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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자리

마가복음 4:1-20, 마가복음 3:35, 이사야 6:9-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2-05

말씀내용
인생을 여정에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 부합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정은 정처 없는 여정이 아니라 목적지를 가진 여정입니다. 모두는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그 목적지는 정확합니다. 방황할 때가 없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여정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할 수 없다면 지도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없고 자신이 제대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 아침에 교회당에 와 앉아있다는 것이 여러분이 서있는 영적 자리를 확인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해,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궤도에서 이탈해 있는 것이 확인된다면 다시 그 궤도 위로 돌아와야 할 것이고, 궤도 위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한다면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1. 내부인인가 외부인인가 (막 3:35)
주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는 많은 분들에게 익숙할 것입니다. 이 비유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더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이 질문은 본문의 큰 맥락에서 보면 “내부인인가, 외부인인가?”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주님은 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으러 왔습니다. 이때 주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이냐고 물으시고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3:35).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가족이고 내부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부인과 외부인의 구도를 견지하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내 곁에, 내 앞에서 말씀을 들을지라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나와 상관 없는 외부인일 뿐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깨달음과 열매가 그 관건입니다.


A. 깨달음 (막 13:10-12; 사 6:9-10)
말씀을 깨닫는 것은 외부인과 내부인을 가르는 첫째 기준입니다. 10-12절에서 주님은 분명하게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분하십니다. 본문의 구성을 보면, 1-9절에서 주님은 큰 무리에게 비유를 말씀하셨고, 10-20절에서는 함께 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10-12절에서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분하십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마가복음 4:10–12).”
여기서 주님은 ‘너희’와 ‘외인’을 분명하게 구분하십니다. ‘너희’는 내부인이고 ‘외인’은 외부인입니다. 그들의 차이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느냐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11절에 의하면, 내부인들에게는 그 비밀이 주어지지만 외부인들에게는 비유로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내부인인 ‘너희’는 그 비밀을 깨닫지만, 외인(외부인)은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내부인은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서 ‘비밀’은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거나 비범하고 영리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다가 알려주면 누구라도 “아 그거였어?”라고 반응할 수 있는 일종의 기밀 정보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난해한 구절이 나옵니다. 12절입니다.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마가복음 4:12).”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인데(사 6:9-10),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외부인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셨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는 바, 그들 자신이 가진 원인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R.T.프란스의 번역은 이 구절의 뉘앙스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으로 보아도 알지 못하고 참으로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원하지 않는 것은 돌이켜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 셈어 사상의 맥락에서 읽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비밀 종교들은 비전(秘傳)으로 전해지는 지식과 예식들을 외부인에게 누설하지 않았고, 누설하게 되면 사형에 처하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전해 받은 비밀인 복음을 외부인과 공유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는 점에서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고 외인에게는 비유로만 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10절에서 ‘함께 한 사람들’이 누군지 생각해 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너희’는 단지 열 두 제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혼자 계실 때 함께 한 사람들이 더 있었고, 주님은 이들에게도 ‘너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내부인임을 전제하십니다. 이들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비유를 듣고 떠나버린 사람들과 달리, 거대 군중 속에서 몇 사람은 들은 말씀에 매료되어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며 열 둘에 가세한 것입니다. 이들은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영적 호기심과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더 많은 것이 주어지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비유를 통해 들은 유익마저도 잃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비유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진리를 제대로 그리고 깊게 알기를 원하는 자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러 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이들은 듣고자 하는 자들,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들었고 보았지만 그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돌이켜 죄사함을 받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들은 것의 유익 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요지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부인은 주의 말씀을 알고자 하고 진리를 배우려고 주님 곁에 머무는 자, 결국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라는 것입니다.


B. 열매 맺음 (막 4:8,20)
두번째로 내부인의 특징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자는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비유의 내용 가운데서 발견하게 되는데, 네 가지 밭 중에서 좋은 땅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씨가 열매를 맺는 경우는 오직 좋은 땅에 떨어졌을 때만입니다(막 4:8,20).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지점은 무엇이 그 씨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는 열쇠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박해와 같은 외적 요인이거나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와 같은 내적 요인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로 깨달음입니다. 열매는 깨달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돌이켜 죄사함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회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이 세상 나라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주인이 바뀝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로마 제국과 그 영광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살아가던 가치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열매는 그저 한 두개 열리고 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으로부터 또 다른 사람들이 그 비밀을 깨닫게 되는 연쇄 작용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마 제국 혹은 이 세상 나라의 가치를 따라 세상의 목표가 수정되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한 가지 답만이 존재합니다. 그는 교회를 다니지만, 그리고 설교를 듣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내부인은 주님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막 3:35). 그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고 그는 깨달았기에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11절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외부인은 비유의 말씀을 듣고 더 이상 반응하지 않습니다. 듣지만 깨닫지 못하고 세상살이에 대한 관심과 염려는 지대한 것에 반해 진리에 대한 관심과 갈증이 없습니다.


2. 네 종류의 밭
내부인과 외부인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 비유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구도속에서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네 종류의 밭은 말씀을 받는 네 종류의 사람,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각각 대변합니다. 이들 중 하나의 밭만이 깨닫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들이 내부인입니다. 이제 각각의 밭을 살펴볼텐데, 우리는 자신이 서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A. 길 가 (막 4:4,15)
제일 먼저 ‘길 가’입니다. 4절입니다.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마가복음 4:4).” 씨가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새들이 와서 씨가 떨어지기도 전에 먹어버리거나 떨어지자마자 먹어버리곤 하는 경우입니다. 15절은 주님의 설명입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마가복음 4:15).” 예배당 안에 앉아있지만 그리고 예배에 참여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한 말씀도 깨닫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소극적 경우일 것입니다. 길 가는 또한 수용이 수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항을 위해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및 헤롯당에 속한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악한 태도로서, 사탄의 침입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영적 잠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씨 뿌리는 자인 메신저를 향한 적대감으로 나타납니다.


B. 흙이 얇은 돌밭 (막 4:5-6,16-17)
두번째는 흙이 얇은 돌밭입니다. 이들은 일단 말씀을 긍정적으로 수용합니다. 5-6절입니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마가복음 4:5–6).” 이들은 적어도 사탄이 즉시 말씀을 빼앗아 버리는 길 가와 같은 사람이 가진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16절에 주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일단 말씀을 수용할 뿐 아니라 기쁨으로 수용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말씀 수용은 잠시일 뿐입니다. 17절입니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가복음 4:17).” 문제는 흙이 얇아서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없는 상태로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뿌리가 없다 보니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넘어지고 맙니다. 믿음과 말씀으로 인한 작은 어려움에도 흔들거리고 쓰러지기를 반복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반응을 합니다.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기쁨으로 반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나누기도 합니다. 하지만 입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삶으로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깊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열매를 맺는 자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상적입니다. 일상의 삶이 시작되면,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이 생기면 뿌려진 말씀이 그 속에서 힘을 쓰기는 커녕, 바로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예배당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C. 가시떨기 (막 4:7,18-19)
세번째로 주님은 가시떨기에 떨어진 경우를 말씀하셨습니다. 7절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마가복음 4:7).” 18-19절에 있는 주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유형은 어느 정도는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흙이 있으므로 자라기는 하는데 숨통을 막아버리는 가시떨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들의 문제는 ‘이 시대의 걱정’과 ‘재물의 속임’ 그리고 ‘욕심이 들어와’ 자라도록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는 ‘이 시대의 걱정’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 하에 들어오지 않는 이 세상이 만들어내는 걱정을 의미합니다. 가시떨기와 같이 말씀을 대하는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시대의 원리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우상이 가득합니다. 우상이 제거되는 것은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들에게는 회개와 돌이킴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단지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우상의 정체를 발견하고 그 우상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회개 없는 말씀 청취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코이노니아 나눔 질문에서 언제나 1번으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회개해야 할 것과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형식적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들었을 때 회개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언제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D. 좋은 땅 (막 4:9,20)
네번째로 주님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입니다. 여기에 뿌려진 말씀은 씹고 또 씹어서 그들의 양식이 됩니다. 그 말씀을 깨닫고 만족할 뿐 아니라, 그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삶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말씀이 삶의 원리가 되고, 순종해야 할 법이 됩니다. 이들에게는 돌이켜 회개함이 있고 자기 부인이 있으며 십자가 짐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바로 앞의 가시떨기에서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이 시대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욕심’과 싸우고 그것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부인이 없이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좋은 땅의 경우, 자라는 것은 가시가 아니라 씨입니다. 가시 즉 이 시대의 걱정과 돈 걱정과 온갖 욕심과 싸우기 위해 자기 부인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싹이 나서 자라며(현재형), 열매를 맺게 되는데(미완료), 여기서 사용된 현재와 미완료 시제는 앞의 세 밭의 경우에 부정과거시제를 사용한 것과 대조적으로, 성장과 자라남과 열매 맺음이 계속 진행 중임을 강조하여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지속성이 있습니다.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는 지속적으로 그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며 그 말씀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3. 교훈과 적용 (롬 8:6; 막 4:25)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너희가 선 자리는 어디인지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네 종류의 밭 가운데 어디에 서 계십니까? 주님의 제자가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고 제자의 삶에 주어지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내 영혼이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면, 씨가 마음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고 있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건 정말 큰 일이 아닙니까? 돌이켜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든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또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때로는 기쁨으로 듣기까지 하지만 깊어지지 않아서 조금의 어려움만 있으면 흔들리고 무너져 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험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는 가시떨기과 같은 밭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들어서 자라는 것 같은데 번번이 이 시대의 걱정 거리 때문에 질식하고 맙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닌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이 마음을 사로잡아, 영적 생각이 돌아가지 않게 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로마서 8:6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6).”고 말씀합니다. 가시떨기은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제자가 삶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또 축복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영적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믿음의 순종이라는 과정을 통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인간의 그 작은 역할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제자들의 공동체의 성장과 일치합니다. 벧샬롬교회에 속한 주님의 제자들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고 그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장애물들 피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순종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매 맺는 제자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역할입니다. 이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열매를 맺는 축복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사람은 더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깨달음에 더하여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반면, 다양한 방식과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은 그 대가로 모든 영원한 축복을 잃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마가복음 4:25).”
설교의 목표는 여러분을 매주 선포되는 성경 본문이 가르치는 원리에 점차 정렬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설교를 하는 목표입니다. 매주일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의 삶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다양하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점차 정렬되어가야 합니다. 신앙이 생동력있게 자라가고,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소망이 커져가며,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신뢰, 경건한 습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과 성품의 형성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설교의 목표입니다. 어거스틴은 성경을 강해하는 목표는 회중이 "이해하고 기뻐하며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역사가 매주일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뿌려진 말씀의 씨가 결실하는 좋은 땅과 같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