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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공사중입니다

고린도후서 4:16-5:10, 유다서 1:20, 마태복음 7:22-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3-05

말씀내용
우리는 머잖아 다 죽을 겁니다! 그날은 우리의 공사가 마치고 집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지난 2월 거의 한 달에 걸쳐 예배당 리모델링 공사를 하는 동안, 저는 이런 일과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니 김장로님과 서목사님과 장전도사님이 얼마나 많이 수고를 하셨는지 모릅니다. 약 30년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예배당을 지으면서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는데, 이번에 작은 공사를 하면서 그것을 다시 확증했습니다.


1. 우리 인생은 건축물이고, 하나님은 탁월한 건축가이시다 (유 20; 마 7:22-27; 엡 1:4-5)
하지만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탁월한 건축가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건축물에 비유합니다. 인생 여정은 건축의 여정입니다. 유다서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다서 20)”라고 말씀하는데, ‘세우며’라는 말은 ‘건축하다, 집을 짓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집을 짓는 자들이지만, 이 일은 우리 각자의 실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이 건축을 설계하셨고 성취하시고 완성하실 건축의 마스터는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건축의 ‘ㄱ’ 자도 모르는 저 같은 사람은 안심합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집을 지으려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유다서의 말씀에서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건축물의 기초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해야 합니다. 그 어떤 선한 행위나 업적이나 성취도 인생 건축물의 기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생 건축물의 기초로 말씀하신 것이 하나 더 생각납니다. 마태복음 7장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복음 7:24–27).”
여기서 주님은 행위를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의 이 말씀은 유다서의 말씀과 상충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잘 보면, 여기서 행위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여부를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듣고 계십니다. 그러나 들어서 깨달은 말씀을 순종하느냐의 여부로 우리는 둘로 갈릴 것입니다. 평생 예배당에서 바르고 좋은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이 우리 인생의 건축물을 반석 위에 든든히 세우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반석 위에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지요. 어떻게 순종합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순종은 믿음이 만들어내는 순종 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들의 순종이 율법주의의 순종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의 순종은 잘 하면 할수록 자기의(self-righteousness)라는 악한 열매를 만들어내고, 가만히 두어도 무너질 부실 건축물만을 세울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태복음 7:22).”라고 할 때, 그들을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7:23). 그러나 믿음이 만들어내는 열매는 ‘경건한 어른’이고 이것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건축물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오늘도 우리는 공사중인 사람들입니다. 이 공사는 우리가 사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됩니다. 주일은 쉬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공사는 주일에 더 많이 진행됩니다. 이 공사는 몇 살부터 시작이 될까요? 뱃속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이 공사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엡 1:4-5).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사랑스런 자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건축의 마스터이신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을 어린 자녀들의 건축을 위한 조수로 부르셨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여! 여러분은 자녀들의 영적 건축을 위하여 부름 받은 조수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중요한 기초 공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기에, 사랑하는 자녀들의 공사를 망치는 주범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피할 수 없는 낡아짐과 죽음(4:7,16-5:1)
이 배경 설명을 가지고 이제 본문을 살펴봅니다. 본문도 건축이라는 주제로 신자의 삶을 묘사하는 점에서 앞의 설명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그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대조가 나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4:16), 환난의 경함과 영광의 중함(4:17),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4:18), 잠깐과 영원(4:18),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5:1), (덧)입음과 벗음(5:3,4), 죽음과 생명(5:4), 주와 따로 있음과 주와 함께 있음(5:6,8), 믿음과 보는 것(5:7)입니다. 이 많은 대조들은 같은 맥락에 있는 대조들입니다.
4:16에 겉사람과 속사람의 대조를 먼저 주목합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린도후서 4:16).” 겉사람이 우리의 육신을 의미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피할 수 없이 낡아지고 노쇠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건축은 이런 겉사람을 보수하는 공사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듯,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공사가 우리가 인생에서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공사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조차, 겉사람을 보수하는 일에 엄청난 재정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반면, 자신들의 속사람의 새로워 짐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거나 최소한의 비용만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겉사람이지 속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겉사람은 아무리 여러분이 많은 비용을 들여 보수공사를 할지라도, 결국 무너지고 말 건축물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육신의 건강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이것은 버리고 저것을 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겉사람에게는 겉사람 만큼의 수고를 주고 속사람을 위한 수고도 그것에 걸맞게 하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5:1에서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겉사람과 속사람을 설명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5:1).”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언젠가 무너질 겁니다. 낡아짐과 그 결과인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장막 집은 임시 거처인 텐트를 말합니다. 우리의 임시 거처가 무너지고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는 순간에, 건축의 마스터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주어질 겁니다. 장막 집은 영구 거처가 아닙니다. 장막 집에는 장막 집의 가치만큼의 수고를 쏟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위해서는 그 영원한 가치 만큼의 수고를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 바로 앞에서 바울 사도는 질그릇과 그 질그릇에 담긴 보배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4:7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 질그릇은 별 가치가 없는 그릇입니다. 거기에 영광스러운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보배는 영광의 복음이고 그리스도입니다. 신자의 겉사람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거기에 많은 투자를 한다고 해서, 질그릇이 도자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질그릇의 가치는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가로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질그릇은 낡아져도, 그것이 담고 있는 영광의 복음과 그리스도를 낡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안에 담긴 영광의 보배를 더 찬란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대상은 질그릇 자체가 아니라 그 안의 영광입니다.
이 결론으로 바울 사도는 겉사람은 낡아져, 속사람은 날로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겉사람의 낡아짐으로 낙심하지 않는다고 겁니다.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젊어 지고 더 생동감을 가지게 되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고난과 환난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짐을 더욱 경험하겠지요. 하지만 이 경험 조차, 아니 이 경험 덕분에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말합니다(4:17). 이 말을 이해하십니까? 제가 왜 ‘경험 조차’라고 말하다가, ‘경험 덕분에’라고 말을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환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겉사람에게 무한 가치를 부여하고 살았을 테니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조금 더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 그 환난 덕분에, 우리는 보이는 것—겉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속사람—을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환난 덕분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환난은 공사 중인 현장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공사 자체가 환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겉사람의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공사가 진척되고 있고, 결국 겉사람이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지고, 그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탄식(5:2-4,8)
그렇다고 해서, 신자의 인생에 탄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5:2과 5:4에서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2,4).”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덧)입음과 벗음입니다.
사도의 탄식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 탄식은 고난과 죽음 때문에 하는 탄식이 아닙니다. 이 탄식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약속하신 장래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그에 대한 기대감과 갈망 때문에 일어나는 탄식입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가지는 탄식입니다. 신자에게 부활의 날은 새 몸 곧 영화롭게 된 부활의 몸을 입는 날입니다. 벗음은 죽음을 의미하고 덧입음은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사도는 벗고 싶어서 탄식하지 않고 덧입고 싶어서 탄식합니다.
사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면 한 가지를 더 보게 되는데, 바울 사도는 자신의 죽음 이후 언젠가 부활의 날을 맞기를 원한다기 보다, 자기가 죽기 전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의 몸을 현재의 몸 위에 덧입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5:3-4을 보십시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3–4).” 바울이 이렇게 바란 것은 죽음이 무서워서거나 몸을 입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구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8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린도후서 5:8).”


4. 긴장감 서린 두려움 (5:5,10; 유 20; 갈 5:1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사도가 표명하는 두려움과 긴장입니다. 5:10을 봅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0).”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을 인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심판대에 설 것을 생각하는 사도의 마음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긴장감 서린 두려움입니다. 신자는 구원의 확신과 그날 심판대 앞에서 정죄 받지 않을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휘파람을 불며 그 자리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을 생각할 때 긴장과 두려움은 마땅합니다. 이 두려움은 선악간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는 마땅한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심판으로부터 그를 구원하시려고 일하신다는 반증입니다. 불신자들은 오히려 그 심판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사도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권이 있습니다. 5:5입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린도후서 5:5).” 신자에게 주신 성령님은 미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입니다. 마치 선불로 계약금을 지불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완성될 미래를 약속대로 이루시겠다는 것을 보증하시려고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자가 거듭날 때, 성령님은 그 안에 오셔서 임재하시고 미래를 사모하고 갈망함으로 기다리게 하시고 탄식하게 하십니다. 이 성령님께서 무서움이 아닌 긴장감 서린 두려움으로 그날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날에 우리가 바랄 것은, 건축의 마스터이신 삼위 하나님의 역작인 우리 인생이 놀라운 건축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그 심판대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역작인 우리 자신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수고로 우리가 지은 집이 아닌데, 우리가 그 집으로 지어진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격하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을 바라보고 오늘을 사십시오. 성령님께서는 성경 곧 주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시선을 겉사람에게서 속사람에게로, 눈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로, 땅에 있는 장막 집에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로 끊임없이 옮겨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라 행하십시오(갈 5:16).


5. 교훈과 적용(5:6,8,9,10)
바울 사도에게 미래의 영광은 너무나 확실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겉사람에 열정을 쏟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담대한(5:6,8)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 살았습니다. 그도 공사 중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 하지만 주께서 약속하셨고 성령으로 보증하신 장래의 영광을 믿음으로 주목하면서 살기를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유다서에서 말씀한 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집을 짓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성공과 재물과 세상적 가치 위에 겉사람만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바울은 은퇴 이후의 노년을 준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삶은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고후 5:9).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에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공사중입니다. 그리고 그 공정이 얼마가 진행되었든지 간에, 그리고 우리의 생각만큼 진행이 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에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분은 건축의 마스터이신 삼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일하고 계십니다. 공사 현장인 여러분의 내면은 복잡하고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 되있을 것입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여러분은 이 공사가 완공이 될 수나 있을런지 확신을 가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그 공사를 시작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공사를 마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스터의 뜻과 계획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할 만큼 현재 중심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고, 세상의 이류 행복에 배가 불러서 영원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건축의 마스터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볼 힘이 없습니다. 언제나 이것이 큰 장애입니다.
하지만 머잖아 여러분 인생의 건축물의 최종 감리의 날이 올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죽음의 날,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그 날입니다(고후 5:10).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건축물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집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된 집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신실한지를 보여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완성하실 집을 주목하고 기대하십시오. 그 기대감 때문에 탄식이 나올 만큼 그 집을 기대하고 바라십시오. 이것이 낡아짐과 죽음에 대한 낙심을 삼키게 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삶이고,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집을 짓는 고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 복된 은혜를 같이 누리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겉사람의 낡아짐의 끝을 허락하실 때, 뛰는 가슴으로 완성된 집을 바라봄으로 죽음의 강을 담대히 건너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