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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거룩하신 분을 뵈올 때

이사야 6:1-7, 요한복음 12:41, 출애굽기 33:20-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2-26

말씀내용
1. 예배: 왕을 만나는 시간 (사 6:1a)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때는 주전 740년 경이었습니다. 유다는 솔로몬 이래로 웃시야 같은 왕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을 통치한 유능한 통치자였고 능력 있는 군사 지도자였기에 유다는 그의 시대에 모든 면에서 부강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기 얼마 전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면서 앗수르는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기에 웃시야의 죽음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한 것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이때 이사야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존 오스왈트는 1절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내 눈이 왕을 보았다.” 이사야가 본 왕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왕,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웃시야와 비교할 수 없는 왕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왕을 알현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21세기의 세상에 왕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래 전 휘튼 대학의 4대 학장이었던 레이몬드 에드먼 박사(1900-1967)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에 대하여 채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젊은 학생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감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디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황제 앞에 서기 전에 주어진 많은 지시 사항들, 외교 의례, 황제 앞에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절을 해야하는 방식 등을 설명해주면서, 우리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던 순간, 쿵 하면서 그는 강단 바닥에 쓰러졌고 그렇게 그는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아마 그 채플에서 예배를 드린 학생들은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깨닫든지 그렇지 않든지, 우리는 예배를 드리려고 함께 모일 때 왕 중의 왕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예배가 시작하려는 순간처럼 소홀하게 여겨지는 시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예배의 첫 시간은 거룩하신 왕을 뵙기 위해 이사야가 보았던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분만을 응시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 일이 없을 때 예배는 자기 중심적인 예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배당의 시설, 예배의 음악, 예배의 음향, 예배의 감동 등에 우리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시선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예배당에서 하셔야 하는 모든 것은 그 거룩하신 왕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왕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 저주: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때, 부정한 자신의 존재를 만난다. (사 6:1b-6)
이사야가 보았던 거룩하신 분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1). 그는 성전에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아마 그는 성전 문에 엎드러졌을 것이고, 그의 온 의식은 그 거룩한 분에게 완전히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순간 이사야는 또한 보좌 주변의 다른 존재들을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들인, 스랍들이었습니다. 스랍에 대한 묘사는 이곳이 유일한데, 스랍들은 여섯 날개 중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렸고 다른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고, 두 날개로는 날았습니다(2).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눈을 가렸다는 말과 같은데 스랍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뵈옵지 못하고 단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존재였습니다. 또 발을 가렸다는 것은 자신들의 비천함을 하나님 앞에서 가렸거나, 오직 하나님의 명령만 따라 행하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스랍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3).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감춰진 영광이고,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임재의 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만이 아니라 온 땅에 충만한 영광입니다. 스랍들이 찬송하자,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습니다(4).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땅의 반응입니다. 또한 성전에 자욱한 연기는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실제적 힘은 요동하는 문지방이나 자욱한 연기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 자체였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부정한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5).” 이사야의 이 태도는 거룩하신 분을 뵐 때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부정함에 대한 인식이며 그 결과는 저주와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부정한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으니 자신은 죽어야 한다고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때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선언합니다(6). 스랍이 가져온 ‘핀 숯’은 제단의 불이었습니다. 제단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피로써 죄를 다루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는 장소였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분을 뵈옵고 죽어야 한다고 느꼈고 그렇게 고백했지만, 그는 죽는 대신 그의 모든 부정함과 죄가 순식간에 사하여 졌다는 선언을 듣습니다. 거룩하신 분을 뵈온 죄인이 저주와 죽음 대신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3. 은혜: 이사야가 본 거룩한 분은 그리스도였다(요 12:41; 출 33:20, 22-23; 요 1:18,16).
이사야가 본 거룩하신 하나님은 성육신 하시기 전의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이 본문을 언급하시면서,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한복음 12:41)”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주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밀을 풀 열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친 것은 마땅했고 올바른 반응이었습니다(5).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는 말씀은 농담이 아닙니다(출 33:20).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애굽기 33:22–2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거룩하신 속성을 아주 조금이라도 스치듯이 보고 경험하게 될 때, 누구라도 이사야 처럼 반응할 것입니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죄인됨을 본능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인식합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의 적나라한 실존을 정직하게 대면합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을 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뵌 사람은 결코 이전과 같이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본 거룩하신 분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 율법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우리는 저주와 죽음 외에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나타내셨고,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고 그때 죄인들은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한복음 1:16).” 이사야가 죄인을 심판하시는 제단의 핀 숯으로 정함을 받고 그의 죄와 악이 사하여 졌다는 말씀을 들은 것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실 그리스도를 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룩하신 분을 뵈었을 때, 이사야는 죽었다고 느꼈지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복음 안에서 거룩하신 분 하나님을 뵌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저주와 죽음만을 초래하지만, 복음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거기에는 은혜와 생명이 주어집니다.


4. 부흥(revival): 우리 모두가 거룩하신 분을 뵈올 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내가 뵈옵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인이 그분을 뵈올 때 본능적으로 그리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봅니다. 그것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탄식을 자아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을 뵌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하신 분을 뵙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 은혜는 아무 힘도 없는 밋밋한 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삶을 송두리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는 결코 거룩하신 분을 뵙기 전에 살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거룩하신 분을 뵈었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에 나타난 변화는 무엇입니까? 교회 역사에는 부흥(revival)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부흥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교회에, 혹은 한 도시나 국가에 집단적으로 임하는 영적 각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교회에 찾아오셔서 교회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급격히 회복하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한국교회에는 1907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열리고 있던 사경회에서 길선주 장로가 별세한 친구가 맡긴 100불의 거금을 횡령했던 것을 회중 앞에 울며 고백하였을 때, 다른 성도들이 하나 둘 회개를 시작함으로써 모인 회중 전체가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로 이어졌고 이것이 큰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평양에 방은덕이라는 경찰은 죄를 자백한다는 말을 듣고 교회 예배에 숨어 들어오게 되는데, 그날 설교를 듣고 자신이 회개하고 경찰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맹산교회(평안북도)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이것들은 인위적으로 일으킨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거룩하신 분을 뵈었고 거룩하신 분의 임재 앞에서 놀랐으며 자신의 비참함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가장 최근의 부흥의 사건은 미국 휘튼 대학에서 1995년에 일어난 부흥입니다. 그해 3월 19일 주일 저녁, 기숙사 학생들이 자원하여 드리는 예배에서였습니다. 이들은 얼마 전 텍사스의 하워드 페인 대학에서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간증을 듣기 위해 그 대학의 학생 두 사람을 초청하였습니다. 그 두 학생의 간증을 들은 학생들은 공개적으로 죄를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회개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학생들은 줄어들지를 않았습니다. 수업은 전폐되고, 집회가 23일 목요일까지 닷새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교수들은 부흥이 오기 몇 달 전부터 학교 안에서 기도하는 학생들의 그룹들을 특이하게 많이 볼 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지금 다시 이와 유사한 일이 미국 켄터키주 윌모어(Wilmore)에 있는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 수요일, 학생들의 채플에서 조그마하게 시작된 이 일은 지금 20여일 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이 부흥의 현장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켄터키의 작은 도시인 윌모어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물론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좀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제가 오늘 이런 부흥의 사건을 여러분과 나누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영혼이 거룩하신 분을 뵈옵고 영적으로 각성이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부흥은 공동체가, 그리고 주변의 사회가 거룩하신 분의 임재에 대한 의식으로 각성되는 사건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사야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오늘 우리 개개인에게 일어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우리 공동체에, 한국교회에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집단적으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본 죄인들에게서 회개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와 악을 사하시며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으로 충만해 질 것입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거룩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5.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하지만 예배당은 성전이다. (고전 3:16; 고후 6:16; 엡 2:21)
우리는 거의 한 달에 걸쳐 진행된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다시 이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자리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성전도, 성전 제사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모인 곳은 성전입니다. 구약 성전과 같은 의미에서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육체로 드리신 영단번의 제사의 효력을 믿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성도 자신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했고(고전 3:16)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모임이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후 6:16; 엡 2:21). 이 장소가 특별하게 거룩한 장소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주일마다 모이는 까닭에 이 장소는 거룩하게 구별된 성전입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던 자리가 성전이었습니다. 우리는 실제 성전인지, 환상 속의 성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 모두가 거룩하신 왕의 왕을 뵈옵는 역사가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분을 뵈옵는 일 말고, 여기서 우리가 바라고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6. 교훈과 적용 (출 3:5,6; 계 1:17)
우리는 하나님을 가볍게 취급하고 하나님에 대해 하찮고 부주의하게 말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분위기와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상실하였고, 깃털 같이 가벼운 프로그램들로 채워졌으며, 예배는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했습니다. 더 이상 예배는 우리 삶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예배는 즐거움과 편리함의 가치에 밀려나고 만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진짜 기독교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스코틀랜드의 설교자 제임스 스튜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설교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양심을 뒤흔들고 하나님의 진리로 마음을 먹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상상력을 몰아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지를 떠맡기는 것이다.” 설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영광 가운데 당신의 회중을 만나주시기 위해 주신 거룩한 수단입니다. 저는 이렇게 설교자의 직분을 감당하기를 원하고 또 원합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거룩하신 분의 임재를 강렬하게 경험하고 그 경험이 우리를 전과 같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들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이사야가 시간에서 들어올려져서 영원으로 들어간 것은 그가 거룩하신 분의 임재를 보았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사야는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분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적인 생각들이 모두 거룩하신 분의 임재에 압도당하고, 오직 왕의 왕이신 하나님만을 응시하게 되며,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사랑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예배를 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그 위엄 있고 거룩하신 왕의 왕을 뵈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준비가 있습니까? 온라인 예배냐, 현장 예배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예배당, 이 성전에서 우리 모두가 거룩하신 왕의 왕을 뵙는 영광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거룩하신 분을 뵈었을 때 발에서 신을 벗었고 그의 얼굴을 가렸습니다(출 3:5,6). 사도 요한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다시 뵈었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계 1:17). 그 자리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저는 벧샬롬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이 그 거룩하신 분을 함께 뵈옵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이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예배당이 우리 모두가 그 거룩하신 분의 임재 앞에서 엎드려 무릎을 꿇는 예배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