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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부, 탕자 그리고 탕형

누가복음 15:11-32, 에베소서 2:4-9, 고린도전서 1:29-3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2-12

말씀내용
본문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렘브란트(1606-1669)가 그린 ‘탕자의 귀향’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이토록 잘 알려진 비유를 오늘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이 비유의 대략을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1. 기다리는 탕부(prodigal father)의 비유
이 비유에는 적어도 세 사람의 중심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입니다. 이 비유에서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비유의 제목도 결정됩니다. 많은 사람은 비유의 중심 인물은 둘째 아들인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의 제목도 ‘탕자의 귀향’입니다. ‘탕자(prodigal son)’라는 말은 방탕한 아들이란 말입니다. 아들을 수식하는 ‘탕(prodigal)’은 ‘무모하게 씀씀이가 헤픈, 남김 없이 다 써버리는, 낭비하는’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이 ‘탕자’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갔을 것이고, 서서히 탕자를 비난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계신데,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합니다. 이 아들의 됨됨이를 이미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이 요구하는 몫을 내어줍니다. 몰라서 준 게 아닙니다. 아들이 유산을 받아서 어떻게 할지를 알면서도 유산을 내어주는 이 아버지야말로 진정 헤픈 사람, 탕부가 아닙니까?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먼 나라로 떠납니다. 거기서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탕진해 버린 뒤에 그 나라에는 큰 흉년이 들게 되고, 그는 들에서 돼지를 치며,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 비참한 자리에서 비로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자기의 죄를 깨닫습니다. 다시 아들로 받아줄 것을 기대할 수는 없더라도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라도 받아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뒤로 없던 습관이 생겼습니다. 마을의 길 끝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지나 않을지 기다리는 습관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삽입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20절은 충분히 이런 상상을 허용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 어떻게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 안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헬무트 틸리케는 이 비유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불렀습니다. 비유의 중심인물은 바로 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주목해 보십시오. 형편 없는 몰골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본 늙은 아버지는 순간 측은한 마음이 충만해졌습니다(20). 그리고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이 오기를 서서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필시 더러운 몰골을 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아들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하지만(21),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2-24).” 여기서 여러분이 보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그는 역시 탕부입니다. 유산을 요구하는 아들에게 헤프게도 유산을 줘버린 아버지는 여기서도 탕부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깁니다. 존귀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는 상징들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먹고 즐기자고 파티를 벌입니다. 아마 이 아버지는 그 저녁에 체면을 다 잊어버린 채 덩실 덩실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이때 또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맏아들입니다. 집이 가까워지면서 맏아들은 오랜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동생이 나간 뒤로는 좀체 들어볼 수 없었던 소리입니다. 그래서 종을 불러 묻고는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중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기뻐야 마땅할 그 순간에 맏아들은 부아가 치미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어 분노합니다. 눈치를 챈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맏아들은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 늘 순종적이라고만 믿었던 맏아들에게도 뭔가 맺혀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분노하고 원망하는 맏아들을 설득하고 권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 맏아들이 결국 잔치 자리로 들어갔을까? 주님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궁금해 했겠지만, 주님은 거기서 이야기를 마치셨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을 주목합니다. 15장 1-2절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2).” 이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을 환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며 들려주신 이야기였습니다. 둘째를 환대하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고 분노하는 맏아들이야말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점에서 비유의 중심인물은 맏아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감동적인 이 비유는 단순하지만, 세 등장 인물 각각을 통해서 주는 메시지는 강렬합니다.


2. 두 아들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일 뿐
주님의 이야기를 듣는 일반 청중들은 당연히 두 아들을 비교하고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둘째 아들 탕자를 비난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런 자식이 있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리고서 무슨 낯짝을 들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맏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던 일반 청중들은 맏아들에게 더 공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야기 속의 두 아들을 통하여 두 종류의 죄인을 묘사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아들은 누가 보아도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살려고 하는 죄인입니다. 교회당 안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더라도 많지는 않아 보입니다. 보통의 교인들은 이런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불편해 합니다. 그들은 도덕적이지도 않고 종교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저런 사람들이 왜 예배당에 앉아있지?”라고 질문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맏아들이 둘째 아들을 향해 가진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교회라면 나는 이 교회를 떠나겠다”고 생각하는 상황입니다.
맏아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을 환대하시는 것에 분노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변합니다. 맏아들은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종교적이며 교회 안에 직분자들이거나 리더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세리와 창기는 당대의 눈으로 보면,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크게 느껴질 만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한 자리에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보통의 유대인들 처럼 세리와 창기를 경멸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통의 사회적 기준으로 특정한 직종에 있는 사람들 혹은 특정한 사람들을 대할 때 그 특정한 성격 때문에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경멸한다면,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무율법주의자들입니다. 법 없이 제 맘대로 사는 둘째 아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아들과 맏아들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물론 차이가 많습니다. 둘째는 제 멋대로 살아가는 아들이라면, 맏아들은 마음이야 어떻든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고 명을 어김이 없이 순종하는 아들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야기를 통해 이것을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두 아들 모두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은혜가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3. 탕부 하나님 (엡 2:4-9)
이제 아버지를 봅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탕부가 맞습니다. 그는 재산을 탕진해 버릴 것이 뻔히 보이는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헤프게 나눠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은 채,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할 시간과 기회를 주지도 않은 채 용서를 베풀고 그를 존귀한 아들의 자리로 회복시킵니다. 아버지의 이 용서는 맏아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너무나 헤픈 용서, 값싼 용서가 아닙니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여 풍악을 울리고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아버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천국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이 아버지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탕부적 성향’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탕부적 성향’이란 말은 좀 낯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물론 방탕한 아버지는 아니십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하나님은 무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헤프게 베풀어주는 아버지입니다. 재산을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말입니다. 둘째 아들에게만이 아닙니다. 노기를 품은 맏아들에게도 그 아버지는 “속이 좁아 터진 못난 놈!”이라고 말하는 대신,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31).”이라고 다정히 말하며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자고 설득하고 권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에베소서 2:4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에베소서 2:4).”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을 싫어했고 대적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만을 받기에 합당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넘치는 긍휼과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한 단어로 ‘은혜’라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좀 더 읽어보지요. 2:5-9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5–9).”
은혜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자비하심도 등장합니다.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은혜는 자격 없음을 전제합니다. 둘째 아들이 자격이 없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던’ 맏아들은 지금 자신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자격을 의식하고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은혜는 사라집니다. 여기에 헤플 정도로 후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자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맏아들에게나 둘째 아들에게나 탕부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탕부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는 순간은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자신이 탕부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4. 탕부의 은혜, 칭의
신자의 구원을 설명하는 성경의 설명과 개념들은 풍성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하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드러내는 개념은 칭의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칭의는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와 그 품에 안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손에 가락지를 끼고 새 신을 신게 된 일은 그야말로 칭의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아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가면 비록 자신이 아들이라 불릴 자격은 없지만, 아버지가 자기를 쫓아내지 않고 품꾼의 하나 정도로는 받아들여 주실 것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저 요만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 때문에 그는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칭의는 행위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 칭의입니다. 칭의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는 하나님의 사법적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영원히 유효합니다. 칭의는 탕부 하나님의 헤픈 용서와 사랑을 놀랍게 보여줍니다. 탕부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헤프게 내어주셨습니다(롬 8:32). 탕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하심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진노를 쏟아부으셨고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가하셨습니다. 그리고 탕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이루신 의로움을 믿는 자들에게 헤프게 전가해 주십니다. 칭의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의롭게 변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둘째 아들은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갑자기 그가 착해졌고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가 경험하고 맛본 탕부의 사랑과 은혜는 그를 서서히 변화시켜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칭의는 그 자체로 사람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과는 무관한 사법적 선언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격을 갖추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칭의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믿기 어렵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뭔가 내 안에서 구원을 받을 만한,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만한 근거와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에게 일어난 일처럼, 칭의는 급격하게 그리고 엉겁결에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는 아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라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입니다. 심지어 종들에게 명할 때 개역개정역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아버지는 ‘속히, 빨리’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23). 엉겁결에 일어난 일입니다. 칭의는 믿는 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우리에게 입혀진 옷과 같은 것입니다. 신분이 변한 것입니다.
탕부 하나님은 실패하고 상한 자들을 향한 불붙는 긍휼과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다’는 헬라어 단어는(20) 창자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애간장을 저미는 심정으로 아들을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탕부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그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을 향기나는 사람들로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뻐할 만한 대상을 찾는 사랑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지 못한 자를 찾아 기뻐할 만한 자로 만드는 사랑입니다.
맏아들의 모습도 사실 이해는 되지만 그리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탕부는 맏아들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내밉니다. 파티에 들어와서 같이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자고 말입니다. 자기는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맏아들을 향한 탕부의 긍휼은 불타오릅니다. 칭의는 자격이 없는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탕부의 헤픈 용서이고 헤픈 사랑이지만 값싼 은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용서와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성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고 십자가에서 그를 향해 진노를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비싼 용서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재산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탕부셨습니다.


5. 천국은 잔치이고 춤이다 (엡 2:8-9)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3).” 풍악과 함께 춤판이 벌어졌습니다.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런 천국의 잔치를 맛보는 곳이 아닙니까? 이 잔치가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탕부는 돌아온 아들을 향해 당신의 아낌 없는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었기에 기뻐합니다. 칭의는 이런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윌리엄 틴데일은 “칭의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하고 기뻐 뛰게 하는 흥겹고 반갑고 기쁨 넘치는 소식이다”라고 했고, 찰스 웨슬리는 “나를 얽어맸던 사슬은 끊어져 내리고 내 영혼은 자유하게 되었네. 나는 일어나, 나아가, 주님을 따르게 되었네”라고 노래했습니다.
칭의의 은혜는 기쁨을 가져오고 춤을 추게 합니다. 반면, 칭의는 자랑할 수 없게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 바울 사도는 얼마나 많은 곳에서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된 것이니 자랑할 수 없다고 강조하여 말했는지 모릅니다. 자랑은 자격을 갖추었다는 의식에서 나옵니다. 맏아들은 어떤 면에서 자랑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그로 하여금 기뻐할 수 없고 즐거움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의 영역에서, 자랑하는 자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는 천국의 잔치를 즐길 수 없습니다. 맏아들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고 즐길 수 없었으며 춤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칭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랑이 없는 대신 기쁨이 넘치고 잔치를 즐길 수 있습니다. 칭의는 탕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공로를 결합시킬 수 없게 합니다. 여지가 없습니다.


6. 예수 그리스도, 나의 의 (고전 1:29-31)
칭의를 알고 탕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의의 은혜를 맛본 신자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격을 논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자랑하지 말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1:29–31).”
우리가 자랑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비록 우리는 실제로 의로워지지 않았으나,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탕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입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랑하려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탕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그 옷,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자랑할 뿐입니다.
우리는 “나는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그저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나의 의로움이십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여러분의 의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계시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해 ‘그에게는 의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헤프게 내어 주신 탕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윌리엄 틴데일이 말한 것처럼, 즐거이 노래하고 춤추고 기뻐 뛸 수 있습니다.


7. 추가 적용점—'탕형(prodigal brother)’
오늘날 교회당은 맏아들로 가득합니다. 둘째 아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맏아들들이 불편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당은 잔치집이 되지 못합니다.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자들의 판단과 엄숙함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맏아들이 둘째 아들보다는 낫다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야기는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은혜가 필요한 죄인일 뿐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교회가 집을 나간 수많은 둘째 아들들이 돌아올 수 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탕부의 마음을 품고, 탕부와 함께 동구 밖에 나가 동생을 기다리는 ‘탕형(prodigal brother)’들이 많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교회는 풍악이 울리고 춤이 그치지 않는 잔치집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