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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자랑

고린도후서 6:1, 에베소서 1:6, 고린도후서 5: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3-19

말씀내용
저의 고민은 어떻게 복음이 교회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는 율법주의가 아닌 은혜의 원리에 의해 작동될 수 있을까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복음이 교회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면, 복음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되겠지만 복음이 교회의 문화를 형성하기까지의 여정은 간단치 않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복음으로 새 사람 답게 변화하는 성화의 과정이 인생 전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지난한 과정이라면, 복음이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키고 그 안에 복음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공동체의 복음 문화란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거기에 이르게 되는가 하는 큰 고민 속에서, 그 한 단면을 ‘은혜와 자랑’이라는 주제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 (고후 6:1)
고린도후서 6:1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일단, 이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일은 일어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현상적으로는 은혜를 받고 있거나 혹은 은혜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데, 은혜를 받은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는 은혜를 받은 사람 안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전제를 가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정말, 은혜는 은혜를 받은 사람을 변화시킵니까? 그렇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변화시키시는 수단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람은 변합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망가집니다. 물론 죄를 억제하게 하는 일반은혜의 차원에서, 사람은 특별은혜를 받지 못해도 완전히 망가지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가 은혜를 받지 못하면 망가집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매일 매순간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 “은혜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정확히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교리강좌에서 배운 ‘은혜의 외적 수단’인 말씀과 성례와 기도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외적 수단들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화는 우리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최고의 프로젝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일평생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드렸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은혜를 받지 못한 심령의 상태는 오래도록 사람의 손길이 없이 방치된 숲과 같이 거칠고 제멋대로 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필사적으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2.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결과 (고후 5:12; 11:13-15,20)
먼저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한 정황을 좀살펴보지요. 고린도교회는 18개월 동안 바울 사도의 사역의 결과로 세워졌습니다. 이후 바울 사도가 떠나자,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고후 5:12). 자랑은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 잣대로 자신들을 증명하고 자랑하기 바빴고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들에게 향하도록 미혹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의 정체를 이렇게 드러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린도후서 11:13–15).” 거짓 교사들의 미혹이 얼마나 잘 먹혀 들어갔던지 바울 사도는 이렇게 꾸짖습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린도후서 11:20).” 결국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 사도를 의심하게 되었고, 바울 사도에게 당신이 진짜 사도임을 증명하는 다른 사도들의 추천서를 가져와보라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켜 너희가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은 증거를 개인과 공동체, 두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A. 개인: 자랑과 자기의 그리고 위선
먼저 은혜를 헛되이 받은 증거를 개인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자랑입니다. 자랑은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다 자랑합니다. 자랑거리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노골적인가 아닌가의 차이를 제외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랑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고, 바울은 그것을 ‘외모로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 5:12).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자랑이 유치하다면, 자기의는 교묘합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인정 욕구에 목말라 합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인정 받고 싶어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위선이 개입됩니다. 결국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인간은 세상적 자랑과 자기의 그리고 위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B. 공동체: 율법주의와 세속주의 문화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이 많아질 때, 교회 안에서 종교적으로는 율법주의가 문화로 자리잡게 됩니다. 율법주의가 나타나는 방식은 판단입니다. 일정한 기준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판단하고 판단 받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언제나 외적인 것들입니다. 내면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보이는 것과 외면적인 것들입니다. 얼마나 기도하는가, 얼마나 교회에 봉사하는가, 얼마나 열심히 예배당에 나오는가 등 입니다. 이 잣대에 의하여, 사람의 신앙이 측정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교회도 집단적으로 자랑의 문화에 길들여집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좋은 교회입니다”라는 유치한 자랑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는 문화가 유치한 세속주의입니다. 세속적 자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사람들의 마음은 그런 자랑거리들에 의해 휩쓸리곤 합니다. 예컨대, 예배당에서 다른 사람이 들고 있는 핸드백을 보고 집에 가는 길에 다투는 일이라든지, 누군가 좋은 포지션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속이 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슬픈 현실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3. 은혜가 만들어내는 변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한 배경을 설명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은혜를 헛되이 받은 증거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헛되이 은혜를 받지 않고, 참되게 은혜를 받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실, 바울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심으로써 죄인을 변화시키십니다. 그 변화는 안으로부터 밖으로의 변화이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삶의 태도와 행동이 변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참되게 받은 결과도 개인과 공동체로 나누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A. 개인: 경건한 어른—자아로부터의 자유 (고전 4:3-5; 눅 14:26; 고후 2:14; 4:7; 12:9-10)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의 변화입니다. 은혜가 한 인생 안에서 만들어내는 궁극적 결과는 경건한 어른입니다. 경건한 어른은, 오래도록 은혜를 참되게 받아온 결과입니다. 경건한 어른은 의지적 훈련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경건한 어른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만 말하려고 합니다.
경건한 어른은 자아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그 시선과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위 자랑거리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에 죽고 살지 않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비난을 했으며, 누군가의 근거 없는 오해를 받는다고 해서, 상처를 받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영적 아버지인 자신을 향해서 가짜 사도가 아니냐고 의심하며 증명서를 가져와보라는 고린도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그들을 자식처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4:3-5).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가복음 14:26).”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자기를 부인하는 힘이 생깁니다. 은혜를 받으면 자아로부터 하나님께로 자신의 시선과 관심이 옮겨 가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 같지만,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자아에 묶여 자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은혜를 참되게 받으면 그의 시선과 관심은 자아로부터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후서 2:14).” 이 구절의 의미를 좀 더 잘 보여주는 것은 공동번역성경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공동번역). 바울 사도가 로마군의 개선행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승전한 로마의 장군은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개선 행진의 선두에서 행진합니다. 그리고 맨 뒤에는 포로들과 전리품들이 따라오는데 특히 패배한 적장이 결박 당한 채로 끌려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자기가 주님과 함께 맨 앞 선두 마차에 타고 행진한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그런 말을 한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패배한 포로로 소개합니다. 개선 행진이 마치면 패배한 포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굶주린 야수들의 밥이 될 것입니다. 즉,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항복했습니다. 내가 아니라, 나를 정복하신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위대한 장수입니까?” 그의 관심은 자아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옮겨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으로 가면, 바울 사도는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합니다(고후 4:7). 질그릇은 별볼일 없는 그릇입니다. 하지만,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겼습니다. 그 보배는 그리스도요, 영광의 복음입니다. 질그릇이 깨어지면 그 안의 보배가 빛을 드러낼 터이니, 이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우리를 자아로부터 자유하게 함으로써, 결국 자기의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9–10).” 바울 사도는 자기의 약함을 기뻐했고 자랑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자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그 시선과 관심이 자아로부터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경건한 어른의 특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은혜를 참되게 받을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B. 공동체: 복음 중심적인 교회
두번째로, 성도들이 은혜를 참되게 받을 때, 교회 공동체에 임하는 결과는 복음 중심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율법주의는 물러가고 새로운 복음 문화가 형성됩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은 더 이상 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 되고 경험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의 운영원리가 복음이 되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관계들 속에서 복음을 경험하는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외적 조건에 따라서 차별하는 일이 사라지게 됩니다. 연약한 지체일수록 더욱 귀하게 여김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 조건을 무시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일들이 경험되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교회는 가족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율법주의적 자기의와 위선적 모습들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고, 그들은 자연스러우며, 아름답습니다.
이런 공동체가 되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은혜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바로 경건한 어른들입니다. 저는 경건한 어른이 많이 있는 교회가 그립습니다. 다시 한 번 저는 경건한 어른에 대한 말을 제 책에서 인용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혹은 신앙의 고민을 가지고 있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어른이 있는가?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는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이다.
이런 경건한 어른이 있는 교회는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교회를 경영하듯이 자기 분야의 전문성으로 일하는 교회가 아닐 것이다. 경건한 어른들과 그 제자들로 구성된, 경건한 관계로 이루어진 교회일 것이다. 경건한 어른은 직책이나 분주함 또는 자기가 가진 전문성으로 영향을 미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교회는 경건한 성품과 영적인 지혜가 학위나 기술, 어떤 분야에서의 성취나 전문 지식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교회일 것이다. 내 안에는 경건한 어른들에 대한 그치지 않는 열망이 있다. 그리고 경건한 어른들이 계신 교회에 대한 꿈이 있다. 믿음과 삶에서 모범이 되는 경건한 어른들이 있는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는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설교는 성령의 능력 외에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들의 존재는 목사의 설교의 실증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저 설교대로 살 수 있겠어? 목사나 되야 저렇게 살 수 있지.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살아? 목사도 저대로는 못 살걸!”하는 말들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 가운데 완전한 사람은 없고 죽음 이전에 우리의 성화가 끝나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신앙의 본이 되어주고 한 발 앞서서 우리를 이끌어줄 경건한 어른의 존재들은 분명히 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상상해 보라. 갓난 아이를 포함해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스물 쯤 되는데 부모는 늘 바깥 일로 바쁘다. 그 집은 얼마나 정신 없는 집이겠는가? 나는 오늘날 교회가 혹시 이런 모습은 아닌지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경건한 어른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경건한 어른들이 계신 교회를 그리워한다.”
이런 일은 여러분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4. 교훈과 적용 (엡 1: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로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가 하나님께는 중요합니다. 평생 교회당을 몇 개 지었다고 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갔는가 입니다. 경건한 어른은 오랜 세월, 은혜를 참되게 받아서 살아온 열매이듯이, 어느 날 갑자기 뭘 좀 열심히 했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받은 목적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에베소서 1:6).”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복, 저런 복, 인생의 자랑거리들을 잔뜩 주셔서,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을 떠벌이는 인생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보여주고 찬송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는 경건한 어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자랑하고 사십니까? 외모로 자랑합니까, 그리스도를 자랑합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자랑하지 않으신다면, 필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영광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찬송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늘 자랑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랑도 하면서 은혜의 영광을 동시에 찬송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