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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집

요한복음 2:1-11, 요한복음 17:13, 예레미야 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3-26

말씀내용
1. 세상은 잔칫집인가, 상갓집인가?
우리는 세상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언뜻 보면, 잔칫집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잔칫집 비유에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에는 전쟁의 소식과 전쟁 발발의 불안함, 정치의 소용돌이, 내전과 내전은 아닐지라도 정치과 인종과 피부색 등으로 갈라진 싸움이 일상입니다. 게다가 결국 죽음으로 마감하게 되는 인생의 현실은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한없는 외로움과 적막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합니다. 이것은 어른들만의 현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를 때부터, 열심히 공부에 매달립니다. 초등학생들이 이 경쟁의 세상에서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스트레스에 허덕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대학 시절까지 생존하지만, 수년을 소위 취준생으로 버겁고 슬픈 청춘을 보냅니다. 그 뒤로도, 결혼과 내 집 장만, 출산과 육아, 직장에서의 지속적인 승진 등 인생의 숙제는 끝날 줄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겉으로 보면, 살 만 하다고 느껴집니다. 모두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TV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죽도록 즐기기’에 목숨을 건 듯 보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공허합니다. 그런 즐거움들은 깊은 만족을 주지 못함을 앎에도, 그런 즐거움에라도 몰두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즐거워 보이는 세상은 잔칫집이라기 보다 그저 슬픔을 이기기 위해 가끔씩 웃곤 하는 상갓집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내면에 축적된 슬픔과 외로움을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해, 의미 없는 웃음이라도 지으며 살아갑니다. 제가 이 세상을 너무 어둡게 바라본다고 느끼셨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경험하는 삶의 현실에 가깝다고 느끼셨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셨든, 성경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타락의 결과로, 세상은 하나님을 등지고 에덴 동산 밖에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인류 스스로가 유토피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주장은 20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불가능함을 충분하게 입증해주었습니다. 분명히 21세기의 세상은 1세기의 세상과 달라야 할 것 같지만, 21세기의 과학기술과 문명의 진보는 사람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일에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현실 세계는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졌던 1세기의 사람과 지금 21세기의 사람 사이에는 본질상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존재이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반항적인 죄인입니다. 행복을 원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기쁨을 원하지만, 그들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허무와 슬픔 뿐입니다.


2. 잔칫집에서 벌어진 사건
이런 배경을 생각하고 읽을 때, 본문은 우리에게 더욱 유의미하게 다가옵니다. 이야기의 장소는 갈릴리 가나입니다. 가나는 예수님이 자라셨던 나사렛에서 멀지 않은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사역의 근거지가 되었던 가버나움에서도(마 4:13; 막 2:1) 멀지 않은 도시였습니다. 무대는 한 혼인잔칫집입니다. 예수님과 어머니가 초대된 것으로 보아, 가깝거나 먼 친척의 혼인잔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일주일씩 계속되곤 했는데 그동안 혼주는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계속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책임자는 잔치가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남은 포도주의 양을 계산하여 뒤로 갈수록 조금씩 물을 타서 희석된 포도주를 내오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10절에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이라는 말이 이런 말입니다.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는 얼마나 중요했던지, 당시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소송이 제기되었다는 자료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가나의 이 혼인잔치에서 잔치의 책임자(연회장)가 계산을 잘못하여 잔치는 한창인데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다급한 상황을 인지한 마리아가 개입을 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표적을 행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첫 표적이었습니다(11).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대답한 말씀의 의미는 어머니라는 육적 관계로 당신의 공적 사역을 하실 수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여자여’라는 호칭도 무례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간단하고 비공식적으로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4). 어쨌든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드신 양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결예식에 사용하는 돌항아리 여섯에 가득 채워진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는데, 이 돌항아리 하나에 약 80-120리터 정도가 들어가니 항아리 여섯에 가득이면 전체 양은 500-700리터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혼인잔치에서 다 소비할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처음의 포도주보다 더 나은 포도주라고 감탄합니다.


3. 주님은 왜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시 104:15; 전 10:19; 요 15:11; 17:13)
자, 질문을 드립니다. 주님은 왜 하고많은 중에 당신의 첫번째 표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까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먼저,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여줍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세상에 잠시 잠깐의 만족을 주는 기쁨은 존재하지만, 지속적으로 점점 더 나은 기쁨을 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에 혹했다가도 이내 질리는 경험을 하고 삽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늘 잔치가 열리는 것 같지만, 그 잔치들은 잠시 즐기고는 이내 포도주가 떨어져버리는 잔칫집일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기쁨을 위해서 홈쇼핑에서는 물건을 사고, 기쁨을 위해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기쁨을 위해 맛집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저 잠깐의 만족이고 기쁨일 뿐입니다.
주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시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 104:15)’라고 했고 전도서에서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전 10:19)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쁨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포도주이고,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은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에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려고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메시야가 오신 목적을 보여주려고 예수님의 첫 표적으로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소개합니다.
주님은 뒤에서도 두 차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과 그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1).”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3).”


4.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 (렘 2:13; 요 4:14a)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첫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삼위 하나님 안에서 누리시는 완전한 기쁨을 나눠 주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므로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의 일을 하시고 엿새째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사람에게 기쁨을 주시려는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환경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두신 동산의 이름은 에덴이었습니다. ‘기쁨, 즐거움, 환희’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언젠가 느낄 수 있을 외로움을 미리 아신 하나님은 구하기도 전에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심으로써 아담에게 기쁨을 더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범죄하게 되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기쁨으로 충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먹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깨뜨리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없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혜로움과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날 아담과 하와가 한 일의 본질을 놀랍게 지적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예레미야 2:13).”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모든 후손은 목마른 인생이 되었습니다. 목이 마른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웅덩이를 파지만, 그들이 파는 웅덩이는 물을 담아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하는 모든 일은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비참함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을까요? 너무 슬픈 지적이지요.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노력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담는 허무한 수고일 뿐입니다. 기쁨은 잠깐일 뿐, 세상은 포도주가 떨어져 버린 잔칫집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패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실패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하나님의 아들이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으로 걸어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오늘 이 표적의 의미입니다. 그분이 왜 오십니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있는 난제를 단 번에 해결하고, 기쁨이 사라진 잔칫집에 기쁨을 회복시켜 주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물가에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입니다(요 4:14a). 내가 주는 기쁨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종류의 기쁨이라고, 너희가 이제껏 경험하고 맛보았던 그런 잠시 잠깐의 기쁨이 아니라고, 이 기쁨을 내 안에서 맛보라고 초청하십니다. 이렇게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답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의 최고의 목적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회복시키는 것,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는 것을 이 첫 표적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5. 이 세상과 올 세상의 긴장
하지만,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쁨을 주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주어질 것이고, 그 때 믿는 자들은 완전한 기쁨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 세상과 올 세상과의 긴장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올 세상을 인정하고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올 세상이 완성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이지만, 올 세상은 사실 이미 예수님의 초림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신자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만,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누릴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러하지만, 우리 인생의 시간에서만 본다면, 이 세상과 올 세상은 우리의 죽음으로써 구분됩니다. 이점에서 죽음은 신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 같은 세상에서 죽음은 그나마 허황된 잔치의 끝을 알리며, 영원한 저주 속으로 들어가는 싸인입니다. 그래서 기쁨 없는 잔칫집인 이 세상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때문에 분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회복한 신자에게 죽음은 이 땅에서 온전하게 누리지 못했던 그 기쁨을 온전하게 누릴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는 승리의 트럼펫 소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알던 세상을 바꿔 놓으셨습니다. 절망과 비극의 인생이 아니라 기쁨과 소망과 영광의 문을 열고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아직 고된 현실이 있습니다. 그 현실이 우리에게 가장 유용하기 때문이고, 지금의 고난과 눈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6. 교회는 기쁨이 회복된 잔칫집이다. (사 55:1)
신자는 이 세상과 올 세상, 현세와 내세의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늘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맛보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진정한 기쁨입니다. 잠시 잠깐의 만족 뒤에 허무 만을 남겨주는 쓰디쓴 기쁨이 아닙니다. 주님은 기쁨이 없는 잔칫집에 들어오셔서 기쁨이 넘치는 잔칫집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죄의 대가인 죽음을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이유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쁨을 회복한 잔칫집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는 포도주가 떨어져 어쩔 줄 모르는 잔칫집인 이 세상을 향해, “우리의 잔치에 와보라”고 “여기에는 진짜 포도주가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쁨 가득한 잔칫집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포도주의 양이 한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에서 소비하기에는 불가능할 만큼의 포도주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낭비를 좋아하는 주님이라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풍성함을 드러내시고, 결코 소진할 수 없는 포도주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에 두신 기쁨은 결코 소진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아무리 오래도록 마셔도 다함이 없을 만큼의 양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또 기억합시다. 이 포도주는 이제껏 맛본 포도주와 비교할 수 없는 맛입니다. 이 포도주는 언제나 이전 보다 나은 품질을 보장합니다. 어제 보다 오늘이, 오늘 보다 내일 맛보게 될 기쁨은 언제나 이전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언제나 처음이 나중보다 낫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기쁨은 언제나 지금보다 나중이 낫습니다. 영원히 그러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소망입니까? 누구에게 이 소망이 주어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보장하신 소망입니다.
이 교회의 영광을 아십니까? 교회는 그저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인 잔칫집이 아닙니다. 메시야가 이 잔칫집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꿔 버리셨습니다. 다함이 없을 기쁨을, 하늘의 질 좋은 기쁨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고 포도주가 떨어진 세상을 향해,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자신 있게 외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점점 더 맛을 내는 포도주가 이 집에는 끊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기쁨과 영광의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이 기쁨을 누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