 종교적 수고와 헌신이, 그가 행한 금식과 그가 드린 십일조가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내세울만한 모든 조건들이 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기분이 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누리지 못할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조건으로 자기를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막 8:34; 눅 9:23). 또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 심령이 가난한 것은 은혜를 받을 조건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사람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할만큼 완전하고 의로운 자요 교만이 하늘을 찌르던 자였지만, 주님을 만난 뒤에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은혜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큼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하지만, 깊은 고난을 통해서 그는 더욱 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가 누리게 된 은혜는 과거에 받은 은혜와 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고백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하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합니까?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호의입니다. 자신이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과분한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B. 영원을 사모함(시 16:11; 고후 4:17~18; 롬 8:18)
두번째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누리고 사는 길은, 영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 모든 것을 거는 대신,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본 사람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우리는 너무나 심할 정도로 이 세상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붙잡힌 마음의 상태는 영원을 바라볼 수 없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할 수 없으며 그래서 과분한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늘 세상에서 내가 처한 형편과 처지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낙심하거나 자고하고 거만해집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감격과 평안을 맛볼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또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것은 현재의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지금의 처지와 상황에 압도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영원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원의 관점은 지금 내가 처한 형편과 처지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에, 여유로울 수 있고, 하나님의 참된 선하심과 과분한 은혜가 지금도 자신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의 시간 중 얼마나 영원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사모합니까?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때조차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바라보고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똑같은 처지, 똑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고후 3:18)
세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누리고 사는 길은, 사실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보다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영원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할 때 우리는 자기 부인과 영원을 사모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온통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때, 우리의 자기 영광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목숨을 걸지 않고 영원을 바라보는 안목으로 살게 되고, 거기서 과분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닝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는 일은, 무엇보다도 주의 백성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일어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고, 여러분은 그런 은혜를 구하며, 그것을 기대해야 마땅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주의 형상으로 거룩하게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바울 사도는 자기가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볼 때, 사람들은 주의 형상으로 변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것은 실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물을 타서 혼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하게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전하였습니다(고후 2:17; 4:1~2).
이런 일은 예배에서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가장 강력하게 일어난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뵙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뵈올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할수만 있다면, 우리는 매주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구해야 하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는다는 표현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알게 되고 성령님께서 그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조명하사 우리 마음에 드러내실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놀라고 압도당하여 “세상과 나는 간데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때, 우리는 무한히 작고 무가치한 자신을 보게 되고, 모든 원망과 불평은 사라지며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D. 복음을 묵상함(롬 8:32; 5:8; 8:35~39)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누리고 사는 길은, 복음을 늘 묵상하고 자기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복음을 통해서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바라는대로 삶이 풀려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신 것은,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복음 안에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박해와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릴지 모르는 로마의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이것뿐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가능하면 반복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복음 안에서 충분하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바울 사도는 더 나아가서 로마서 8장의 말미를 이렇게 멋지게 마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이 복음 안에서, 참된 성도는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성도는 복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보장된 사랑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복음을 묵상할 때 성도는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받은 존재이며, 이 은혜를 지금도 누리고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4. 부족함, 약함, 실패, 고난이 은혜의 통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자신이 지닌 부족함, 약함, 실패 그리고 고난은 핸디캡이 아니라,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 자신의 부족함이나 약함, 또는 실패나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족함을 가리고 이미 충분한 실력을 갖춘 사람처럼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연약함을 감추고 강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능하면 실패는 숨기고 성공담만을 늘어놓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남모르게 당하는 고난을 말하는 대신, 우리는 얼마나 평탄한 삶을 사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만일, 이런 인간 본성을 따라서 살아가는 한,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실 것입니다.
나만 아는 자신의 부족함이 우리에게는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제 한계와 부족함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되지 않고 풍성하게 나타나도록 애쓰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제 부족함을 압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해주신 이 벧샬롬의 강단이 과분한 은혜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이 부족함을 아시고도, 제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인 여러분은 제게 너무나 과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저의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한 순간이라도 제가 마치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스스로 착각하게 된다면, 어찌 거기에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로 여겨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부족함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나만 아는 약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건강의 문제이든, 아니면 우리 인생사에 얽힌 어떤 비밀이든, 나를 사람들 앞에서 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함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나를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에 머물게 하는 도구가 되는지 경험적으로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약함은, 무너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열등감에 휩싸여 주눅이 든 채 자신 없이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하라고, 그것을 의지하여 살라고 주신 은혜의 통로입니다.
실패는 어떻습니까?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실패를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실패하지 않으려고 잘 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기고만장했고 자신만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잡혀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로 향하시는 주님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실패가 평생 베드로에게 어떤 일을 했을까요? 저는 베드로가 평생 이 비참한 실패를 잊어버리기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실패는 베드로를 교만할 수 없게 붙들어주었을 것이고, 또한 쉽게 자기 의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멋지고 흠이 없던 사람이 기가 막힌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이 실패는 오히려 다윗을 더욱 사람답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공의 연속을 통해서 보다는 오히려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하고 거룩해집니다. 넘어짐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고 사람답게 하시며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누리는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를 통해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던 환상이 산산조각나고 부서지게 만드십니다. 실패는 감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종종 여러분의 생각 속에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아십시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족함이나 약함 또는 실패와 함께, 또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고난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인생에,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은 신자에게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같이, 부족함과 연약함, 그리고 실패와 고난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더 깊이 느꼈을 것입니다.

5. “주님의 은혜가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우리 삶은 마지막 지점을 통과하여 주님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마지막 순간에, 어떤 고백을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평생의 삶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 실패와 고난을 감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다가, 우리가 정말 진지하고 정직해지지 않을 수 없는 그 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벌거벗은 비참함을 경험하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여러분의 삶에 주신 은혜의 통로들인, 부족함과 약함과 실패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구하시겠습니까?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그 과분한 은혜를 맛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저에게는 이런 비밀이 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혹은 저의 부족함과 약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에, 실패와 고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제게 너무나 과분합니다”라고 고백해 봅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많이 경험하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고백이 저에게만이 아니라, 벧샬롬에 속한 하나님의 권속인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숨질 때 하게 될 말도, 그 고백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