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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도우심

역대하 26:15-16, 이사야 9:6-7, 누가복음 12:4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2-25

말씀내용
1. 웃시야의 흥망성쇠 (대하 26:1-23; 왕하 14:21; 15:1; 단 11:32; 민 12)
웃시야는 일찌기 16세에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되어 52년 간 통치한 왕입니다. 55년을 통치했던 므낫세를 제외하면, 웃시야의 통치기간 52년은 남북 왕국을 통틀어 한 왕이 다스린 두번째로 긴 통치 기간입니다. 이토록 오래 통치한 왕이 어리석으면 그 나라, 그 시대의 백성은 물론 그 후손들까지도 겪게 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는 명석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대하 26:5-15에 기록된 그의 업적은 놀랍습니다. 그는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복종시켰고 거기에 성을 건축했으며 암몬 사람들도 복종시켜서 조공을 바치게 했고(6-8) 예루살렘을 견고한 성으로 만들었습니다(9). 또한 많은 군사들을 일으키고 전쟁 무기들을 개발함으로써 군사력이 신장되었고(11~15a), 다른 한편으로는 축산업과 농업 등을 활성화함으로써 경제력도 증강되었습니다(9~10). 이러는 동안 웃시야의 이름은 애굽 변방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8,15). 웃시야는 뛰어난 통치 능력을 가진 역량 있는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그의 명석함이나 리더십 역량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의 강성함의 열쇠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에 있었다고 밝힙니다. 즉, 국가의 번영과 부강함의 원인은 웃시야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웃시야가 이룬 부와 강성함은 그의 명석함이나 그가 가진 능력과 업적에 돌려지지 않습니다. 16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거두어졌을 때의 모습을 대조하여 기술함으로써, 이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역대하 26:16).”
슬프게도 강성함의 결과는 웃시야의 마음의 교만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말은 그가 자신의 성공의 열쇠를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웃시야는 자신의 강성함이 자기 능력, 두뇌의 명석함, 탁월한 리더십의 산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보고 인정하는 일에서 실패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마음의 교만함은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직접 분향을 하려고 함으로써, 제사장 고유의 일을 침범했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마음의 높아짐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만의 끝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보지 못하면 그 누구라도 이런 자리로 가게 된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제사장 아사랴는 용맹한 제사장 80명과 함께 웃시야를 따라 들어와 분향하려는 왕을 제지했습니다. 웃시야의 다른 이름이 아사랴라는 점은 아이러니합니다(왕하 14:21; 15:1). 제사장 아사랴의 말입니다.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역대하 26:18).”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제사장은 얼마나 용감한 사람입니까? 다니엘 11:32에서 말씀한 것처럼,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이렇게 용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사랴를 통해서 웃시야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웃시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도리어 웃시야는 용맹한 제사장 아샤랴에게 분노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 화를 낸 것입니다.
그렇게 화를 낼 때,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웃시야의 분향을 제지하셨는데, 그것은 웃시야의 이마에 발한 나병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병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웃시야 자신도 거부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였고,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들은 왕을 성전에서 급히 쫓아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였을 때 나병이 발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다만 7일 동안만 나병이 발했었던 것과(민 12), 달리 웃시야에게 임한 나병은 잠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회복을 보지 못했고, 그 일로 남은 평생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져 별궁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후에는 아들 요담을 통해 섭정을 해야만 했고, 죽어서도 왕들의 묘실에 묻히지를 못했습니다(대하 26:21,23). 강성함에서 이어진 마음의 교만이 이 위대한 왕을 비참함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위대한 왕 웃시야에게 이 비참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지점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며 망각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모든 문제는 거기서 시작합니다.


2. 인생 메시지—우리 인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눅 12:48; 대하 26:5,7)
여러분은 웃시야의 이야기에서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십니까? 모든 죄인의 인생이 웃시야의 삶과 닮은 꼴이 아닙니까? 웃시야는 명석했고 그가 남긴 업적은 그의 탁월한 리더십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반 은혜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능력과 동등한 리더십의 역량과 동등한 성품과 기질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모두에게 다르게 주시지만 누구도 불평하거나 자만할 수 없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누가복음 12:48).”고 하신 대로,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주신대로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2022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간에 우리의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거나 적어도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집니다. 본문은 이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내 인생에 나타난 그 ‘기이한 도우심’을 알고 있는가? 내가 무엇을 이루었고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인정하는가? 여러분은 웃시야 만큼이나 똑똑할 수 있고, 탁월한 리더십의 역량을 갖추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온 만큼의 보상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웃시야가 넘어진 지점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열심, 명석한 두뇌, 리더십의 역량, 사람들을 사로잡는 성품 등으로 자신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웃시야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지점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역대하 26:5).” 스가랴는 이 본문 외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스가랴가 살아서 웃시야의 지근거리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동안에는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았고, 웃시야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형통하게 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5절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처음으로 설명해줍니다. 웃시야의 성공은 하나님께서 주신 형통함의 열매였습니다. 그 결과가 웃시야의 모든 업적, 즉 군사적 승리, 성읍들의 건축, 강성함과 이름이 애굽의 변방까지 알려지게 된 일, 대규모 건설 사업, 축산업과 농업의 발달, 군사력의 증대와 각종 무기 개발이었습니다(6-15). 성경 기자는 7절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라고 씀으로써 이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입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웃시야가 걸었던 성공가도를 걷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스스로 생각할 때에 얼마나 잘 풀리든지 그렇지 않든지 마음의 교만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이 잘 풀리고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해줄 만한(본인 자신이 인정하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웃시야가 빠진 마음의 교만에서 조심해야겠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반대의 경우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의 교만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안 풀리면 안 풀리는 대로, “내가 이런 자리에 있을 사람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내가 이것 보다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웃시야 같은 사람이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고, 내게는 이런 일 정도를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여긴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교만하고 마음의 교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내 인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아는가?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는가? 인정하는가? 기이한 도우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인생에서 이룬 결과와 자신이 현재 서있는 자리와 상관 없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느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안전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가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전해주는 경건한 어른일 수 있고 혹은 경건한 공동체일 수도 있습니다. 경건한 어른은 내 인생이 내 능력과 힘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삶과 존재로써, 그리고 말씀으로써 알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경건한 어른 가까이에 머물러 살아가야 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경건한 공동체도 우리 모두에게 경건한 어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한 공동체를 추구해야 할 이유입니다.
스가랴가 사는 날에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웃시야 시대의 모든 부와 강성함이 웃시야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보여주는 말이 아닙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많이 가졌든 그렇지 않든,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든 그렇지 않든,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웃시야와 같은 실패 사례들은 넘쳐 흐르기 때문입니다.


3. 크리스마스 메시지—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의 절정이신 그리스도 (롬 3:10,23)
웃시야의 인생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인생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교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라는 참혹한 결과를 면할 수 없는 것은 범죄한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인생은 하나 같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라고 선언합니다(롬 3:10,23). 인간에 대한 이보다 더 비참한 선언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인간이 이렇게 비참함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의 교만 때문에 인류에게 저주가 임했고 인간은 죄와 비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나타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기이한 도우심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일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기이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났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의 절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마음의 교만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결국 비참한 결과를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죄인에게 기이한 도우심을 베푸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아십니까? 그 도우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습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도 소망 없고 죽어도 소망 없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었습니다.
이 기이한 도우심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능력 가운데 일부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신 도우심이 아니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돈의 일부로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 도우심은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주셨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만 유효한 도우심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써 허락된 기이한 도우심이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유일하신 아들을 포기하시고 내어주심 가운데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아버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또한 하늘에서 당신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땅으로 오신 아들의 자기를 비우시는 사랑을 주목하십시오. 이렇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익숙해져 있지만, 사실 이 날보다 더 기이하고 경이로운 날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보십니까?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인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인생의 열쇠로 받아들이십니까? 웃시야의 삶의 흥망을 결정한 것이 그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잊지 않고 인정하였는가에 달려 있었듯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교만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기고만장합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왔고 자기 힘으로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그 힘에 의지하여 망해 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류, 소망 없는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한,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형통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여러분의 똑똑함과 성공적 커리어, 리더십과 모든 능력이 여러분의 인생의 흥망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여러분의 영원한 흥망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크리스마스 메시지입니다.


4. 여호와는 나의 힘이다. (사 6:1; 9:6-7; 행 4:12)
웃시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힘’입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성전에서 그를 말렸던 용감한 제사장의 이름과 같은 아사랴입니다. 아사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입니다. 웃시야는 자신의 이름으로써 그리고 그의 인생의 흥망성쇠를 통해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후대의 모든 성경 독자들에게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기이한 도우심’이라고 할 때, ‘기이한(פלא)’이라는 단어는 ‘넘치는, 비상한, 놀라운(하나님의 기적 행위), 너무 어려운(설명불가, 성취불가한), 구별되는, 경탄할 만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만큼 놀라운 도우심입니다. 우리 인생에 나타나는 기이한 도우심도 그러하고, 기이한 도우심의 절정인 그리스도를 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으며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을 본 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잊어버렸던 웃시야가 죽던 해였습니다(사 6:1). 이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여호와가 너의 힘!”이라고 다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6–7).”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당신의 가장 기이한 도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2022년도 성탄 주일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웃시야! 여호와는 나의 힘이다! 웃시야, 그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사도들이 공회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바가 없습니다(행 4:12).