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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맞는 종말 연습

요한계시록 14:13, 빌립보서 1:20-24, 시편 73:23-2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2-31

말씀내용
우리는 언젠가 예외 없이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재림이 자신의 죽음 이전에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인생의 종말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인생의 종말이 어떤 방식으로 오든지,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결산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종말은 우리 모두에게 경험해보지 않은 낯선 일일 겁니다. 우리는 임종의 침상에 누워서 마치 몇 번이라도 경험을 해 본 사람처럼 여유를 가지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모두에게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생의 종말을 비록 실전은 아니지만 연습처럼 경험하곤 합니다. 가장 흔하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언젠가 이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입니다. “언젠가 이런 방식으로 내 인생에도 종말이 오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독일의 신학자였던 헬무트 틸리케는 이런 섬뜩한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모두는 섣달 그믐날 큰 소리로 떠든다. 마치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어쨌든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종말의 연습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경에서 죽음과 종말에 대한 말씀들을 들을 때, 인생의 종말을 연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은 대단히 많은 분량으로 이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날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가령,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하지요.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린도후서 1:14).” 우리는 수없이 판단하면서 살아갑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 사도를 판단했고 바울 사도도 물론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의 판단은 부분적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너희는 나를 대하여 불만이나 불평도 많겠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종말의 날을 생각하고 있어. 그때 너희가 내 자랑이 되고 내가 너희의 자랑이 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바울의 초점은 지금에 있지 않고 종말의 날에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왜 중요합니까? 바로 바울의 이런 태도가 종말의 연습을 하는데 중요한 태도가 아닐까요? 특별히, 오늘 송년주일은 우리가 종말의 연습을 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종말의 연습에 두 가지나 해당되는 순간이니까요.


1. 죽음에 대한 세상의 생각들 (고후 1:14)
혹시 여러분 중에는 ‘주 안에서 맞는 종말 연습’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부담스럽게 들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사실, 종말이라는 주제는 일반적으로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일 수 없고 도리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고대나 중세에 비교한다면, 현대인들은 죽음을 더욱 불쾌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삶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들, 즐거움들에 대한 기대가 과거의 다른 시대에 비해 훨씬 더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이런 말을 아실 겁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쯤은 해 보고 싶은 것들을 정리한 목록을 말합니다. 영어로 '죽다'라는 말을 약간 비속어적으로 '양동이를 차다(Kick the Bucket)'라고 표현하는데, 본래 무서운 유래를 가지는 말입니다. 목을 매고 죽을 때, 양동이 위에 올라가서 목을 밧줄에 걸고 양동이를 발로 차서 죽는다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어떻든 버킷 리스트는 이런 것들입니다. 죽기 전에, 유명한 장소들을 여행하기, 매우 맛있고 비싼 고급 음식 먹어 보기, 매우 예쁘고 멋지고 비싼 옷 입어 보기, 매우 비싸고 화려한 집에서 잠시 살아 보기, 매우 비싸고 화려한 차를 잠시 몰아 보기, 스카이 다이빙 해보기 등등. 여기에는 죽음은 암울한 끝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고 즐거움도 끝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죽기 전에 가봐야 하는 곳” 또는 “죽기 전에 즐겨야 할 것들”하는 식의 버킷 리스트는 사실 고대세계나 중세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그런 즐거움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해도 현대인들이 가지는 세속적 이해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과 인생에 대한 고대와 중세의 생각이 현대의 생각 보다 더 옳았고 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죽음에 대한 인상, 그리고 인생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만일 부모 세대가 성경적 이해를 가지지 않은 채 자녀들을 기른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의 가치관의 먹이로 전락하는 위험에서 건져낼 수 없을 것입니다.


2.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고전 15:55; 히 2:14-15; 고전 3:14; 히 11:6)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죽음과 종말에 대해서 많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도 죽음을 언급하는 많은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죽음이 시작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었지요. 죽음이 달갑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죽음의 성격을 바꾸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 죽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 저주의 죽음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써, 형벌과 저주의 죽음을 끝장내신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에게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여전히 죽음이 지니는 죄의 결과로서의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이미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에 죽음은 더 이상 신자들을 정복할 수 없고 두려움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쏘는 것’ 즉 독침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찌를 수는 있을지라도 독침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브리서 2:14–15).”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이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성도의 죽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행복한 전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행복은 죽음 이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그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단 앞에 있는 말씀,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는 말씀을 먼저 살펴보지요. 노동으로부터 온전한 쉼을 누릴 수 없었던 인생들에게는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말은 죽음이 복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고는 단지 노동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피할 수 없었던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수고—노동과 고통스러움—로부터 영원히 쉼을 누린다는 말은 죽음 이후의 행복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쉼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최상의 기쁨으로 누리고 경험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영원한 안식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 즉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의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니라”는 말씀도 성도의 죽음이 왜 복된 지를 설명해 줍니다. 성도가 죽을 때, 그가 지은 모든 죄악들과 그가 당한 모든 시련과 고통들은 영원 속으로 성도들을 따라 들어오지 않고 뒤에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맥락을 보면,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받았던 모든 박해와 유혹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행위들은 성도들의 면류관이 되어 그들을 따라 영원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행위로써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행위는 성도의 뒤를 따라옵니다. 성도들을 앞서 하늘 문을 열어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해서 완성하신 구속의 역사이고 그 은혜입니다. 성도들이 행한 일에는 죽음 이후에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고전 3:14).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복됩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3. 어떤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을 뵈올까? (고후 5:7)
혹시 이 말을 들으면서 걱정되는 분은 없습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서 행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다고 생각 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뵈올 때 어떤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뵈려고 하십니까?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아마 1986년이나 87년으로 기억됩니다. 연말을 지내면서, 제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날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내가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열매를 가지고 설 수 있을 것인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묵상을 하는 저에게 “네가 열매를 가득 안고 나를 만나기를 원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제 인생을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이끄셨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풍성히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것이 모두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선교사들이나 설교자들이 이루었던 것처럼 대단한 일들을 행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대다수는 평범해도 너무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행한 일’은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성도가 인생을 살면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그 날에 기억해주시는 ‘행한 일’입니다. 성도는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죽음과 종말을 연습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우리가 작은 일을 행할 때마다 그 일은 당장의 삶에서는 손해를 보는 일이고,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고, 바보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상상해본다면(마 25:35-40), 우리가 믿음으로 행한 많은 일들을 우리는 기억 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주님은 그 날에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성도가 죽을 때, 하늘문으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토니 캠폴로는 자신이 어릴 때 다니던 주일학교 교실 벽에 있던 그림 이야기를 합니다. 한 늙은 구두 수선공이 작업대에 앉아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한 줄기 빛이 그를 향해 내리비치고 그 빛줄기를 따라 그가 만든 구두들이 행렬을 이루어 하나님께로 향하여 올라가는 그림입니다. 토니 캠폴로는 구두 수선공이 평생 만든 구두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선물을 나타낸다고 느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자신의 일터에서 믿음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가운데, 주 안에서 자신이 맞게 될 종말, 죽음을 연습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고후 5:7). 그렇게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행한 모든 일이 성도의 죽음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이렇게 주 안에서 맞게 될 종말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4. 죽음에 대한 밝은 전망과 종말 연습 (빌 1:20-24; 시 73:23-26; 히 13:5)
성도의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죽음은 우리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보다는 밝은 희망의 전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드디서 바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립보서 1:20–24).” 심지어 구약의 성도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편 73:23–26).” 이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믿음으로 한 위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관하여 기억해야만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시 73:23)’라는 시인의 고백이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빌 1:20). 이것이야말로 주 안에서 맞게 될 종말, 곧 죽음을 연습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항상 주와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살아갑시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약속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히 13:5). 그러니 신자의 삶은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함께 그리고 자녀들, 부모와 함께 살아가고, 일터에서도 그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오늘의 하루 하루는 결국 언젠가 여러분이 주 안에서 맞이하게 될 종말을 연습하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5. 섣달 그믐에 종말을 연습하는 성도들
성도의 매일이 그러하지만, 오늘 섣달 그믐은 특별한 의미에서 주 안에서 맞을 종말을 연습하는 날입니다. 2023년도가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 그 마지막 날을 맞고 보냅니다. 우리 삶도 그럴 겁니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이 엊그제 같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어느 새 인생은 황혼에 이르렀고 죽음을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이 오듯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시간도 오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재수 없는 말’이나 ‘부정타는 말’로 들리겠지만 성도들에게는 축복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헬무트 틸리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써 큰 소리로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언젠가 우리에게 찾아올, 언젠가 우리가 맞이하게 될 그 날을 기쁨과 기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버킷 리스트를 들먹이며 죽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의 목록으로 우리 자신들을 밀어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한 해 동안에 믿음으로 행한 모든 일들이 여러분을 따를 것입니다.
모래 시계는 성경적 시간관을 잘 보여줍니다. 바늘이 돌아가는 아날로그 시계는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착각과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숫자가 계속해서 바뀌는 디지털 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래 시계는 시간은 소모되는 것이며, 너무 늦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 또는 늦기 전에 반드시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모래 시계는 성경적 시간관을 더 잘 보여줍니다. 오늘로써 2023년이라는 시간은 끝나버리듯이, 언젠가 우리의 시간은 끝날 것이니까요.


6. 매일 밤 종말을 연습하는 성도들 (고전 15:18; 살전 4:14)
굳이 섣달 그믐 날에만 종말의 연습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주 안에서 맞는 종말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잠 잔다’고 표현했습니다(고전 15:18; 살전 4:14).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도록 창조된 유한한 존재입니다. 성도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종말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다 소모되었으니, 이제 잠자리에 들듯이, 우리 인생의 시간이 다 소모되면, 우리가 주님을 뵈어야 할 시간이 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밤 주 안에서 잠자리에 들며, 언젠가 주 안에서 맞을 종말, 죽음의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매일 밤 잠자리에 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네가 잠자리에 들 때, 기억해라. 언젠가 네 짧은 인생을 마치게 되는 인생의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그리고 주 안에서 맞는 인생의 종말은 얼마나 달콤한 것일지 생각해라. 매일 네가 주 안에서 잠자리에 들게 될 때마다.”
저는 오늘 2023년도 섣달 그믐날에 드리는 송년 예배에서,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며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예외 없이 찾아오게 될 종말, 죽음을 연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그리고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그날 우리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게 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증명하신 은혜로 우리는 그날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드러낸 증거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남이 아닌 십자가의 은혜로 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이 길을 걸어가며 주 안에서 맞을 종말, 그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