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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

빌립보서 1:20-26, 빌립보서 2:9-11, 시편 73:24-2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4-02

말씀내용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날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즉위식을 할 때 나귀를 탔던 것처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고, 많은 백성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이런 환호는 닷새 뒤에 죽으실 예수님의 죽음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왕의 즉위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왕 중의 왕으로 즉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마 28:18).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9–11).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1. 죽음을 생각하라. (빌 2:9-11)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을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합니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고대인들이 죽음을 기억하는 것의 유익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의학과 과학의 발달은 점점 죽음을 낯선 것, 싸워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랍 몰(Rob Moll)은 『죽음을 배우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에 죽음은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겪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미국인들은 죽음을 부인하고 회피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우리는 사람들 죽어간다고 말하는 대신 ‘투병’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로써 중증환자들이 임박한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돕기 보다는 환자(와 의사)들이 죽음에 맞서 싸우도록 부추긴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린다…교회는 죽음의 기술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다시 배워야 한다. 죽음을 앞둔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저주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충분히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공감하는 말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 영혼에 큰 유익을 줍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 삶을 진지하게 대하게 해줍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많은 시대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데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우리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을 우리는 어떤 태도로 맞을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죽음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됩니다. ‘죽든지’(20), ‘죽음도’(21), ‘떠나서’(23) 라는 단어들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신앙을 반영합니다.


2.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은 유쾌한 일일 수 없습니다. 죽음이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습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죽음이 사는 동안 우리를 수식하고 치장해주던 모든 외적인 것들을 다 벗어버리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선 자신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지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죄인의 양심이 그것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문에서 죽음을 환영하는 바울 사도의 태도를 봅니다.


3. 죽음을 환영한 사람 (빌 1:20-26)
20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바울 사도에게 있는 분명한 욕망, 욕심, 바람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이었고,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더욱 좋은’(훨씬 좋은)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사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을 통해서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고 원했고, 죽음도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한가하게 앉아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다시 살게 되는 것과 거기서 자기 인생을 마칠 두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삶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 사도가 20절과 같이 말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자기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 2:20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죽음이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은 바울 사도를 더 나은 상황으로 인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23절).
그는 이어서 ‘그래도, 많이 양보해서, 내가 살아야만 한다면’ 이라고 말합니다. 22절입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빌 1:22).” 그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당연히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말합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삶과 죽음 이 두 사이에 끼어 있지만, 자신은 ‘(육체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가 얼마나 죽음을 갈망하고 선호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욕망’입니다. 이 단어는 죄의 정욕을 의미할 때 사용되는 매우 강렬한 단어로, 참을 수 없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너무나 원합니다. 또, ‘더욱 좋으나’(very much better—NASB)라는 표현은 비교급 부사와 비교급 형용사를 같이 쓰면서 사도가 얼마나 죽음을 원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죽음을 환영하고 강렬하게 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도 말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24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 유익하다는 표현은 앞 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강렬한 욕망과 비교하며, 그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25절에서 분명해집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사도가 죽음을 그토록 원하지만 살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이 진보와 그들의 기쁨을 위해서 입니다. 26절도 이것을 부연합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 1:26).” ‘자랑’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너무나 기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뿌듯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의 존재 때문에 그런 기쁨이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상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4. 우리가 죽음을 환영해야 하는 이유들
바울 사도만이 죽음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는 죽음을 환영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함께 신자의 성화가 완성됨으로써, 신자의 몸은 거룩함에 있어서 온전하게 되고 하늘의 예배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죄의 결과로서 저주의 성격을 지닌 죽음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었으므로, 죽음은 성도들이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도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몸은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고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도 않고 자지도 않음) 불멸이므로 이를 주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이 때에 완전히 거룩해지며 최상의 하늘 속으로 영접된다. 이 곳에서 그들은 빛과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몸이 온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
성도는 죽은 후에 연옥으로 가서 다시 기회를 가지게 되거나 다시 성화의 과정을 거치는 게아닙니다. 죽은 후부터 부활 때까지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눅 16:22; 23:43; 빌 1:23; 고후 5:8; 계 6:9-11; 14:13). 성도는 죽을 때 의식을 가지고 기쁨과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도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은 몸과 영혼의 분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옷을 입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보다 더 좋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 때에 몸이 부활하여 우리가 영화로운 육체를 입게 될 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도의 최상, 최고의 상태입니다(고후 5:4~5).


5.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성경적 이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것도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해서 중요합니다. 천국은 무한하셔서 결코 다함이 없으신 하나님 안에서의 점증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천국은 하나님 안에서 점점 더 큰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끝없이 점점 더 발견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완전하게 만족된 나머지 더 이상 줄 기쁨이 없다고 하실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순간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천국에서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성삼위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고 기뻐하기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지옥은 무한히 영광스러운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거룩한 진노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의 가치를 입증하시는 곳입니다. 지옥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현실적이고 의식이 갖고 경험하는 무섭고 영원한 실재입니다. 천국에서 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이제 만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는 둘 다 말로써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25:41, 46; 살후 1:8~9). 그러나 지옥의 존재가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불신자들의 영혼을 멸하시고 지옥도 없애실 것이라는 이론도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그들의 영원을 다함이 없는 기쁨 속에서 보낼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문에 들어간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은 천국문에서 천사가 말하기를, 네가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존재인지 내게 입증하라고 도전할 때,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만이 우리를 천국문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자격이 될 것입니다.”


6.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면 우리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일은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죽음도 유익하다고 우리가 고백할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을 죽었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두 세기 전 36세에 폐병으로 죽은 영국 목사 리차드 로버츠(Richard Robarts)입니다.
“내 기침은 무서웠고 내 가슴과 옆구리가 너무 고통스러웠다……수일 후 찬란한 영원 가운데서 그와 함께 있을 것을 믿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내 아내와 친지들을 위해서는 더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랬다. 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난 자네가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을 기뻐해야겠지.” 그날 하루종일 그는 하늘의 기쁨의 환상을 체험했다.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찼고 찬양과 안위와 승리의 말을 하였다. “오, 난 나의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 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난 영원히 그를 소유할 것이다. 황금길이 깔린 천성, 새 예루살렘,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죽음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런 죽음은 어떤 특별한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7.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을 준비하라. (시 73:24-26)
그 날을 준비하고 사십시오. 청교도들은 인생을 죽음으로 들어가는 예비학교나 탈의실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이 땅의 삶이 모든 것을 준다고 하여도 천국을 준비하는 예비학교이며 옷을 갈아입는 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삶을 배우는 첫 단계라고 여겼습니다. 시편 기자가 73편에서 보여주는 관점은 이렇습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4~26).” 성도는 하늘의 유업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을 비교하며 그곳이 훨씬 더 좋은 곳임을 확인하면서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8.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저는 목회란 성도의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죽음이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저의 목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다면 우리의 장례식은 영광스러운 장례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믿음으로 이 땅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뿐인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즐거워하십시오. 이 세상이 제공해 주는 것들로 만족을 느끼는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과 그 분과 사귀어 사는 삶 속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십시오.
여러분, 죽음을 준비하십시오. 만일 지금 죽어서 내 영혼이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는 분들은, 이 시간 그리스도께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의 영혼을 맡기십시오.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죽음을 통해 지옥으로 직행할 존재임을 인정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믿으며 주님의 자비로우심 앞에 여러분의 영혼을 부탁하십시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께서만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