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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가정에서 빚어지는 거짓 없는 믿음

디모데후서 1:5, 사도행전 16:1-3, 디모데후서 3: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5-21

말씀내용
1. 신앙 형성의 다섯 가지 요소 (딤전 4:5; 롬 5:3-4)
신앙이 형성되는데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는 은혜의 통상적 수단인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디모데전서 4:5).”고 한대로 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고난을 사용하여 당신의 자녀들의 믿음이 더 온전한 믿음으로 형성되게 하십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b-4)”라고 했습니다. 고난 없이 연단 되는 신앙은 없습니다! 여기에 시간의 요소가 더해집니다. 신앙 형성에 지름길이나 속성과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여정 전체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성화의 길로 이끄시고 우리의 성화는 죽음과 함께 완성됩니다. 끝으로, 공동체의 요소가 신앙 형성에 중요한데,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목할 주제입니다. 나홀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부대끼고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숙한 신앙으로 형성되어 갑니다.


2. 개인주의에 전쟁을 선포하라.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관은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존재와 가치가 국가와 사회 등의 집단보다 우선이라 생각하며, 개인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사상, 사고방식, 가치관, 신념, 태도, 기질을 말합니다(두산백과). 개인주의는 한 마디로 국가나 사회보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사상과 태도입니다. 개인주의는 우리를 포함한 현대인의 의식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을 거의 지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과 신학을 아는 똑똑한 신자들은 많은 반면,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은 신자들, 소위 거룩한 영향력을 가진 경건한 어른들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정-공동체와 상관 없는 개인주의에 토대를 둔 신앙 형성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회 현상에서도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정이 해체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저와 같은 많은 친구들은 보통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안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핵가족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3대가 함께 사는 가정들은 점점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홀부모 아래 형제 없이 외동으로 자라는 경우도 흔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부모들의 맞벌이가 당연시되고 한 살이 되는 아이들이 어린이 집에 맡겨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세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끔찍한 입시 경쟁은 우리의 자녀들을 학원으로 내몰았습니다. 부부 사이에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소통은 최소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급류처럼 우리를 몰아가는 디지털 혁명도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원룸의 주거형태가 보편화되고, 혼밥이라는 용어가 조금도 낯설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입니까? 학교도 아닌 학원에서 지식을 배워 과거 어느 때보다 똑똑한 자녀들은 많아졌지만 그들의 인성, 사람의 됨됨이는 보장할 수 없는 무서운 인간들도 많아졌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람은 학원이나 학교에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가정에서 만들어집니다. 학원에서 지식을 배울 수는 있지만, 사람됨은 가정에서 형성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시고 생육하게 번성하게 하신 것은 단지 생물학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입니다. 사람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가정에서 자라납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어른들을 보면서, 사람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공감을 하며 어떤 일에 대해서 어떤 정서적 반응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체득하고 터득합니다. 그렇게 사람은 만들어져 갑니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겪은 가정 해체 현상은 사람이 만들어져야 하는 환경이 붕괴된 일이었습니다.
저에게,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배우고 적용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꽤 오래도록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고 제가 성장해가면서, 점차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은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는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방금 말한대로,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와 깊이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가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설계였듯이, 신앙도 가정이라는 환경에서 형성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잘 배우고 열심히 기도하면 좋은 믿음을 가진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착각과 오해입니다. 소위 수평이동을 통해서 벧샬롬교회의 교인이 되신 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왜 벧샬롬교회의 교인이 되셨습니까? 말씀을 좀 더 잘 배움으로써 신앙이 성장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코 나쁜 동기일 수는 없을지라도, 온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신앙은 그렇게 형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개인주의의 정신에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3. 로이스와 유니게의 신앙 (행 16:1-3; 딤후 3:15)
이제 본문을 살펴보지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디모데후서 1:5).”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거짓 없는 신앙, 진실하고 참된 신앙을 언급하면서,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언급합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이 서신을 기록하는 바울 사도가 디모데의 신앙과 관련하여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입니까?
먼저 사도행전 16장에서 디모데와 그 가정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는데,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사도행전 16:1–3).”
바울 사도는 디모데와 그의 가정을 1차 전도 여행에서 만났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14).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 그리고 디모데는 아마 바울의 이 첫번째 전도 사역의 열매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2차 전도 여행에서 디모데의 가정을 다시 만났고 이때 믿는 형제들(교회)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는 청년 디모데를 자신의 제자로 삼아 전도 여행에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정리하자면,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는 바울의 전도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정보가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헬라인이었습니다(행 16:1). 어쨌든 이 가정은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주께로 돌아왔고 신실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언급하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디모데가 가진 거짓 없는 믿음은 바울 사도가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에게서도 본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단순히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명가를 이루십시오’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통해서 (구약) 성경의 교육을 받아오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와 그 가정을 잘 아는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 3:15).”
바울 사도는 여기서 청년 디모데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이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서 보았던 그 믿음, 거짓이 없는 참된 믿음이 디모데 안에서도 보인다는 것입니다. 성격이 소심했던 것으로 알려진 디모데는 여전히 미숙하고 연약하며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을 수 있겠지만, 그가 가진 믿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바울 사도가 표현하는 참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라고 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칭찬 받는 디모데의 신앙은 좋은 학원에서 배워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 거짓이 없는 믿음 (딤후 2:17-18; 4:10a)
바울 사도가 디모데의 가정에서 보았던 ‘거짓이 없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 뿐 아니라, 성경은 거짓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디모데후서 2:17-18입니다.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디모데후서 2:17–18).”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아마도 에베소의 거짓 교사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바울 사도는 데마를 언급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디모데후서 4:10a).” 데마는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한 사역자였지만, 결국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자기 길로 간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도 거짓된 가짜 신앙이었다고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성숙한 신앙의 동의어는 아닙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얼마든지 미숙할 수도 있지만, 진짜 신앙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그들에게 성숙한 신앙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우리는 진짜 신앙을 보기를 원합니다. 믿는 부모가 자녀에게서 참된 믿음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보다 더 기쁜 순간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적어도 본문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5. 진짜가 되라.
그것은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가정예배는 중요합니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어린 자녀들이 평생 사랑하고 경외하며 섬길 하나님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이상을 말합니다. 디모데는 어머니와 외조모를 통해서 진짜를 보았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진짜를 보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흔적을 남깁니다. 모든 면에서 그러합니다. 디모데는 적어도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진짜를 보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유니게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에서는 돈을 섬기는 어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식을 속이기는 어렵습니다. 자식들은 또는 배우자들은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압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인지, 기도만 청산유수로 잘 하는 사람인지, 사람들 앞에서만 나이스한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인지 잘 압니다.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감하고 싶지 않지만, 거짓이 없는 진짜 믿음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가정예배 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부모가 자녀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소통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청년 디모데에게서 본 것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는데, 이것은 바울 사도가 이미 교제해왔던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에게서 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참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부모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고, 성장 환경이 어떻든지 간에 부모나 양육하는 분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보면서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여러분이 부모와 양육자에게서 보았던 신앙의 모습은 지금의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언제나 절대적인 의미로 그러하지는 않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듯이, 불경건한 부모에게서 경건한 자녀가 나오고, 때로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사실이, 부모가 자녀 세대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보여주는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무엇을 보고 자라고 있습니까? 유명 브랜드의 좋은 옷을 입혀주는 부모,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고비용을 아끼지 않고 양질의 어린이 집에 보내주는 부모, 자라면 최고의 학원에 보내 장래를 준비하게 하는 부모를 보여주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부모 세대로서 자녀에게 해주는 말이 아니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진짜 신앙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진짜를 보게 해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단순히 가정예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말로 가르쳐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6. 진짜들을 보게 하라.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에게서만 진짜를 보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할머니 로이스를 통해서도 자기가 어머니에게서 본 진짜 신앙을 보았습니다. 단수가 아닌 복수로 진짜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도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그러할 때, 그것이 그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배가가 되는 게 아니라, 수 배로 늘어납니다. 디모데는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보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어린 디모데 안에 형성되어 갔을 것입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그가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배운 성경의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어제 하나님의 품에 안긴 팀 켈러의 전기에 보면, 인상적인 말이 나옵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 팀 켈러의 아내인 캐시 켈러는 자신들의 세 자녀의 믿음이 형성된 것은 복음 중심적인 교회 공동체의 영향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서 진짜들을 복수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라면서 교회에서 수많은 진짜들을 보았습니다. 복음이 변화시킨 진짜들,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단 한 사람의 진짜만 만나도, 그리고 그가 자신의 부모라면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 두 사람 모두에게서, 또는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더 나아가 교회에서 진짜들을 보고 자랄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 없는 진짜 믿음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디모데에게서 보듯이 말입니다.


7. 진짜를 보여주는 교회, 진짜를 보여주는 부모가 되라.
우리는 이점에서 교회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젊은 부모들은 교회를 선택할 때, 자녀들을 맡아서 자녀들이 흥미를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제공하는 교회를 선호할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영어 예배를 통해서 자녀들의 영어 실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회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중고생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대학 진학에 자극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중고등부를 지향하는 교회를 선택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교회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열심이 부모로서 자녀에게 주어야 할 신앙 교육의 책임을 교회에게 전가시켜 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성경은 자녀 세대의 신앙 교육의 책임을 부모에게 맡겼지, 교회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자녀들의 교육을 어린이집에서 시작하여 학원에 맡긴 결과, 똑똑한 아이들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성품과 예의, 소위 사람됨을 갖춘 자녀들을 기르는 일에서 실패한 우리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교회에서도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슬퍼해야 합니다. 교회는 학원이 아닙니다. 교회는 가정의 역할, 특히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뭔가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깨달음과 지식 축적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가정 교육이 사람됨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듯이, 신앙도 가정교육의 형태로 형성되도록 하나님은 의도하셨습니다. 성경적으로 사람됨과 신앙을 분리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가정을 사람됨과 신앙이 형성되는 절대 환경으로 의도하셨습니다.
교회가 자녀들을 위한 어떤 프로그램을 제공하는가는 사실 자녀들의 신앙 형성에 절대적 요소가 아닙니다. 문제는 부모입니다. 디모데가 보았고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형성되어 갔던,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을 부모들이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보여주는 어른들이 교회에 많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대가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때로는 이것이 부모들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고, 어린 자녀들이 예배를 방해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 세대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같은 교회에서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예배 시간에 부모인 우리가 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입니다. 자녀들이 어린 자신들을 돌보면서도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는 부모,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사모하는 부모를 보는가 입니다. 이건 억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진짜는 흉내낼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진짜가 되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녀들로 하여금, 진짜를 보고 또 보고 매일 보게 하십시오.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제공해주는 일에서 부족할 수는 있어도,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보여주는 일에서 실패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영역으로 들어올 때, 교회가 부모의 책임을 도맡을 수는 없지만, 성경은 육신의 자녀들을 둔 부모들만의 책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양육을 받는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교회의 어른들은 교회에 허락하신 언약의 자녀들에게 부모의 역할을 넓게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안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자녀들이 누렸던 그런 복된 경험을 하면서 자라나는 교회의 환경을 줄 수 있다면, 우리 자녀들의 세대에 그보다 큰 축복이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드리는 공예배에 우리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참여하는 것은 그들에게참으로 소중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 가정은 교회의 최소 단위입니다. 가정도 교회입니다. 자녀들의 일생에 최고의 축복이 될 가정예배를 자녀들에게서 빼앗아가는 부모가 되지 마십시오. 그 영적 축복을 돈으로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거짓된 믿음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최고의 행동이 될 것입니다.
혹시 부모 가운데 한 분만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디모데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이 있었다면 바울 사도는 그것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헬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일찍 죽었거나 기독교 신앙을 거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유니게는 자신의 어머니인 로이스와 함께 그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 즉 진짜를 보게 해 주었습니다. 매일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은혜의 공기가 흐른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디모데는 가정에서 어머니와 할머니를 통해서 은혜의 공기를 마시고 자랐습니다. 이것이 그의 영적 유산이 되었고, 자신 안에서도 거짓이 없는 믿음이 형성되게 한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진짜 믿음은 이렇게 형성됩니다. 진짜를 봄으로써, 매일 가정 안에서 진짜의 공기, 은혜의 공기를 마시고 호흡함으로써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 염려한다면, 여러분 자신이 먼저 진짜가 되십시오. 매일 은혜를 받으십시오. 자녀들이 여러분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핑계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녀들이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로 자라기를 원한다면, 더욱 필사적으로 여러분 자신이 은혜를 받는 자리를 사모하고 그 자리를 지키십시오. 은혜로 말미암아 진짜가 되십시오. 은혜의 공기가 흐르는 가정이 되게 하십시오. 수많은 진짜들을 만나볼 수 있고, 들어오기만 하면 은혜의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복음 중심적인 교회-공동체가 되는 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꿈이고 기도의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