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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요한복음 15:13-15, 야고보서 2:23, 에베소서 4: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3-12

말씀내용
저는 우리 교회의 새가족이 되시는 분들에게 ‘영적 친구를 사귀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친구라고 할 만한 존재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고립과 고독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영혼의 친구를 가지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큰 기대를 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에게 길동무,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길이 넓은 길이 아니며 이 길을 따라 걷는 일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순례자들이 결코 혼자일 수 없음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신자의 순례 여정은 혼자 걷는 여정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이고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와 우정에 대하여 말입니다. 여러분은 친구가 있습니까? 우정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제각각이기에 이 질문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관점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친구들 (사 41:8; 창 18:17,20-21; 약 2:23; 출 33:11; 요 15:13-15)
먼저 하나님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린 두 사람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이사야 41:8에서 하나님은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약 2:23). 어떤 맥락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렸을까요? 그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맥락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고 하실 때,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털어놓으셨던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세기 18:20–21).”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털어놓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세기 18:17).”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린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계획—비밀을 털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린 두번째 사람은 모세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애굽기 33:11).”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구와 대화하듯 이야기를 나누셨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창조에서 족장들의 이야기를 넘어 율법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계시를 모세에게 알리셨고, 모세는 그 계시를 받아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말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는 맥락 역시,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으셨다는 데서 발견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한복음 15:13–15).”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친구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종과 친구의 차이를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 행하는 사람이 종이라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시는지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친구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종이지만, 단순한 종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제자들에게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관점에서 강조한 포인트는 하나님께서 비밀을 털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하셨고,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린 이들은 나란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의 삶을 드리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2. 친구—우정
이런 친구의 개념을 전제로, 우리는 일반적인 친구—우정의 개념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C.S.루이스가 《네 가지 사랑》에서 우정을 설명하는 내용을 조금 나누겠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우정은 모든 사랑 가운데 가장 행복하고 가장 인간미 넘치는 사랑이요 생의 면류관이자 덕의 학교였지만, 현대인들에게 우정은 다분히 주변적이고 생의 향연에서 주 코스가 아니라 하나의 오락거리, 남은 시간을 채워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질문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정은 사랑들 중에서 가장 덜 태생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에로스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무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자녀를 돌보아 양육하는 부모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무도 생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점에서 남녀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은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정은 다릅니다. 세상은 우정이 없어도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계속 번식은 일어날 수 있고, 생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우정이 가지는 가치는 생존 가치(survival value)라기 보다 문명 가치(civilization value)입니다. 우정은 생존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생존을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보통은 소극적으로 물러서게 됩니다. “굳이 친구가 없어서 나는 살 만해!”라고 말하며 “그냥 나는 이런 교회 생활에 만족하고 싶어!”라고 하면서 물러섭니다. 내성적인 성격은 이렇게 정당화될 수도 있고, 그 외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에게 교회 생활은 이 정도 선에서 멈춥니다. 물론 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내 영혼의 친구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질문은, 이런 교회 생활은 정상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같은 진리를 보고 있는가? (엡 4:13; 마 7:13-14)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우정에 대해서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C.S.루이스는 우정이란 이렇게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우정은 어떤 사람이 상대에게 “뭐! 너도?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물론 이것이 종종 악에 대한 공유와 공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우정은 이렇게 발생합니다. 적어도 우정에 있어서,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라는 말은 ‘당신도 같은 진리를 보고 있습니까’ 혹은 ‘당신도 이 진리에 관심이 있습니까’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누군가가 깊이 공감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연인과 친구는 다릅니다. 연인들은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친구들은 자기들의 우정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연인들은 대개 얼굴을 마주 보며 서로에게 빠져 있는 반면, 친구들은 나란히 앉아 공통된 관심사에 빠져 함께 앞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와 우정 그 자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감상적인 사람들이 친구를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우정이 생기기 위해서는 친구라는 존재와 우정이라는 주제를 넘어서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무엇, 내 마음과 생각을 붙잡고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 진리가 있는데, 누군가가 내가 보고 있는 그 진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정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게 되는 것이지요. “당신도 저와 같은 그 진리를 보고 있나요?”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하여 “내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다만 친구를 원할 뿐이에요”라고 한다면, 거기에 우정은 생길 수 없습니다.
1747년 뉴잉글랜드에서 목회를 하던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목회의 위기를 맞고 있었고 정신적인 외로움 마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일대학의 동문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18-1747)가 폐결핵이 악화되어 요양을 위해 에드워즈의 목사관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브레이너드는 뉴저지에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였고, 에드워즈 보다는 열 다섯 살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즈가 브레이너드를 만났을 때,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영적 일체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브레이너드는 진정한 선교사의 모범일 뿐 아니라 경건의 능력과 참으로 살아있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라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 경건한 두 사람 사이에는 이렇게 나이를 넘어서는 우정이 생기게 되었고,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전기와 일기를 출판해야겠다는 소명감 같은 것을 느끼기에 이릅니다. 브레이너드는 3개월 남짓 에드워즈의 목사관에서 지내다가 29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들의 우정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우정은 결국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위대한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봅시다. 교회 안에서 우정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진리에 대한 깊은 끌림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 개개인의 마음이 끌리는,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교회는 기껏해야 취미 생활 정도를 공유할 수 있는 동호회들을 만들어 친목을 다지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런 방식으로 교회의 친교를 유지하는가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서 하나가 된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엡 4:13). 세상에 이런 공동체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좁은 문을 통과하여 길이 협착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길입니다(마 7:13-14).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끌리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 사이에는 우정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들이 함께 바라보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들이 함께 보는 진리는 복음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정이 쉽게 일어나지 않고 경험되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고 복음에 대한 이해가 모호하거나 불분명하거나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13은 교회는 진리—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안에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신자들 각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 선명할수록, 그리고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명확할수록 그들 안에서의 우정은 더 많이 발생하고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반면, 여러분이 그저 인생에서 자기를 이해해주고 외로움을 달래 줄 친구를 찾는 감상적 성향에 이끌려 교회 안에서 우정을 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정은 “당신도 같은 진리를 보고 있나요?”라고 묻는 것이고, “나도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진리를 보고 있어요. 그것이 보인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정 안에서는 벌거벗은 몸 대신 벌거벗은 인격이 만납니다.
그리고 참된 우정은 여러 종류의 사랑 중에서 가장 질투가 적은 사랑입니다. 우정은 에로스와 달리, 배타적이고 질투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둘은 셋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셋은 넷이 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서로 나란히 서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진리를 보는 가운데, 한 사람이 더해지고 두 사람이 더해지면 그 우정은 더 강화되고 힘을 얻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바로 이런 일들을 깊이 경험하게 되기만을 바랍니다.


4. 영적 우정의 공동 기반—죄용서의 확신, 구원의 확신, 칭의의 은혜
영적 우정은 세상에서 가끔 경험하는 것처럼 서로를 치켜 세워주는 관계로 가지 않습니다. 《천로역정》 2부의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해석자의 집에 도착한 크리스티아나와 일행은 거기서 씻김과 인침과 깨끗한 흰 옷을 받아 입게 됩니다. 여기서 씻김은 죄사함의 경험을, 이마에 인침을 받은 것은 구원의 확신을, 그리고 희고 깨끗한 세마포 의복은 칭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씻김과 인침과 흰 옷을 입자 마자,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서로에 대한 찬탄과 경이로운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었습니다. 인용합니다. “여인들이 그 옷으로 단장을 하자, 서로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왜냐하면 서로의 영광이 너무 빛나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자기보다 낫다고 세워 주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당신이 나보다 훨씬 아름다워요”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아니에요. 당신이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해요”라고 말했다. 아이들도 그들이 입은 옷을 보고 놀라 서 있었다.” (2부 4장)
C.S.루이스는 “우정이 서로에 대한 찬탄, 감상의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다면 그것은 전혀 우정일 수 없다. 우리 우정에 [천로역정]에서 크리스티아나와 그 일행이 보여주었던 모습이 결여된다면 우리 삶은 비참하리만큼 빈곤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영적 우정은 “당신이 나보다 훨씬 아름다워요”라고 진심으로 느끼면서 말하면, “아니에요. 당신이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해요.”라고 화답하게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크리스티아나 일행이 서로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씻김과 인침과 흰 새 옷을 받은 후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이 사실들을 기억하는 동안 영적 우정 안에서 그 우정을 안전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죄용서의 확신과 구원의 확신 그리고 칭의의 은혜는 영적 우정의 공동 기반입니다. 영적 우정에서 이 공동 기반을 망각하는 일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구원의 복음 안에서 죄용서의 확신과 구원의 확신 그리고 칭의의 은혜를 선명하게 배우고 알고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우리 교회의 많은 가족 구성원들 가운데 선명하게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우리 안에서 진정하고 아름다운 영적 우정들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점에서 영적 우정들은 교회가 교회된 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영적 우정의 창조적 능력 (잠 27:17)
우정은 서로를 알아보는 우리 자신의 뛰어난 분별력이나 안목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정이란 우리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우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을 열어 서로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그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아름다움이 그렇듯, 하나님에게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우정 안에서 하나님은 그 아름다움이 더욱 자라게 해 주십니다. 심지어 영적 우정은 그분께서 아름다움을 계시하시는데 사용되는 도구일 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창조하시는 데 쓰이는 도구도 됩니다. 문제는 이런 영적 우정이 오늘날 교회 안에 없거나 너무 드물다는 것이고, 그래서 교회는 그런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능력을 결여하게 되고, 그런 아름다움을 창조해낼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청교도 운동은 어느 탁월한 한 인물을 중심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널리 공유된 비전을 통해 생겨난 여러 형제들의 유대 관계였다고 주장합니다. 놀랍도록 선한 영향을 후대의 교회에 지속적으로 미치고 있는 16-17세기 청교도 운동은 우정의 산물이고 우정의 열매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청교도들이야말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언 27:17).”는 말씀을 그대로 입증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언제든지 탁월한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 각자가 가진 재능과 능력 덕택에 그들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영적 우정의 관계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가 힘이 없는 것은 한편, 이런 영적 우정들의 결여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우정은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이르러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영원토록 하늘에서 누리게 될 교제의 성격을 미리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우정을 연습하고 배워가며, 영적 우정의 능력을 새롭게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6. 교훈과 적용 (빌 1:27)
말씀을 맺기 전에, 저는 영적 우정의 관점에서 여러분 개인의 교회 생활을 돌아보시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적 우정이 있습니까?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영적 우정의 관계들이 거미줄처럼 엮여져 있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 백명의 고독과 고립 그리고 영적 외톨이들이 우리들이라면, 우리는 결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빌립보서 1:27).”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귀에 박힌 익숙한 말, 교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영적 우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주님께서 너희는 내 친구라고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그리스도의 친구로서 그 관계를 얼마나 제대로 누리는가의 여부에 영적 우정의 확산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말씀이고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 여러분 자신이 더 선명하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복음을 깨닫는 만큼, 우리 안에서 영적 우정은 더 많이 발생하고 깊어져 가며 넓혀져 갈 것이고, 우리는 온전한 교회로 자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전에는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창조적 열매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C.S.루이스가 간파했듯이, 우정 자체는 악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증오나 불만의 공유가 주는 위험한 매력은 나쁜 형태의 우정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런 우정은 생각할 수도 없는 파괴적 결과를 교회 안에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우정이 진정한 영적 우정이기를,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더 선명하게 알아가고 깨달으며 주님을 더 온전하게 바라보기를 원하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