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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연습

이사야 65:17-25, 창세기 18:19, 베드로후서 3:12-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1-07

말씀내용
마틴 로이드존스의 말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음의 세 가지 것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즉,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각,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식, 그리고 내가 거기 도착했을 때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긴 선지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천국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들을 고무하는 예언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현재와 가까운 장래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날을 바라봄으로써 견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2024년도 첫 주일을 맞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2024년도 우리 자신의 삶에, 사랑하는 가족들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들을 붙잡음으로써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 본문의 맥락: ‘왜냐하면 보라’(사 65:17; 56:1; 창 18:19)
본문은 이사야서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는 66장으로 구성되었고, 처음 39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을 주로 예언하였고, 이후 27장에서는 그 심판 너머에 주어지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특별히 65:17-25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문단(56-66장)을 지배한 구원과 의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언급(65:17-66:24)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17절은 사실, 개역개정역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앞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고 근거를 제시합니다. 마지막 문단을 시작하는 말씀이 56:1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justice)를 지키며 의(righteousness)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이사야 56: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처음 조상인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을 때에도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righteousness)와 공도(justice)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세기 18:19).” 그렇다면 65:17 이하는 왜 우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하는가(56:1)에 대한 답변인 것입니다.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왜 의와 공도를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온 세상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보라(For behold)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기 때문이다.’가 하나님의 대답이고 설명이고 근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 대답을 좀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장차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보여줍니다. 거기에서 그 영광을 누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땅을 사는 동안에도 그 나라의 백성 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니, 그 나라의 백성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종말의 영광스러운 비전을 보여주면서, 유다의 백성들, 남은 자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확대하면, 13절부터 시작해서 25절까지가 하나의 문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문단은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로 시작하여(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로 마칩니다(25). 그리고 13-16절은 하나님께서 의와 공도를 행한 백성들에게 장차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17-25절을 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기뻐하며 즐거워하라’(신 28:1-19,30; 고전 15:58; 사 11:6-9; 창 3:14)
17절을 먼저 보지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7).” 지나간 모든 것이 잊혀질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나간 옛 것들이 기억 속으로 되살아나는 일이 없을 만큼, 사람들의 의식과 인식이 완전히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16절 마지막에서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로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도, 사람들도 더 이상 옛 것들을 기억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도 표현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계 21:1).
그렇다면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18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이사야 65:18).” 18절은 사실 개역개정역에는 생략되었지만,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이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과는 정반대로, 오직 넘치는 기쁨만이 있을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수많은 방식으로 세상 속에 가져온 슬픔과 아픔과 수치와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반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에 가까운 말씀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라는 말씀에서 즐거움과 기쁨의 반응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뻐하며 즐거워할 근거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본질 자체가 즐거움이 될 것이고, 그 백성의 본질이 기쁨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기쁨과 즐거움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이사야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총체적이고 완전한 기쁨만이 있을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과 즐거움들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잠시 있다고 곧 사라지고 마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이 즐거움과 기쁨은 다함이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이 살아가게 될 도성과 그 백성에게 관심이 지대하심을 보여줍니다. 주석가 알렉 모티어는 여기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즐거움과 기쁨은 “창세기 1:31의 ‘심히 좋았더라’라는 표현 조차도 여기에는 충분해 보이지 않을 정도다!”라고 말합니다.
19절부터 25절까지는 사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도성이 얼마나 복이 차고 넘치는 곳이며, 거기서 모든 죄는 축출될 것이고 온 땅은 여호와의 성산이라고 불릴지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에 비추어 표현합니다. 19절 하반절에서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할 때, ‘우는 소리’가 삶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면, ‘부르짖는 소리’는 고통이 가해지는 모든 상황을 의미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모든 것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슬픔을 초래하거나 삶에 그늘을 지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20절은 장차 도래할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현재의 삶의 여러 경험적 측면들을 사용해서 말합니다. 이 방법이 아니면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을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이사야 65:20).”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에 슬픔이 없을 것은 때 이른 죽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런 많은 경우들을 피할 수 없고, 그래서 절망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에 대한 묘사는 놀랍습니다. 먼저 13절에서는 모든 것이 차고 넘치게 공급될 것이라고 말하고(13) 영원히 즐겁고 기뻐서 전적으로 행복할 것이며(19),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22-23) 완전히 평화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24-25). 인생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죽은 유아는 없고 나이 든 노인이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죽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표현들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기에, 거기에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죽음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을 것임을 단언하는 표현입니다.
21-22절은 두 개의 긍정문(21)과 두 개의 부정문(22)이 이어집니다. 가옥을 건축했으면 건축한 본인이 그 가옥에 살게 될 것이고,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이 열매를 먹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모세 율법의 표현 때문에 중요합니다.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신명기 28:30).”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초래하는 저주가 어떤 내용인지를 묘사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이런 억울하고 황당한 일들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반복되는지를 압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런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완전하고도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적 순종은 저주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신 28:1-19).
23절은 수고한 것을 누리는 일에서 어떤 방해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이사야 65:23).”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사람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헛수고도, 좌절도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 안에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서도 헛된 수고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린도전서 15:58).”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와 공도를 행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헛수고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하나님께서 그 수고를 영원토록 기억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모든 선행과 사랑과 정의와 공의로 행한 일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넘치는 은혜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4-25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행복한 삶을 묘사하는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됨 또는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백성의 하나됨인데, 하나님은 그들을 늘 주목하여 살피시다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먼저 알고 공급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언제나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24절의 뜻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이사야 65:24).”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미 아시고 행하고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과 그 백성이 누리는 이토록 조화롭고 화목한 관계는 피조세계 전체에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그것이 25절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이사야 65:25).” 이것이 태초에 인간이 범죄하기 전의 에덴의 모습이 회복될 것을 묘사합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앞에서 그것을 그림 같은 언어로 살짝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11장 6-9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6–9).”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라는 표현은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이전의 모든 적대관계가 다 해소되고 두려움이 사라질 것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라는 표현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끝으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뱀인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뱀도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암시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창 3:14) 뱀을 굴복시키심으로써 구속을 완성하신다는 것, 악이 완전히 심판을 받을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즉 피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성산이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3. 그 날은 온다! (말 4:1-3; 계 21:1; 22:20)
우리는 해마다 새해를 맞이합니다. 저는 지난 주일, 2023년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그렇게 해를 보내고, 날을 마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을 연습할 수 있다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해야 하는 일은 다시 연습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연습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연습입니다. 우 리에게 이번에도 2024년 1월 1일이 찾아왔듯이, 하나님께서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에게 약속하셨고, 나중에는 사도 요한에게 환상 가운데 보이셨고 말씀하셨던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해듯이,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라기 4:1–3).” 우리는 해마다 12월 31일을 보내면 1월 1일을 맞이합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므로, 저녁이 지나면 아침에 오게 하셨습니다. 과거에 박정희 독재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김영삼 대통령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어제가 지나면 새 날이 오고 밤이 지나고 나면 새 아침이 밝듯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날도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그것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십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계시록 21:1).” 이 약속을 받은 우리는 이제 사도 요한과 함께 이렇게 구할 수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4. 소망이 현재의 삶을 변화시킨다. (요일 3:2-3; 벧후 3:12-14)
이 확실한 소망을 가진 우리는 이제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매일 새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무엇을 생각해야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묵상하고 기다리며 거기서 우리가 누리게 될 삶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이 왜 중요합니까? 사도 요한은 장래에 대한 소망이 오늘 성도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한1서 3:2–3).”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베드로후서 3:12–14).” 사도 베드로는 정확하게 이사야 선지자가 주전 7-8세기에 유다 백성에게 한 말을 동일하게 1세기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윤리 의식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의와 공도를 행할 힘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날에 모든 것들이 정의롭게 그리고 영원히 바로잡힐 것을 알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행한 우리의 모든 일들을 기억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망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5. 결심이 아니라 은혜—은혜에 절대 의존하는 삶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연습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새해를 시작할 때 잘하는 것은 결심입니다. 새해에는 이런 일을 이렇게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결심은 필요하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또 계획도 세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진 성도도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계획을 잘 세우고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도 신중하게 새해의 계획을 수립해야 하고 그 계획에 맞추어 예산을 편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연습한다는 것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며 결심하는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면 거기에 들어가서 무엇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적절한 준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연습하며 이 땅에서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받고 또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선물로 믿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바뀔 것인데, 그것도 우리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성화의 본질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로이드존스가 말한, 내가 누구인지를 자각하는 지식입니다. 자신에 대한 자각 위에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은혜가 없으면 자기 의가 얼마나 높이 고개를 드는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존귀하게 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하시듯, 은혜로운 존재로 변해갑니다. 이것이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지는 여정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합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연습하는 삶입니다. 그 핵심은 결심이 아니라 은혜이고 그 열쇠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와 성례,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같은 은혜의 수단들을 꼭 붙잡고 부지런히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를 사모하고 그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교회도, 가정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세워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터와 대인관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연습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해, 2024년에 은혜를 받고 또 받읍시다. 새해에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은혜 위에 은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